한국역사 79

요절한 어린왕자의 곁엔 정체모를 고분들...혀내민 말토기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입력 : 2022.03.22 05:00 수정 : 2022.03.22 09:26 1924년 발굴된 금령총의 나무곽 내부 상황. 무덤주인공의 착장상태와 출토유물의 사이즈 등을 검토했을 때 신장이 1m 가량의 요절한 어린 왕자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금관과 족옥을 양끝 기준으로 해서 허리띠가 있는 부분을 토대로 신체비율을 따졌을 때 3세 아이(5등신) 비율에 맞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키가 1m로 추정할 경우 목관의 길이(1.5m)가 지나치게 큰 감이 있다. 추정 나이와 키는 좀더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성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신광철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제공 일제강점기인 1924년 5월 10일부터 경주 노동동의 폐고분 2기가 조사되기 시작된다. 126호와 127호라..

한국역사 2022.03.22

피란민 흥남철수 작전땐, 든든한 뒷배 돼준 미주리호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8] 20세기 세번의 전쟁 참전백전노장 전함 미주리호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1.08.24 03:00 하와이의 진주만 해상에는 애리조나호 기념관(USS Arizona Memorial)과 박물관 선박 미주리호(USS Missouri·BB-63)가 마주 보고 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 공격 당시 이곳에 정박해 있던 애리조나호는 일본 함재기의 공습을 받아 침몰했고, 약 1100명의 선원이 사망했다. 미국 당국은 이 배를 인양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바다 위에 추모 기념관을 지었다. 한편, 전함 미주리호는 제2차 세계대전 말에 건조되어 곧바로 일본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을 치르는 장소로 사용됐다. ..

한국역사 2021.08.24

實은 소련군이 점령군, 미군이 해방군이었다!

스탈린式 정치 언어 “이용가치 있는 계층이 싫어할 구호 지양” 이윤재 번역가·평론가 입력2021-07-13 10:00:01 독일 나치당은 합법적 과정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고 주장하고자 ‘권력 장악’이라는 말보다 ‘권력 인수’라는 말을 썼다. 나치는 사악한 행위에 상냥한 이름을 붙여 겉보기에 그럴싸하게 위장했다. ‘전쟁 준비’를 ‘평화 확보’로 바꿔 불렀다. ‘시민(Bu‥rger)’ 대신 ‘국민 동지(Volksgenossen)’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 국민을 대접(?)했다. ‘오스트리아 점령’을 ‘제국의 품으로’(하임 인스 라이히: Heim ins Reich=Back Home to the Reich)로 바꿔 불렀다. 나치 수용소에서 사망자가 만(萬) 단위로 집계되는 가운데 희생자는 오직 통계상 숫자로만 존재..

한국역사 2021.07.18

50년전 오늘, 한국 고대史의 블랙박스가 열렸다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공주박물관서 특별전 유석재 기자 입력 2021.07.08 03:00 석판에 새겨진 ‘백제사마왕(百濟斯麻王)’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 발굴단은 흥분을 누를 수 없었다. “무령왕입니다!” ‘사마’는 백제 25대 임금 무령왕(재위 501~523)이었다. 1971년 7월 8일 충남 공주, 누가 묻힌 것인지 분명하게 밝혀진 유일한 한국 고대 임금의 무덤이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역사학과 고고학의 기념비적 사건이었던 백제 무령왕릉 발굴이 8일로 50주년을 맞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실패를 딛고 일어선 이정표’였다. 1971년 7월 8일 발굴된 충남 공주시 금성동 무령왕릉.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밝혀진 유일한 한국 고대왕릉이다. 오른쪽 아래 사진은 당시 발굴..

한국역사 2021.07.08

"미라 냄새다" 고고학자들 탄성···나란히 발견된 임진왜란 두 마님

[중앙일보] 입력 2021.03.27 09:00 수정 2021.03.27 10:52 문화재청은 조선 시대 중기 여성의 복식 문화와 상·장례 풍습을 파악할 수 있는 '오산 구성이씨·여흥이씨 묘 출토복식'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했다고 지난 23일 밝혔다. 사진은 미라 상태로 발견된 여흥 이씨의 가리마(여성용 쓰개의 일종) 실제 착장 모습 [사진 문화재청] 최근 문화재청은 조선 시대 중기 여성의 복식 문화와 상‧장례 풍습을 파악할 수 있는 ‘오산 구성이씨‧여흥이씨 묘 출토복식(총 96건 124점)’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했다. 구성 이씨와 여흥 이씨는 각 무덤의 주인공을 지칭하는데, 2010년 나란히 미라 상태로 발견됐다. 출토 정황상 16세기 임진왜란 전에 살았던 한 사대부의 전처와 후처로 추정된..

한국역사 2021.03.27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길일 받아 합궁하던 곳

[중앙일보] 입력 2020.11.22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30) 궁궐에서는 아랫사람이 웃전을 부를 때 왕을 대전(大殿)이라 하고 왕후를 중궁전(中宮殿)이라 지칭한다. 이는 집을 가리켜서 그 주인을 부르는 말이다. 옛날 궁중에서는 이렇게 집 이름으로 사람을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유는 지체가 높은 웃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비껴 부르는 예의 때문이다. 경복궁의 중궁전은 교태전이다. 조선시대 초기의 교태전은 왕비의 내전(內殿)이라는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의 일상적인 공간으로 융통성 있게 사용한 흔적이 실록기사에 여러 차례 보인다. 단종 2년(1454) 1월 24일 기사에 “왕비 송씨(정순왕후(定順王后))를 효령 대군의 집에서 봉영(奉迎)했는데, 숙의(淑儀) 김씨와 권씨..

한국역사 2020.12.21

왕과 하룻밤 보낸 승은 궁녀, 출세길 활짝

[중앙일보] 입력 2020.12.06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31) 조선시대 정부직제의 직책에 의한 구분을 품계(品階)로 나타냈는데, 품계란 관리의 등급으로 위계(位階) 또는 관계(官階)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에게도 품계에 따른 지위의 구분이 있었다. 왕비는 국왕의 배우자이며 여성 품계를 다스리는 국가 수장이며 만백성의 어머니다. 왕비는 국왕처럼 품계가 없다. 왕비의 공식적인 업무는 후궁 중 빈에 해당하는 정1품부터 상궁, 나인 등 궁내의 모든 여성 품계인 내명부와 종친이나 관리들의 부인이 받는 외명부의 품계까지 관장하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내명부와 외명부 고위관료나 사대부 여인들의 지위인 외명부(外命婦)는 남편의 지위에 따라 그 품계가 정해졌다. [사진 pixabay] 내..

한국역사 2020.12.21

며느리 둘 내쫓고 자식 낳은 첩 세자빈 삼은 세종

[중앙일보] 입력 2020.12.20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32) 왕은 대개 왕세자 시절인 15세 전후에 혼인했다. 세자빈의 나이 또한 왕세자와 비슷한 15세 전후였고, 연상인 경우도 많았다. 왕세자가 성장해 선왕이 승하한 뒤 왕위에 오르면 그 배우자인 세자빈도 왕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택은 왕실 혼례를 치르는 여러 과정 중 하나의 절차다. 국가에서는 왕실의 혼사에 앞서 금혼령을 내리고 결혼 적령기에 있는 팔도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 단자를 올리게 했다. 단자를 올릴 필요가 없는 종실의 딸, 이 씨의 딸, 과부의 딸, 첩의 딸 등은 제외되었다. 그러나 처녀 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25~30명에 불과했다. 간택이 형식상의 절차였을 뿐 실제로는 규수가 내정된 ..

한국역사 2020.12.21

1910년 상주읍성에 주둔한 일본수비대 모습 담긴 사진엽서 10장 발견..사료적 가치높아

입력 2020.12.08. 12:14 수정 2020.12.08. 12:21 윤호필 상주박물관장은 “상주읍성과 관련된 중요한 사진들이 계속 입수되고 있다”며 “이번에 확보한 사진들은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지역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고” 말했다. 사진은 내년 1월부터 상주박물관 홈페이지(www.sangju.go.kr/tour→관광명소→상주박물관)와 이뮤지엄(www.emuseum.go.kr)에서 볼 수 있다. ksg@heraldcorp.com

한국역사 2020.12.08

“이토 히로부미 친필이 문화재? 수치다”…방망이 들고 철거 시위

뉴시스 입력 2020-10-27 14:07수정 2020-10-27 14:11 야구배트 들고 한국은행 앞에서 철거 요구 오천도 "저 비석은 수치의 상징…철거하라" "이따위 글이 문화재…다시 와서 테러할 것" 문화재청, 전문가 3인 자문단 구성해 조사 "묵적 등 볼 때 이토 히로부미 글씨 맞아"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사적 제280호, 현 화폐박물관) 정초석(머릿돌)의 ‘정초(定礎)’ 글씨를 이토 히로부미가 쓴 것으로 확인된 가운데, 일부 보수단체들이 이를 ‘수치의 상칭’이라고 지칭하며 야구배트를 들고 ‘철거 요구 퍼포먼스’에 나섰다. 시민단체 애국국민운동대연합 오천도 대표 등 관계자들은 27일 오후 한국은행 본관 앞에 야구배트를 들고 와 해당 비석을 철거할 것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장 등에게 요구했다. 오..

한국역사 2020.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