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20.11.22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30)
궁궐에서는 아랫사람이 웃전을 부를 때 왕을 대전(大殿)이라 하고 왕후를 중궁전(中宮殿)이라 지칭한다. 이는 집을 가리켜서 그 주인을 부르는 말이다. 옛날 궁중에서는 이렇게 집 이름으로 사람을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유는 지체가 높은 웃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비껴 부르는 예의 때문이다. 경복궁의 중궁전은 교태전이다.
조선시대 초기의 교태전은 왕비의 내전(內殿)이라는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의 일상적인 공간으로 융통성 있게 사용한 흔적이 실록기사에 여러 차례 보인다. 단종 2년(1454) 1월 24일 기사에 “왕비 송씨(정순왕후(定順王后))를 효령 대군의 집에서 봉영(奉迎)했는데, 숙의(淑儀) 김씨와 권씨 두 사람이 함께 효령 대군의 집에 이르러 왕비를 수종(隨從)해 대궐로 들어왔다. 궁에 들어와 동뢰(同牢)를 설치하고 교태전에서 잔치했다”고 적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의 교태전은 왕비의 내전(內殿)이라는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의 일상적인 공간으로 융통성 있게 사용한 흔적이 실록기사에 여러 차례 보이고 있다. [중앙포토]
교태전은 세종 22년(1440) 무렵에 처음 지었다. 경복궁을 지을 때는 없었던 교태전을 세종 때에야 비로소 새로 짓는 데 대한 의논이 실록에 기록되었는데, 이것도 왕비를 위한 공간의 용도가 아닌 왕의 집무공간을 연장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궁궐지의 교태전에 관한 기록으로는 “강녕전 북쪽에 있다. 세조 5년(1460) 경진(庚辰)에 왕이 교태전에서 신숙주(申叔舟)를 불러 북벌의 뜻을 말하니 찬성했다”는 대목이다. 세조는 긴밀한 회합의 경우 교태전으로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고, 백관(百官)이 정조(正朝) 하례를 한 후 교태전에 나아가 잔치를 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리고 교태전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고종 때 현재의 규모로 지어져 비로소 왕비를 위한 중궁전으로 사용되었다. 교태전을 처음 중궁전으로 사용한 주인은 명성황후 민씨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종 10년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복궁 북쪽에 건청궁(乾淸宮)을 짓고 주로 그곳에서 생활했다.
다시 고종 13년(1876) 11월 4일 경복궁에 화재가 일어났다. 이 화재로 내전 영역 830여 간의 건물이 연달아 불길에 휘감겼다. 이 화재로 옛 물건은 하나도 건지지 못했는데 대보(大寶)와 세자의 옥인(玉印) 외에 모든 옥새와 부신(符信)이 전부 불탔다.
당시 불탄 건물은 교태전(交泰殿), 인지당(麟趾堂), 건순각 (健順閣), 자미당(紫薇堂), 덕선당(德善堂), 자경전(慈慶殿), 협경당(協慶堂), 복안당(福安堂), 순희당(純熙堂),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 함원전(含元殿), 흠경각(欽敬閣), 홍월각(虹月閣), 강녕전(康寧殿)이었다. 고종 25년(1888) 4월 12일 교태전을 포함한 경복궁 내전이 다시 중건되었다.
교태전 옛 사진. [사진 국가문화유산포탈]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왕비가 시해당하고 난 뒤 교태전은 주인을 잃었고, 결정적인 수난은 1917년 창덕궁 화재로 내전 영역이 불타자 교태전을 헐어 그 부재로 대조전을 복원하는 데 썼다. 현재 경복궁에 있는 교태전은 1994년에 새 목재로 복원한 것이다. 창덕궁으로 옮겨 지은 교태전은 대조전이 되었다.
교태전이 침전영역으로 구분되어 중궁전으로 사용된 시기는 고종대의 복원 이후로 보인다. 아무튼 교태전이 왕의 집무실 겸 시어소(時御所)로 사용된 시점은 조선 초기로 보고 이번 글에서는 경복궁의 교태전 이야기로 중궁전으로 사용된 왕비의 공간이라는 해석에 집중하려 한다.
경복궁 왕의 침전 강녕전 뒤편으로 어도(御道)가 이어지며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양의문(兩儀門)이 보인다. 양의는 음양의 이치로 생명을 잉태할 왕비의 공간이 시작됨을 의미하는 문 이름이다. 양의문으로 들어서면 왕실의 각종 공식 업무를 주관하는 왕비의 시어소 이자 침전영역인 교태전이다. 경복궁 광화문 안쪽에서 출발한 왕의 어도는 왕비의 전각 교태전 앞에서 멈춘다. 광화문에서부터 상당히 멀리 들어와 경복궁의 한가운데까지 왔는데 교태전은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는 말이 실감 날 만큼 궁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예전의 법도대로라면 왕을 제외한 성인 남성은 혹여 왕비의 친정 형제라 해도 허락을 받지 않고는 양의문으로 함부로 들어 올 수 없는 여성 전용의 내전 영역이었다. 교태전 영역은 오로지 왕비를 위한 공간이고 외부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곳이었다. 궁중에 들어온 왕비의 입장에서 이곳은 왕의 배우자로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시에 몹시 외로운 자리였다.
왕비는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 궁중 생활을 해야만 했다. 침소에서 내다보는 뒤뜰의 동산에 피고 지는 꽃이 왕비의 무료를 달래주는 즐거움이었고, 기껏해야 후원 나들이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무료함을 달래는 방법으로 왕비의 친정 식구가 들어와 말동무를 해주거나 바깥으로 출가한 공주가 있으면 자주 들어오라고 조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교태전 영역은 오로지 왕비를 위한 공간이고 외부로부터 철저히 차단된 곳이었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동시에 몹시 외로운 자리였다. [사진 국가문화유산포털]
교태(交泰)란 천지, 음양이 잘 어우러져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뜻으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해 만물이 생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교태전의 이름은 주역의 64괘 중 양과 음의 화합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태괘(泰卦)에서 유래했다. ☰(건(乾))은 양효(陽爻)이고 ☷(곤(坤))은 음효(陰爻)로써 태괘(地天泰)를 형성한다.
태괘의 형상은 음인 곤(坤)괘가 위에 있고 양인 건(乾)괘가 아래에 있으며 음과 양이 가장 잘 교합할 수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64괘 중 티천태를 가장 길한 괘라고 한다. 이는 음과 양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우주 만물의 모든 이치가 상통한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길일을 받아 왕이 왕비의 처소로 오면 왕과 왕비는 양의 기운이 가득한 동온돌에서 합궁한다. 왕조의 기틀을 마련할 총명하고 건강한 왕자의 탄생을 기원하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교태전 전각 이름에서 읽을 수 있다.
교태전뿐만 아니라 각 궁궐의 중궁전은 모두 같은 의미를 이름으로 표현했다.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은 모두 그 이름에 음양의 조화로 건강한 왕자가 태어나기를 기원하고 있다. 또 교태전의 지붕을 강령전과 같이 무량각으로 처리했는데 조선왕조의 궁궐 건축에서 왕과 왕비의 침전은 무량각 지붕으로 만들어 하늘의 기운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상징적인 장치를 두고 있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더오래]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길일 받아 합궁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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