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며느리 둘 내쫓고 자식 낳은 첩 세자빈 삼은 세종

Shawn Chase 2020. 12. 21. 16:52

[중앙일보] 입력 2020.12.20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32)

왕은 대개 왕세자 시절인 15세 전후에 혼인했다. 세자빈의 나이 또한 왕세자와 비슷한 15세 전후였고, 연상인 경우도 많았다. 왕세자가 성장해 선왕이 승하한 뒤 왕위에 오르면 그 배우자인 세자빈도 왕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택은 왕실 혼례를 치르는 여러 과정 중 하나의 절차다. 국가에서는 왕실의 혼사에 앞서 금혼령을 내리고 결혼 적령기에 있는 팔도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 단자를 올리게 했다. 단자를 올릴 필요가 없는 종실의 딸, 이 씨의 딸, 과부의 딸, 첩의 딸 등은 제외되었다. 그러나 처녀 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25~30명에 불과했다. 간택이 형식상의 절차였을 뿐 실제로는 규수가 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간택에 참여하는 데 큰 부담이 따랐기 때문이다. 간택의 대상이 된 규수는 의복이나 가마를 갖추어야 하는 등 준비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행여 왕실의 외척이 되더라도 정치적으로 자칫 당쟁에 몰려 폐문에 이르는 경우까지 있어 그 부담감으로 이를 기피하는 경향이 컸다.
 

영조는 1704년 진사 서종제의 딸과 첫 혼례를 올렸다. 숙종의 왕자인 연잉군과 혼인한 정성왕후는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다가 영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후가 되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왕실 혼례가 일반 백성의 혼인 적령기보다 조금 빠른 이유는 적령기 백성 자녀가 혼사를 정한 후에 금혼령이 내려지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왕실에서는 이른 연령대에 혼사를 치르고 난 뒤, 당사자들이 어느 정도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가 부부로서 합궁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자빈 혜경궁 홍씨와 세손빈 효의왕후도 혼례를 치른 후 몇 년 지나서야 합방을 하고 실제로 부부가 되었다. 
 

15세의 어린 신부 

영조는 1704년 진사 서종제의 딸과 첫 혼례를 올렸다. 숙종의 왕자인 연잉군과 혼인한 정성왕후는 달성군 부인에 봉해졌다가 영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후가 되었다.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승하하고 영조는 오흥부원군 김한구(金漢耉)의 딸을 계비로 맞아들였다. 정순왕후 김 씨(貞純王后, 1745~1805년)는 영조의 계비다. 이때 왕의 나이 66세 신부는 15살이었다.
 
조선 시대에 여러 가지 이유로 왕이 상처하는 경우 왕은 다시 왕비를 맞이하는 국혼을 치르게 된다. 물론 후궁들이 있더라도 숙종 이후 후궁이 왕후의 위에 오르는 것을 국법으로 금했기 때문에 왕은 새 왕비를 맞아들여야 했다. 그런데 원비 사망 이후 맞이하는 계비의 경우 왕의 나이에 상관없이 15세 전후의 신부를 간택했다. 당시 혼인 적령기를 생각하면 왕의 나이와 비슷한 처녀가 없었다. 이러한 관례 때문에 선조는 51세에 19세의 인목왕후를 맞아들였고, 영조는 66세에 15세 신부를 맞이했다.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 씨도 의 경우도 순종이 33살, 신부는 13살이었다.
 

간택의 조건, 용모와 덕

간택에 참여한 처녀들은 같은 조건으로 후보를 고른다는 취지에서 모두 똑같은 복장을 했다. 초간택 때 복장은 노랑 저고리에 삼회장을 달고 다홍치마를 입었다. 재간택, 삼간택으로 올라갈수록 옷에 치장하는 장식품은 조금씩 늘었다. 삼간택에서 최종적으로 뽑힌 처녀는 비빈(妃嬪)의 대례복을 갖추어 거의 왕비의 위용을 보였다.
 
간택에는 규수의 집안이나 처녀의 용모, 행실이 주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 오늘날처럼 용모나 언어가 간택의 기준이 되었던 사실이 실록에도 기록돼 있어 흥미롭다. 먼저 세종대에 세자빈을 간택하면서 국왕과 신하들이 주고받았던 대화를 살펴보자. 
 

세종은 며느리 간택을 까다롭게 계획을 했음에도 좋은 며느리 고르기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사진은 드라마에서 세종 역을 맡은 배우 한석규. [사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세종은 황희·맹사성·변계량 등과 함께 세자빈 간택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동궁(문종)을 위해 배필을 간택할 때이니 마땅히 인물이 아름다운 처녀를 잘 뽑아야겠다고 했다. 세계(世系)와 부덕(婦德)은 본래부터 중요하나,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또한 안 된다고 했다. 왕은 부모 된 마음에서 친히 간택하고 싶으니 처녀의 집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좋다고 생각되는 자를 미리 뽑아 다시 창덕궁에 모아놓고 뽑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종이 며느리 간택을 이렇게 까다롭게 계획을 했음에도 좋은 며느리 고르기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첫 번째 휘빈 김씨, 두 번째 순빈 봉씨를 맞이했지만 둘 다 내쫓아 버렸다. 문종이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두 명의 세자빈이 폐출되는 불운을 겪었다. 덕이 높은 며느리를 보고자 했던 세종에게도 큰 상심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세종은 새로 세자빈을 간택하지 않고 세 명의 소실 중 유일하게 자식(경혜공주)을 낳은 권씨를 세자빈으로 삼았고 권씨는 이후 단종을 낳았다. 그러나 권 씨는 단종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으며, 훗날 현덕왕후(顯德王后)로 추존되었다. 이후 문종은 더는 세자빈을 두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간택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것이다. 
 

왕비 수업은 별궁에서 

삼간택에서 선발되는 것은 왕비로서 대우를 받는 시작이었다. 『한중록』에도 “(재간택 이후) 그날부터 부모께서 나에게 말씀을 고쳐 존대하시고 일가 어르신네들도 공경하여 대하시므로 내 마음이 불안하고 슬픔은 형용할 수 없었다”고 심정을 말하고 있다.
 
왕비로 최종 간택을 받은 규수는 별궁으로 모셔졌다. 별궁은 왕비 수업을 미리 교육하고 국왕이 신부의 집에 직접 가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만든 제도적 장치였다. 왕비가 될 규수가 왕실의 법도를 익히는 첫 장소가 바로 별궁이었다. 이 제도는 삼간택에서 뽑힌 예비 왕비를 이곳에 미리 모셔놓고 왕비가 된 후에 지켜야 할 궁중 법도를 익히게 하는 한편, 가례 의식에 거행되는 순서와 행사를 준비하는 장소로 만들어졌다. 또한 이곳에서 왕비를 모셔오는 친영 의식을 치름으로써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살리고 사가에서 국왕을 맞이하는 데 따르는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별궁은 대궐과 사가 중간 위치에 놓여 있다. 왕이나 왕세자가 와서 초례(醮禮)를 치러야 하는데 사가에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별궁에서의 왕비 수업은 연륜 있는 상궁의 지도하에 엄격하게 이루어졌는데 왕후의 지위에 맞게 갖추어야 할 교양, 예절, 품위 등을 체계적으로 교육했다. 걸음걸이나 동작, 태도 등의 궁중 예절이나 『소학』 등의 유교 교양서들을 단기간에 학습할 것도 요구되었다. 궁중 예법은 그 절차가 특히나 까다로워 혹독한 별궁생활을 통해 왕비의 길에 들어섰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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