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8] 20세기 세번의 전쟁 참전백전노장 전함 미주리호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1.08.24 03:00
하와이의 진주만 해상에는 애리조나호 기념관(USS Arizona Memorial)과 박물관 선박 미주리호(USS Missouri·BB-63)가 마주 보고 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 공격 당시 이곳에 정박해 있던 애리조나호는 일본 함재기의 공습을 받아 침몰했고, 약 1100명의 선원이 사망했다. 미국 당국은 이 배를 인양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바다 위에 추모 기념관을 지었다. 한편, 전함 미주리호는 제2차 세계대전 말에 건조되어 곧바로 일본과의 전쟁에 투입되었다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을 치르는 장소로 사용됐다. 그 후 이 배를 옮겨와서 애리조나호 기념관 앞에 배치했다. 한 척은 태평양전쟁의 비극적 시작을 알리는 기념물이고, 다른 한 척은 승리로 전쟁을 마친 사실을 증언하는 기념물이다.
6·25전쟁 발발 뒤 미주리호는 1950년 8월 19일, 미국 전함으로는 처음 한반도에 도착해 곧장 작전에 투입됐다. 9월 15일엔 인천상륙작전을 돕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삼척 지역을 포격했고, 이어 흥남철수 작전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진은 흥남철수작전 당시 철수 선박에 탄 피란민들의 모습. 미주리호는 12월 24일 마지막 철수하는 배가 떠날 때까지 해상에서 거대 함포로 배후 지역을 포격하며 중공군 접근을 막아냈다. /거제시청
미주리호는 길이 270m, 기준 배수량 4만5000t의 거구에 구경 40㎝의 주포(主砲) 9문과 고각포(高角砲) 20문 그리고 많은 기관총을 장착한 아이오와급 전함이다. 장차 미국이 일본과 전투를 치를 때를 대비하여 1930년대부터 준비한 대함거포주의(大艦巨砲主義) 시대 전함의 마지막 사례라 할 수 있다. 1941년 건조 작업에 들어가 1944년 1월 29일에 진수했는데, 이때 미주리주 상원 의원이었던 해리 트루먼이 기념 연설을 하고, 그의 딸 마거릿 트루먼이 명명식에 참석했다. 곧바로 태평양전쟁에 투입되어 이오지마 전투, 오키나와 전투 그리고 혼슈와 홋카이도 공습 작전에 참여했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항공기가 폭격하는 동안 적군의 해상 혹은 공중 공격을 방어하는 역할이 주 임무였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던 날, 미주리호는 일본 북부 지역을 공격하고 있었다. 얼마 후인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이 나왔고, 항복문서 조인식을 이 배의 선상에서 거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선원들은 청소와 페인팅을 새로 하며 조인식 준비를 했다.
미주리호는 8월 27일 도쿄 만에 진입하여 8월 29일에 정박했다. 92년 전인 1853년 페리 제독(Commodore Matthew Perry)이 ‘흑선(黑船)’을 타고 와서 일본의 개항을 강요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미군 당국은 페리 제독이 사용했던 성조기를 급히 공수해 와서 조인식 장소 배후에 걸어서 역사의 무게를 강하게 각인시키고자 했다. 원래 일정은 8월 31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 9월 2일로 연기했다. 이날 아침 8시, 니미츠 제독과 맥아더 총사령관이 배에 올랐고, 연합국 참전국인 중국⋅소련⋅오스트레일리아⋅네덜란드⋅프랑스⋅뉴질랜드 대표들이 뒤따랐다. 일본 대표단을 이끈 사람은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였다. 다리를 저는 시게미쓰가 철제 계단을 올라가는 데 힘들어했기 때문에 약간 지체되었다. 그가 다리를 저는 이유는, 1932년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전승 기념 및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을 할 때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한쪽 다리가 잘려서 10㎏에 달하는 의족과 지팡이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 정박한 미주리호 함상에서, 미 육군 리처드 서덜랜드(왼쪽 군인) 중장과 미군 장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오른쪽 정장 입은 사람)가 일본 정부를 대신해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맥아더 장군이 “피와 살육으로 얼룩진 과거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존엄, 자유·관용·정의가 실현되는 세계”가 찾아오기를 염원한다는 연설을 마치고, 연합군 측과 일본 측이 한 부씩 보관하도록 2부의 항복문서에 각국 대표들이 차례로 서명했다. 일본 측 보관용 문서에 서명할 때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 캐나다 대표 코스그레이브(Lawrence Vincent Moore Cosgrave)가 원래 서명해야 할 칸보다 한 줄 아래 서명한 것이다. 미국의 서덜랜드 장군이 상황을 파악하고는 코스그레이브가 서명한 칸의 ‘프랑스 공화국’에 줄을 그어 지우고 대신 ‘캐나다 자치령’이라 썼다. 이하 각국 대표는 다른 나라 이름을 지우고 자기 나라 이름을 쓴 다음 서명했고, 마지막에 서명한 뉴질랜드 대표는 빈칸에 자기 나라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써야 했다. 코스그레이브는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한쪽 눈을 실명해서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미국이 보관하는 문서에는 똑바로 서명을 했다).
전쟁이 끝나자 2차대전 당시 사용한 함정들이 필요 없게 되었다. 일부는 매각하거나 고철로 팔았고, 일부는 퇴역시킨 다음 예비 함정으로 계류했다. 그런데 트루먼 대통령은 미주리호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퇴역을 막고 계속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그 때문에 이 배는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대서양에 배치되어 있던 미주리호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1950년 8월 19일, 미국 전함으로는 처음 한반도에 도착한 이 배는 곧장 작전에 투입되었다. 9월 15일, 미주리호는 삼척 지역을 포격하였는데, 이는 반대편 지역에서 수행하던 인천상륙작전을 돕기 위해 적의 군사력을 다른 쪽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이후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 적군에 포격을 가하거나 항공모함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이해 10월, 38만명의 중국 인민해방군이 한반도로 물밀듯이 쳐들어와서 전황이 바뀌었고, 유엔군이 급히 후퇴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미주리호는 흥남 철수작전에서 결정적 공헌을 했다. 12월 24일 마지막 배가 떠날 때까지 해상에서 거대한 함포로 배후 지역에 계속 포격을 가하여 중공군의 접근을 막았기에 피해를 최소화하며 군인과 피란민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그 후 1952년까지 한국전에서 활약하다가 다른 전함과 임무를 교대한 후 본국으로 귀환했고, 1955년 퇴역했다.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 장소라는 이유 때문에 매년 25만 관광객을 맞이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이 배의 운명은 이렇게 끝이 나는 걸까?
1945년 9월 2일 일본 도쿄만에서 역사적인 일본 항복 문서 조인식이 열렸던 미국 전함 미주리호. 이후 6·25전쟁 참전 뒤 1955년 퇴역했다가 현대식 무기와 장비로 개수돼 1986년 재취역했고, 1990년대 초 걸프전에서도 전공을 세운 베테랑 전함이다. 지금은 하와이 진주만에 박물관 선박이 됐다. /Mike/Flickr
놀랍게도 이 배는 30년 후 다시 전쟁에 참전한다. 레이건 행정부는 전함 600척을 증강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아직 건재한 미주리호를 그냥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1984년 이 배에 장착되어 있던 구식 무기들을 해체하고 하푼 미사일,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 그리고 레이더와 전자전 장비까지 탑재하는 보수 작업을 마친 후 1986년 5월 10일 재취역했다. 당시 중동 지역 정세가 불안했기에 미주리호는 페르시아만이나 인도양에서 유조선 보호 같은 임무를 소화했다. 그러던 중 1990년 8월 2일 걸프전이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이해 11월 미주리호는 페르시아만으로 향했고,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에 투입되었다. 먼 해상에 위치한 거대한 선체에서 내륙을 향해 가공할 위력의 포탄을 날려 보내는 공격은 여전히 효과적이었다. 미주리호는 이 기간 토마호크 미사일 28발을 쐈고, 이라크의 해안 방어 시설을 포격했다. 한때 이 배는 장렬하게 침몰할 위기도 겪었다. 이라크군이 발사한 중국산 실크웜 미사일 한 발이 미주리호로 날아왔다. 근처에 있던 영국 구축함이 시다트(Sea Dart) 대공미사일을 발사하여 640m 전방에서 적 미사일을 터뜨린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그리고 걸프전 등 세 번에 걸친 전쟁을 겪은 미주리호는 사람으로 치면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퇴역한 후 지금은 진주만에서 박물관 선박으로 노후를 보내는 중이다. 이 배는 파란만장한 20세기 세계사를 증언하는 놀라운 기념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미카제>
미주리호가 오키나와 전투에 돌입하고 열흘이 지난 1945년 4월 11일, 일본군의 제로 전투기 15대가 이 배를 향해 돌진해 왔다. 정오경 레이다로 적기 접근을 확인한 후 곧바로 방공포를 발사하여 대부분 격추시켰으나, 한 대가 끝까지 남아 접근해 왔다. 적기는 해상에서 수직 이륙한 후 선박의 중심부에 충돌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비행기 날개가 선체와 충돌했고, 파괴된 비행기의 잔해가 갑판에 쏟아졌다. 비행기에 실은 500파운드 폭탄이 터지지 않아 큰 피해를 보지 않고 갑판 일부만 손상을 입었다. 비행사의 하체는 어디론가 날아갔고 찢긴 상체만 남아 있었다. 선원들이 사체를 바다로 던져버리려 하자 선장 캘러헌(William M. Callaghan)이 만류했다. 적이지만 “용기와 헌신의 자세로 자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전사”에 대해 예우를 갖추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선원은 여전히 반발했으나, 선장의 지시에 따라 의사가 시신을 수습하고 급히 만든 일장기에 감싼 후 선원들의 경례와 예포 가운데 수장(水葬) 의식을 치렀다. 후일 이 비행사는 이시노 세추오(石野節雄)로 밝혀졌다. 당시 그의 나이 19세, 미주리호 선상에 전시한 사진 속 젊은 군인은 한없이 순박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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