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01.09 03:00
영화 '히말라야'로 재조명 '산악인 첫 의사자' 故 백준호씨
셰르파 2명, 포기하자…
"선배, 내가 가야할것같아"
11시간 밤새 등반해 도착 "구조 어렵다" 마지막 무전
아직 돌아오지 못한 그
2005년 엄홍길 원정대가 박무택 시신만 수습 성공
백준호·장민은 못찾아
2004년 5월 18일 오후 7시쯤 37세 한국 산악인이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해발 8750m)에 동료 둘이 탈진해 있다는 무전을 듣고 450m 아래 캠프에서 이들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캠프에 같이 있던 동료가 "혼자는 무리다"며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무려 11시간 동안 꼬박 밤을 새워 등반한 그는 결국 동료 중 한 명을 발견했으나 동료는 이미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였다. 이 산악인은 "구조가 어렵다"는 마지막 말을 무전으로 남기고 동료와 함께 산에 잠들고 말았다.
고(故) 백준호씨는 산을 오를 때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후배들의 상태를 점검하는 ‘대장’ 기질을 발휘했다고 한다. 2004년 에베레스트 등반 당시의 모습. / 대한산악연맹 제공
2005년 산악인 최초 의사자(義死者)로 지정된 고(故) 백준호(1967~2004)씨 이야기다. 지난달 개봉해 누적 관객 수 650만명을 넘긴 영화 '히말라야'에서 백씨의 헌신이 뒤늦게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백씨의 고향인 대구와 경북 언론들은 백씨 특집 기획을 내보낼 정도다. 영화에서는 배우 김인권이 백준호 대신 '박정복'이란 이름으로 연기했다.
고교 때부터 등산을 한 백준호씨는 2004년 당시 22년차 베테랑 산악인으로 모교인 계명대 산악회의 에베레스트 등반에 함께했다. 한 학번 후배인 고 박무택(1969~2004)씨가 이끄는 '1차 공격대'가 18일 오전 정상에 오르면 그 다음 날 '2차 공격대'로 에베레스트에 등정할 예정이었다. 박씨는 18일 오전 10시에 정상을 밟고 하산하던 길에 조난당했다.
"선배, 내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백씨는 이날 오후 2시 넘어 해발 8300m에 있는 정상 직전 휴식처 캠프 5에 도착했다. 백씨의 몸 상태는 좋았다. 날씨도 쾌청했다. 백씨는 이곳에서 대구 대건고 산악부 시절 지도교사였던 서정수(65)씨에게 위성 전화를 걸었다. 고교 때부터 산을 타기 시작한 백씨에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서씨는 "그때 준호가 '선생님, 럼주(네팔의 전통 곡주) 세 박스 집으로 보냈는데 잘 받았습니꺼'라고 농담하기에 웃으면서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오후 3시쯤 박씨가 백씨에게 무전을 했다. 정상에서 불과 100m 내려왔는데 탈진했다는 것이었다. 먼저 탈진한 동료 장민(1975~2004)씨를 챙기다가 지친 것이다. 설맹(雪盲·눈에 반사된 빛에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는 것) 증상도 왔다고 했다. 그냥 두면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캠프에 있던 셰르파 2명이 먼저 구조대로 출발했다가 곧 포기하고 돌아왔다. 당시 같은 2차 공격 대원으로 함께 있던 여성 산악인 오은선(50)씨는 "10분 정도 침묵이 흐른 뒤 준호씨가 '선배, 아무래도 내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고 나직이 말했다"고 기억했다. 오씨는 백씨에게 자신의 산소마스크와 레귤레이터(regulator·산소량을 조절하는 장치)를 줬다.
해발 8000m가 넘으면 산소량이 지표면 3분의 1에 불과하다. 한두 걸음을 걸으면 5분, 10분씩 "허, 허"하고 대기를 빨아들이듯 숨 쉬어야 한다. 컨디션이 좋았던 백씨였지만 자신이 꼭대기에 오르는 것과 꼭대기 근처의 다른 누군가를 구조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달랐다. 백씨의 체중은 65㎏ 정도였던 반면 박씨는 80㎏에 가까웠다. 8000m 이상 봉우리 16좌를 세계 최초로 등반한 산악인이자 영화 '히말라야' 주인공인 엄홍길 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는 "그 정도 높이에서는 누군가 10㎏짜리 황금 덩어리를 주고 가져가라 해도 살기 위해 버려야 한다"며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상황에서 홀로 사람을 구조한다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오은선씨는 "당시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몇 시간 가다 돌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백씨는 그러나 돌아오지 않았다. 오후 7시에 텐트를 나가 11시간을 걸었다. 직벽(直壁)이라 가장 난관으로 꼽히는 '세컨드 스텝' 구간도 통과했다. 다음 날 오전 6시쯤 백씨는 마지막 숨을 들이쉬고 있는 박씨를 발견했다. 2005년 엄홍길씨가 백씨를 비롯한 3명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떠난 원정대는 박무택씨의 시신만 발견해 수습하고 백준호씨와 장민씨는 찾지 못했다.
백준호씨는 산악인들 사이에서 '백곰'으로 불렸다. '미련 곰탱이 같이 사람 좋은 백준호'란 뜻이다. 대건고 산악부와 계명대 산악회 주장을 차례로 맡으며 후배들에게 따르고 싶은 선배로 꼽혔다. 대건고 후배인 최진철(44)씨는 "2003년 히말라야 로체(8516m)를 같이 오를 때 위험한 아이스폴(ice fall·빙하 사이사이가 갈라진 낭떠러지 지대) 구간을 10시간이나 걸려 왕복하며 식량과 장비를 옮겼다"며 "이때 준호형이 나를 걱정한 나머지 자신은 이미 갔다 오고도 나를 데리고 또 한 번 왕복했다"고 말했다. 백씨는 대학 졸업 후 ROTC 장교로 임관했고 이후 제약회사에 8년 다니다가 2000년 초오유(8201m)를 등정하려고 사표를 냈다. 이후 아들의 안전을 걱정한 부모님이 "산과 멀어지라"며 대구 시내에 숯불갈비집을 차려줬다. 그는 이곳을 산악인 선후배들이 자주 회식을 갖는 아지트로 만들었다.
영화 ‘히말라야’에서 백준호씨를 연기한 배우 김인권이 눈보라를
헤치며 산을 오르는 모습. / CJ E&M 제공
백씨의 스승 서정수씨는 1983년 대건고 산악부가 대구 팔공산으로 신입생 환영 등반을 갔던 때가 기억난다고 했다. 당시 1학년 신입 부원이었던 백준호씨는 서씨에게 "남자다워지기 위해 산을 오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산악부 월례 등반 때 한 번은 요깃거리가 마땅치 않자 백씨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동네 수퍼마켓에서 유통기한이 며칠 지난 꽁치 통조림을 너댓 개 싸들고 오기도 했다. 부원들이 "상한 걸 어떻게 먹느냐"고 하자 "조금 지난 걸 가지고 뭘 그래. 맛있다"며 능청을 부려 결국 같이 맛있게 먹었다고도 했다.
고교 산악부 다른 후배 이봉열(48)씨는 "장교 출신인 만큼 생활에 절도가 있고 규칙적이어서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도 다음 날 아침 일찍 조깅이나 암벽 등반으로 해장을 했다"고 기억했다. 근력과 체력 하나만은 누구에도 뒤지지 않아 암벽 등반장에서 2~3시간은 너끈히 암벽에 붙어 있었다. 서정수씨는 "준호가 에베레스트에 가기 두 달 전 대건고 체육관 내에 암벽 등반장을 신설했는데, 준호를 불러 오버행(overhang·암벽 위쪽이 튀어나온 것)이 있는 난코스를 시범으로 타게 한 다음 그 코스를 '백준호 길'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건중·고등학교 총동창회는 백씨의 의로운 죽음이 교훈인 '언제나 어디서나 양심과 정의와 사랑에 살자'를 실천한 것으로 보고 올가을 백씨의 흉상을 제작해 학교의 주
보(主保·교육의 목표 인물)인 성인(聖人) 김대건 신부 동상 옆에 세울 예정이다.
백씨가 대건고 산악부 주장 시절 직접 작사한 산악부 산가(山歌)는 이렇게 부른다. "능선 따라 올라간다 올라가/ 계곡 따라 내려간다 내려가/…/ 하루의 살림살이 어깨에 메고 멋대로 산행하며 살아가지만/ 빙벽과 암벽에는 청춘을 건다/ 산악의 선봉이다/ 대건고등산악부다 야!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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