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경영

가장 먼저 위기를 눈치챘고, 가장 먼저 기회로 바꿨다

Shawn Chase 2020. 10. 27. 14:09

 

[이건희 위기 경영]

석남준 기자

입력 2020.10.26 19:10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난다고 하니까 우리가 서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1996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사장단회의를 주재하며 이같이 질책했다. 삼성은 1994년 국내 최초로 경상이익 1조원을 돌파했고, 1995년에는 그 규모가 3조5400억원으로 뛰었다. 세계 경제와 함께 삼성 역시 호황이었지만, 이 회장은 이럴 때 사장들에게 위기를 절감하도록 주문한 것이다.

반도체 공장 방문한 이건희 회장

‘이건희 경영’의 핵심 키워드로 혁신⋅속도⋅인재 등이 꼽힌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표적인 키워드로 ‘위기’를 꼽는 재계·학계 인사가 적지 않다. 이 회장이 경영의 고비마다 최고의 카드로 꼽은 게 위기였기 때문이다. 재계에선 이건희의 위기 경영이 전대미문의 위기로 꼽히는 코로나 사태에 우리 기업들에 던지는 시사점이 크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건희는 위기 신봉자였다"

지금의 글로벌 삼성을 있게 한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꼽히는 1993년 신경영 선언도 출발은 위기 경영이었다. 이 회장은 경영진이 생산량과 판매량에 집중하자 “우리는 자만심에 눈이 가려 위기를 진정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대로 가다간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등허리에 식은땀이 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을 오래 보좌했던 한 경영자는 “(이 회장은) 끊임없이 위기를 공유하는 게 경영의 핵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며 “위기감을 갖고 있는 조직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위기 신봉자 같았다”고 했다.

이 회장이 일찌감치 위기를 절감토록 하면서 삼성은 IMF 외환 위기에 앞선 1996년 비상 경영에 돌입했다. 삼성 관계자는 “당시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차세대 유망 사업에 경영력을 집중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재구축했다”며 “경영 전(全) 분야에 걸쳐 원가와 경비를 절감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삼성은 어떤 국내 기업보다 외환 위기를 큰 타격 없이 극복했다. 삼성은 2002년 무역수지 흑자 145억달러를 달성했다. 당시 한국 전체 무역 흑자(108억달러)를 넘어선 것이다.

 

◇쓰러질 때까지 위기 강조했다

이 회장의 위기 경영은 삼성 조직에 체화됐다. 삼성 출신 한 인사는 “삼성 내에서 ‘올해 흑자를 냈다’의 미래형은 ‘허리띠를 졸라맨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5일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1997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일본 전자 소그룹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이 회장은 단순히 위기만 강조한 게 아니었다. 위기 절감은 곧 속도⋅혁신으로 이어졌다. 애플이 2007년 아이폰을 공개하면서 삼성을 비롯한 기존 휴대전화 생산 회사들은 절벽에 몰렸다. 결국 노키아 등 메이저 업체들이 무너졌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여긴 삼성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고 갤럭시 시리즈를 통해 시장 지배력을 키웠다. 글로벌 금융 위기 속에서도 성장을 거듭한 삼성은 결국 2011년부터 스마트폰 세계 점유율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이 회장은 쓰러질 때까지 위기 경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2010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가전전시회(CES)에 참석한 이 회장은 “삼성도 까딱 잘못하면 10년 전 구멍가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며 “턱도 없다. 아직 멀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쓰러지기 7개월 전인 2013년 10월 열린 신경영 20주년 만찬회에서도 “자만하지 말고 위기 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이 회장은 우리 기업인들에게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DNA와 함께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DNA도 심어줬다”며 “코로나 위기 속에서 이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금 그의 위기 경영을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 별세

 

“삼성 덕에 한국인이라 말해” 2030, 이건희를 다시보다

이건희가 남긴 유산

신은진 기자

김강한 기자

안영 기자

입력 2020.10.27 00:07

 

 

이건희 회장

“우리나라 경제 모든 분야에서 1등 정신을 아주 강하게 심어주신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6일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빈소를 찾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이같이 말했다. 한때 삼성과 자동차 산업을 놓고 사활을 걸고 싸웠던 국내 2위 그룹을 이끌고 있는 후배 기업인이 ‘1등 DNA를 심어줘서 감사하다'는 추모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해외 시장 등에서 조롱거리였던 현대·기아차 역시 코로나 사태라는 위기 속에서도 글로벌 자동차 업계 1위(2분기 영업이익 기준)를 기록하며 선전 중이다.

25일 타계한 이 회장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이건희 1등 정신은 삼성그룹뿐 아니라 우리 산업과 사회 전반에 자긍심을 불어넣고, 동시에 자극제가 됐다”며 추모하는 ‘이건희 신드롬’이 일고 있다. 한때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상속재산 문제를 둘러싸고 껄끄러운 관계였던 신세계그룹도 “고인은 우리나라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2004년 반도체 30년 기념식에서 보드에 '새로운 신화 창조'라고 서명하는 이건희 회장./삼성전자 제공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이 회장이 남기고 간 ‘1등 정신’이라는 유산을 되새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그동안 고 이 회장에 대해서는 그룹 지배 구조, 비자금·노사 문제 등으로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의 별세를 계기로 한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그의 공을 더 높게 평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조동근 명지대 명예교수는 “최근 코로나 사태 등 경제 위기 상황과 말[言]의 향연만 벌어지고 있는 정치판에 대한 피로감 등으로 기업인과 일반 시민 모두 ‘우리도 세계 1등을 할 수 있다’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실천한 이 회장의 리더십을 재조명하는 추모 분위기가 커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우리가 삼성(이건희 회장)을 저평가하지 않았나 되새겨 볼 일이다.”

“한국도 1등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만들어준 삼성, 지금 한국의 위상은 삼성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건희 추모 멘트

온라인상에서도 고(故) 이건희 회장에 대한 추모 열기는 뜨겁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살아있을 때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경영 능력이 재조명받는 ‘이건희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의 별세 사실이 알려진 25일 오전 10시부터 이날 오후 4시까지 네이버·다음 등 포털 사이트를 통해 서비스된 기사들에 달린 댓글은 약 18만개에 달했다. 한 사건에 대해 10만개 이상의 댓글이 달리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특히 그동안 온라인 댓글 특성상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이틀간 달린 댓글의 80~90%가 긍정적인 내용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을 둘러싼 각종 수사, 압수수색, 재판 관련 뉴스만 접하며 자라온 청년들이 지난 이틀간 고 이 회장의 업적을 다룬 기사들을 보며 젊은 시절 그의 기업가 정신에 열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젊은 대학생들은 그를 ‘현대판 이순신’에 비유하며 구국의 영웅으로 칭하고 있다. 서울대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는 "이 회장의 세계적 영향력은 세종대왕보다 낫다. 한글이나 금속활자를 칭송해 봤자 한국 안에서의 일인데, 세계 기술 발전에 영향을 미친 반도체 사업을 일으킨 것이야말로 위인으로 칭송받을 일”이라고 썼다. 고려대 커뮤니티 고파스에도 “이 회장은 국민장(葬)해줘야 한다. 우리나라 GDP(국내총생산) 수십조(원)를 끌어올린 사람”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학생들은 “기업가를 존중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4차 산업 시대에 희망이 있다”고 추모했다.

대구 삼성상회 옛터에서 추모식 - 26일 오후 대구 인교동(현 성내3동) 삼성상회 옛터에서 열린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추모식에 참석한 시민들이 헌화와 분향을 하고 있다. 주민들은 거리 곳곳에 추모 현수막을 걸어 고인을 기렸다.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자본금 3만원을 갖고 시작한 무역회사다. 이건희 회장은 이곳에서 200여m 떨어진 이병철 회장의 고택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동환 기자

시민과 네티즌들은 이 회장이 만든 ‘1등 기업 삼성’ 덕분에 세계에 나가 당당히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됐다는 이야기를 썼다. 특히 많은 시민이 “기업은 2류, 정치는 4류”라는 이 회장의 어록을 거론하며 “2류는 1류가 되기도 하는데, 4류는 5류, 10류로 떨어지고 있다"고 이 회장의 리더십을 재조명했다. 한 네티즌은 “해외에 나가 보면 태극기보다 더 긍지를 갖게 하는 것이 삼성의 로고며 광고였다. 자랑스러운 기업을 일구는 일, 국민을 먹여 살리는 기업을 지원하는 일, 이런 게 바로 나라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내 각 계열사 소속 직원들도 사내 온라인망에 마련된 온라인 추모관에서 2만개(오후 3시 30분 기준)가 넘는 댓글을 달았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이끌었을 때 한국 경제가 도약하고 성장하던 시기였고, 한국 경제성장에 삼성전자와 반도체 사업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며 “지금도 그런 기업과 산업이 나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에 추모 열기가 더욱 확산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재계, 정·관계 인사들은 한목소리로 고 이 회장이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결과 한국도 미국·일본·독일 등 세계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그의 공을 평가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은 추도사에서 “이건희 회장이 걸었던 길은 불굴의 개척 정신으로 초일류 기업을 넘어 초일류 국가를 향한 쉼없는 여정이었다”면서 “우리 후배들은 회장님의 그 큰 뜻을 소중히 이어받아 일등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했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도 조문을 마친 뒤 “미래를 내다보는 높은 식견을 가지고 과감한 도전 정신으로 삼성을 세계 일류 기업으로 발전시켰다”며 “이것은 또한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였다”고 말했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기자 시절 고 이 회장을 만난 일화를 언급하며, “당시 이 회장은 ‘난 지금 반도체에 미쳐있다’고 말했다. 오늘의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반도체 사랑이 만든 결과”라고 말했다.

 

 

깨알같은 탁구감독 노트에 반한 이건희 “삼성 스포츠단장 하시오”

삼성맨들이 기억하는 이건희

이성훈 기자

입력 2020.10.26 22:49

 

 

이건희 회장 별세 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삼성맨’들이 이 회장과 관련된 일화를 불러내고 있다.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현재 활동하는 기업인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라고 했다.

박성인 전 삼성스포츠단 단장

‘프랑크푸르트 선언’ 직후인 1993년 10월부터 3년간 회장 비서실장을 지낸 현명관(79) 전 삼성물산 회장은 26일 본지 통화에서 “경영자로서 이 회장은 업(業)의 본질에 천착한 인물”이라며 서울 서초 ‘리버사이드 호텔’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공직에 있다가 삼성으로 간 현 전 회장은 1981년 신라호텔 관리본부장 때 이 회장의 전화를 처음 받았다. 매물로 나온 리버사이드 호텔을 인수하라는 지시였다. 현 전 회장은 “특급호텔인 신라호텔이 일본 관광객이 드나들던 호텔을 인수한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했고, 결국 인수는 없던 일이 됐다. 하지만 이 회장은 “호텔업의 본질은 서비스보다는 부동산업인데, 팽창하는 서울 강남 지역 호텔을 놓쳤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현 전 회장은 “작은 일에도 업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한 것”이라고 했다.

1987년 이건희 회장 취임 직후부터 비서실에서 근무했던 이금룡 코글로닷컴 대표는 본지에 “취임 후 첫 지시가 ‘업의 개념을 정립하라’는 것이었다” “이 회장의 말에는 실행이 뒤따랐다”고 했다. 이 회장은 반도체의 본질도 기술보다는 속도라고 봤다. 그런데 개발 시간이 늘어난 이유가 구매 과정에 있다고 봤다. 1990년대 초 이 회장은 삼성 반도체 공장 강당에 구매 관련 부서를 불러 모았다. 부서를 돌아다니며 도장 받는 시간도 아끼라는 메시지를 그렇게 전한 것이다. 이 대표는 “이후 구매뿐 아니라 다른 의사 결정 과정도 빨라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했다.

 

이 회장은 디테일을 중시했다. 1980년대 말 삼성 비서실에는 당시 제일모직 탁구단 박성인 감독의 훈련 일지가 회람됐다. 이 회장의 특별 지시였다. 그 노트에는 탁구대 모서리를 밀리미터 단위로 나눠 공이 떨어졌을 때의 스핀양과 방향을 분석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회장은 이 노트를 크게 칭찬하고, 박 감독에게 삼성스포츠단 전체 운영을 맡겼다.

이 회장을 일부에선 ‘은둔의 경영자’로 부르지만, 누구보다 외부인과의 소통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현 회장은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은 학계·문화계·관계(官界)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외부인과 식사했다”며 “각 방면 최고의 인재로부터 이야기 듣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