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경영

반도체·TV·스마트폰… “한국도 1등할 수 있다” 일류 DNA 심어

Shawn Chase 2020. 10. 27. 15:04

 

[이건희 회장 별세] 이건희 삼성 회장 (1942~2020)

성호철 기자

입력 2020.10.26 03:00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93년 6월 이른바 ‘8인치(200mm) 도박’을 했다. 당시 세계 반도체 시장은 주로 6인치 웨이퍼(반도체 원판)를 이용했다. 8인치를 쓰면 생산량은 많지만, 공정이 복잡하다. 기술이 일본 반도체 업체들보다 한 수 아래였던 삼성으로선 실패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이 회장은 8인치 공정을 시작했다. 일본 반도체에 대한 물량전을 거는 선전포고였다. 이 한 수(手)로 이 회장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 판을 뒤집었다. 일본 반도체 CEO들이 주판알만 튀길 때 과감한 결단으로 승기를 잡은 것이다. 한때 1~5위를 휩쓸던 NEC, 히타치, 도시바 등 일본 D램 제조사들은 거의 소멸했고,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약 40%의 점유율로 압도적인 1등을 지키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12월 1일 회장에 취임해 2014년 5월 10일 심근경색으로 쓰러질 때까지 9658일 동안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그가 취임할 때 삼성그룹은 매출 9조9000억원, 영업이익 2000억원을 내는 동아시아 변방(邊方)의 기업에 불과했다. 2018년 삼성 매출은 39배인 386조6000억원, 영업이익은 359배인 71조8000억원으로 늘었다. 30여년 전 1조원이던 삼성그룹 시가총액은 396조원으로 불었다. 이 회장이 메모리 반도체와 스마트폰, TV 등 20개 첨단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브라운관 TV 버리고 휴대전화 불태워

삼성은 2006년 일본 소니를 꺾고 TV 1위에 올랐다. 그 전까지 한국 브랜드가 일제(日製)를 누르고 세계 1위를 한다는 건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TV는 반도체 같은 부품과는 또 다르다. TV는 브랜드 파워, 마케팅, 디자인 등이 맞아떨어져야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그만큼 후발 주자가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불량제품은 암” 애니콜 화형식 -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 사업장에서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직원들이 불량 휴대폰·팩스·전화기 등을 태우고 있다. 이날 화형식 이후 삼성전자의 불량률은 크게 감소했다. 이 회장은“삼성에서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불량은 암이다”고 질타했다. /삼성전자

이 회장은 이보다 3년 앞선 2003년 전체 판매량의 27%를 차지했던 브라운관 TV 생산을 중단시켰다. 대신 LCD 등 이른바 ‘평면 TV’에 집중했다. 미래 TV를 둘러싼 ‘게임의 법칙’이 바뀌는 시점에 맞춰, 아날로그를 버리고 디지털만 선택한 것이다. 삼성은 TV 시장에서 지금까지 14년 동안 1위를 기록하고 있다.

1995년 있었던 ‘애니콜 화형식’은 세계 최고를 이루겠다는 이건희 회장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1988년 휴대전화 시장에 진출한 삼성은 미국의 모토로라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실정이었다. 불량률이 한때 11.8%까지 치솟자, 이 회장은 1995년 3월 9일 경북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휴대전화 15만대(500억원어치)를 모아놓고 불태우도록 지시했다. 그는 당시 “휴대전화 품질에 신경을 쓰자”며 “무선 단말기를 한 명당 한 대 가지는 시대가 반드시 온다”고 했다.

 

이는 전 세계에 한 해 3억대 안팎의 스마트폰을 팔고, 폴더블(접히는)폰 등으로 스마트폰 혁신을 주도하는 지금의 삼성 스마트폰을 낳은 사건으로 기록됐다. 삼성은 2011년부터 지금까지 스마트폰 1위를 지키고 있다.

고(故) 이건희 회장이 이끈 삼성그룹

◇"경영 철학은 기회 선점 전략"

삼성의 위상 변화는 매출 규모를 국내총생산(GDP)과 비교하면 명확하다. 1987년 한국 GDP 대비 삼성 매출의 비율은 8% 수준이었지만, 2018년엔 20%다. 현재 삼성 매출은 덴마크 GDP와 맞먹을 정도다. 삼성이란 한 기업이 판 물건값의 합이 한 국가가 창출하는 부가가치의 합과 비슷하다는 의미다.

건설에서 금융, 전자에 이르는 삼성그룹을 이끈 이 회장은 계열사 사장단에게 항상 기회 선점을 강조했다. 세계 최고 기업이 되기 위해선 7~10년 뒤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예컨대 1990년대 이 회장은 10년 뒤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와 같은 지역에서 경쟁사들과 시장 쟁탈전을 벌일 것이라며 지역 전문가 제도를 만들었다. 직원 수백 명을 보내 ‘회사 나오지 말고 그 사회를 알고 돌아오라’고 한 것이다. 2000년대 삼성이 수많은 세계 1위 제품을 탄생시킨 배경에는 이런 성장 시장을 공략할 인재를 미리 육성한 게 큰 역할을 했다. 2000년대 초 파격적 연봉 인상과 성과에 따른 보상 체제를 도입해 국내외 인재를 흡수한 것도 이 회장이 추진한 전략이었다. 또 이 회장이 “주상복합 아파트 시대가 곧 온다”며 2002년 타워팰리스를 만들도록 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은 “대만 출장을 같이 갔을 때 이 회장이 대뜸 고급차의 내부를 하나씩 가리키면서 ‘손이 닿는 어느 곳에도 금속이 없다’며 이 정도로 철저하게 디자인을 고민해야 세계 최고가 된다고 했다"며 “지금처럼 복잡하고 힘든 세계 경제 상황에서 꼭 필요한 발언을 더 못 듣게 돼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 별세

 

[만물상] 이병철의 ‘최대 업적’

강경희 논설위원

입력 2020.10.27 03:18

 

 

삼성그룹을 취재한 동료 기자가 ‘이건희 회장의 도쿄 까마귀’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이 회장이 도쿄를 방문했을 때 ‘도쿄 사는 까마귀가 모두 몇 마리인가’라고 느닷없이 질문해 수행 임원이 진땀을 흘렸다는 일화였다. ‘그것도 기사냐’는 비난도 있었고 ‘이 회장은 특이하다’는 반응도 나왔다. 이 회장은 정말 ‘다른 사람’이었다.

▶25일 타계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출근하는 게 뉴스가 될 정도로 혼자만의 세계에 침잠한 ‘은둔의 경영자’였다. 사물이든 현상이든 취미든 일단 관심 가지면 뿌리를 뽑을 정도로 파고들었다. 본인은 엄청나게 고민한 주제인데 어눌한 어조로 툭툭 질문하니 다른 사람 듣기엔 선문답 같았다. 금융 계열사 사장단을 모아 놓고 회사 매출을 챙기는 게 아니고 “신용카드업의 개념이 무엇이냐”고 묻는 식이었다. 뉴욕타임스는 이건희 회장을 ‘사상가(big thinker)’라고 표현했다.

▶삼성의 반도체 진출은 1983년 이병철 회장이 선언했지만, 씨앗은 한참 전인 1974년 30대 이건희 회장이 뿌렸다. 당시 사재를 털어 도산한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반도체에 대해 이 회장은 “양심 산업이자, 타이밍 사업”이라고 ‘업(業)의 개념’을 남다르게 정의했다. 박사부터 기능직까지 종업원 수천명이 300여 공정에서 단 한 번 실수 없이 합심해서 일해야 하는 ‘양심 산업’이고, 남보다 조기에 양산해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타이밍 사업’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 회장이 파악한 반도체 ‘업의 본질’이었다. 그래서 미국⋅일본 경쟁 기업들이 불황에 머뭇거릴 때 주저 없이 투자했다.

 

▶이 회장의 ‘뒷다리론’도 유명하다. “뛸 사람은 뛰어라. 말리지 않는다. 걷기 싫으면 놀아라. 안 내쫓는다. 그러나 남의 발목은 잡지 말고 가만있어라.” 세계 초일류를 꿈꾸고 일궜지만 그런 이건희 회장도 실패한 분야가 자동차 산업이다. 적자를 거듭하다 손을 떼야 했다. 당시엔 ‘문어발’ 경영이라 비난받았지만 만약 이 회장이 끝까지 자동차에 매진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일론 머스크와 경쟁하지 않았을까.

▶삼성 창업자 이병철 회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창업 1세대다. 이병철은 장남 상속의 관행을 깨고 막내아들 이건희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파격이었다. 이건희에게서 ‘무언가’를 보았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글로벌 초일류’라는 새 지평을 열었다. 이 역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다. 이건희를 선택한 것이야말로 이병철의 ‘최대 업적’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이건희 별세] 정운찬 "서울대 천문학적 지원, 세계적 대학됐다"

[중앙일보] 입력 2020.10.27 13:54 수정 2020.10.27 14:19

 

 

27일 오전 8시 50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빈소. 원불교 전산 김주원 종법사가 영정 앞에서 법문을 읽으며 이 회장의 장례 사흘째 조문이 시작됐다. 
 
구광모 LG 대표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해 발열 체크를 마치고 빈소가 있는 지하 2층으로 내려가 유족들과 대화를 나눴다. 10여분 뒤 빈소를 나온 구 대표는 "재계의 큰 어르신이라 조문을 왔다"며 "우리나라 첨단 산업을 크게 발전시키신 위대한 기업인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구 회장은 "재계 어르신분들이 오래 계셔서 많은 가르침을 주시면 좋은데 참으로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구 대표의 동생 구자용 LS네트웍스 회장은 "좋은 곳에 가셨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27일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구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을 마친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 [사진 공동취재단]

  

27일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구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을 마친 구광모 LG그룹 회장 [사진 공동취재단]

 
정운찬 전 국무총리도 이 회장의 빈소를 찾았다. 정 전 총리는 "유가족에게 너무 슬퍼하지 말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를 응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제가 서울대학교 총장을 할 때 천문학적인 지원을 해주셨다"며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후론 서울대학이 세계 손색없는 대학으로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도 말했다. 
 
최태원 SK 회장의 사촌인 최철원 마이트앤메인(M&M)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잘 알던 분이어서 왔다"며 "경영이 잘되길 바란다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그는 "정부에서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러주는 게 좋았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전날에 이어 이틀 연속으로 빈소를 방문한 심재철 전 국회부의장은 "어제 사람이 워낙 많아 문상을 못해 오늘 왔다"며 "우리나라 경제의 핵심이 쓰러져 참 안타깝다"고 말했다.
 

각계각층 발길 이어져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 김홍업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원유철 전 국회의원, 신희영 대한적십자사 회장도 이날 빈소를 찾았다. 문화계에서는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방문해 고인을 애도했다. 해외 인사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추머 모세 주한 헝가리 대사, 미하엘 라이펜슈튤 주한 독일대사가 찾아와 조문했다.

 


 
편광현 기자 pyun.gwanghyun@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이건희 별세] 정운찬 "서울대 천문학적 지원, 세계적 대학됐다"

[이건희 별세]컬럼비아도 하버드대도, 경영대학 교재는 '삼성'

[중앙일보] 입력 2020.10.27 05:00

HBR 2015년 9월호 [사진 HBR]

 2014년 3월 미국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 경영학석사(MBA) 수업시간. ‘삼성전자:컨버전스 시대의 TV’라는 주제로 160분간 강의가 진행됐다. 180여 명의 학생과 교수ㆍ연구진이 참석한 이날 강의는 두 세션으로 나뉘었다. 60분간 사례 토론에 이어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담당 임원이 참석해 질의ㆍ응답 시간도 가졌다. 세계 최고 경영대학원으로 꼽히는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에서 삼성전자 TV의 성공 사례가 강의 교재로 채택된 것이다.  

 

한국 기업 최초로 HBR에 분석 논문 실려

고 이건희 회장이 이끌어 온 삼성전자의 성공사례는 이미 세계 유명 MBA들의 단골 교재가 된 지 오래다. 2011년에는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이 발행하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에 삼성그룹의 성공 요인을 분석한 논문이 실렸다. 세계적 경영학잡지로 평가받는 HBR에 실린 최초의 한국 기업사례 분석 논문이었다. 논문 저자인 송재용·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 회장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했다. 이 회장이 1987년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만 해도 삼성은 한국 내 선두주자에 불과했지만, 일본기업이 아날로그에 머물러있던 90년대초 이 회장이 디지털 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것이 혁신과 창의성을 통해 새로운 디지털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는 문을 열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2015년 HBR 9월호에는 삼성의 디자인 혁신 사례를 분석한 논문이 게재됐다. 삼성 케이스가 HBR에 실린 것은 2011년 이후 두 번째로, 국내 기업 중 HBR이 두 차례나 집중 분석한 곳은 삼성이 처음이었다. ‘삼성은 어떻게 디자인 강자가 됐을까’라는 제목의 논문은 불과 20년 전만 해도 기술과 효율을 중시하는 관행에 사로잡혀 있던 삼성이 어떻게 디자인을 선도하는 위치에 올라섰는지 분석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논문 저자인 유영진 미국 템플대 교수와 김경묵 삼성전자 수석디자이너는 이 회장이 1996년 “21세기 경영의 최후 승부처는 디자인”이라고 말한 것을 계기로 삼성전자가 내부 직원들을 해외 유수의 디자인 학교에 교육을 보내기 시작한 점을 짚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대신 이 회장은 내부 디자인 조직에 투자하는 결단을 내렸고, 그 덕에 삼성 디자이너들이 디자인 혁신을 관철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 나갔다는 것이다.  
 

유명 MBA 대학 필드 트립 필수 코스

삼성전자 서초사옥 [연합뉴스]

 

 


이미 2007년 부터 뉴욕의 명문 MBA인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이 삼성전자의 마케팅 성공 사례를 경영 교재로 채택하기도 했다. 이 대학은 뉴욕 맨해튼 타임워너 빌딩에 설치한 삼성전자 체험전시관 ‘삼성익스피어리언스’를 체험 마케팅 강의의 필수 견학 코스에 포함시켰다. 당시 강의를 담당한 번트 슈키트 교수는 “삼성은 삼성익스피어리언스 등 다양한 감성적 체험 마케팅을 통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한 모범 사례”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 마련된 홍보관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SIM)은 이제 전세계 경영학도들의 ‘방문 명소’가 됐다. 지난해만 해도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MBA), 브라운대 기술경영대학원, 싱가포르 경영대학 등 해외 유명 대학ㆍ대학원생들이 단체로 찾는 등, 매년 8000~9000명의 외국 교수와 학생들이 방문하고 있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삼성은 선진국이 아닌 나라에서 최첨단 기술 분야의 세계적 기업이 된 아주 예외적인 곳"이라며 "외국 대학에서도 과거보다 많이 다뤄지고 관심도 높아진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권유진 기자 kwen.yujin@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이건희 별세]컬럼비아도 하버드대도, 경영대학 교재는 '삼성'


한국비료 입찰 300억 더 써 혼날 각오했는데 “신경쓰지 마라”

[중앙일보] 입력 2020.10.27 00:02 수정 2020.10.27 01:06


1987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취임한 후 27년 동안 7명의 비서실장이 그를 보좌했다.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바꾼 ‘신경영’의 초창기 3년간(1993년 10월~1996년 12월) 이 회장 곁을 지켰다. 현 전 회장은 “이건희 회장 같은 경영인이 한두 사람만 더 나와도 대한민국 경제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7월 출간한 자서전 『위대한 거래』에 이 회장의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담았다. 현 전 회장의 설명을 바탕으로 일부를 소개한다.
 

현명관 전 비서실장이 본 이 회장
“사고 싶은 물건이니 당연” 통 큰 모습
“질로 승부” 지시 “양도 중요” 의견에
신경영선언 전날 포크 던지며 격노

현명관

◆ 한국비료 인수에 300억 오버슈팅= 1994년 초여름, 한국비료의 민영화를 위한 매각 공고가 떴다. 한국비료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1966년 삼성이 국가에 반강제로 헌납한 회사였다. 당시 현명관 삼성 비서실장이 보고하자 이 회장은 “반드시 찾아오라”고 명했다.
 
금강화학과 대림산업도 한국비료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삼성 경영진은 고심 끝에 2300억원에 입찰, 결국 인수에 성공했다. 삼성정밀화학(현재는 롯데정밀화학)이 그 회사다. 하지만 경쟁사 응찰가는 2000억원. 300억원이나 ‘오버슈팅’했다. 현 실장은 불호령과 문책을 각오했지만 회장의 반응은 이랬다. “사고 싶은 물건을 사는데 비싸게 주고 사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신경쓰지 마세요.” 현 전 회장은 “이 회장은 통 큰 경영자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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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영 선언 하루 전날 무슨 일이= 1993년 6월 6일, 삼성의 사장단 100여 명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 모였다. ‘신경영 선언’ 하루 전날이었다. 호텔 회의장엔 녹음된 이 회장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회장은 지시가 경영진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왜곡되는 일이 반복되자 직접 녹음해 전달하는 방법을 자주 썼다. “시간이 걸려도 질로 승부해야 합니다. 당장 매출이 줄어도 할 수 없어. 도전해야 해.” 그런데 직후, 이수빈 당시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회장님, 하지만 양도 중요합니다. 양적 성장을 통해 흑자를 만들고 질로 나아갈 바탕을 만들어야….” 그 순간 회의장엔 ‘탕! 쨍그랑’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 회장이 테이블에 있던 포크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소리였다. 현 전 회장은 “비서실장은 사장단의 보편적인 생각을 대신 전달한 것인데 이 회장이 격노했다”며 “당시 사장단조차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승지원에서의 항명, 그리고 반전=승지원은 회장의 집무실이자 삼성의 영빈관이다. 삼성의 대소사가 대부분 이곳에서 결정됐다. 이런 곳에서 현 전 회장은 삼성시계 사장 시절, 이 회장에게 항명에 가까운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삼성시계는 일본의 초정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 세이코와 합작한 회사다. 이 회장이 설립을 주도했고, 직접 챙기던 곳이다. 이런 회사에 불만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당시 분위기에선 ‘불경’이었다.
 
하지만 현 전 회장은 “세이코가 기술이전도 제대로 안 해주면서 불공정한 거래를 요구한다”며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가 ‘역린’을 건드렸다고 느꼈을 때, 이 회장은 “누가 (해결)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 있었어?”라며 현 전 회장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현 전 회장은 “이 회장의 리더십은 기분에 따라 불호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항명처럼 보이는 말도 귀담아듣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데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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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한국비료 입찰 300억 더 써 혼날 각오했는데 “신경쓰지 마라”

 

 

“액정TV·반도체·스마트폰…이 회장엔 시대 읽는 눈과 결단력”

[중앙일보] 입력 2020.10.27 00:02 수정 2020.10.27 01:06

이건희 1942~2020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오른쪽 둘째)이 생전인 2004년 선진 제품 비교전시회에서 디지털TV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왼쪽은 이학수 당시 부회장, 오른쪽은 최지성 당시 사장. [사진 삼성전자]

미타라이 후지오(御手洗富士夫·85) 캐논 회장은 26일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일본 경제인연합회(게이단렌) 회장을 지낸 미타라이 회장은 이 회장과 30년 가까이 교류해 온 대표적 일본 인맥이다.
 

미타라이 후지오 캐논 회장
10년 전 승지원서 열띤 토론 생생
내가 게이단렌 회장 맡았던 기간
삼성, 소니 제치고 가전 세계 1위

그는 10여 년 전 이 회장과 디스플레이 사업의 미래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던 일을 떠올리며 “지금도 그날 저녁 나눴던 대화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음은 미타라이 회장과의 전화 인터뷰 내용을 기자가 정리한 것이다.
 
고 이건희 회장은 시대의 흐름을 읽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사람이다. 상당히 조용하고 부드러운 분이었지만 굉장히 우수한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있었다. 처음엔 가전으로 삼성전자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고, 1990년대에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액정 TV로, 이후엔 반도체 분야를 육성했고,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우뚝 섰다. 삼성전자를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이 회장을 대단히 존경한다.
 
10여 년 전 이 회장과 디스플레이 시장의 미래에 대해 열띤 토론을 나눴던 그날 저녁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 회장이 갑자기 서울에 있는 삼성의 영빈관인 승지원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한걸음에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날아갔다. 당시 디스플레이 분야는 액정·플라스마·SED(표면전도형 전자방출디스플레이) 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아직 전략적으로 어느 것이 가장 좋은지 모르는 상태였다. 경쟁업체인 소니나 파나소닉도 마찬가지였다.
 
이 회장은 나에게 여러 의견을 물었고, 나는 당시 “액정 기술에 다소 의문은 있지만 (액정TV가) 비용 측면에선 유리하다”는 생각을 말씀드렸다. 이 회장은 나와 의견이 일치했다. 이 회장은 당시 말씀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통역 없이 일본어로 대화를 나눴던 걸로 기억한다.
 

미타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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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1시간 가까이 이어진 대화에서 이 회장은 삼성의 미래산업을 액정TV로 정한 것 같았다. 이후 과감한 대규모 투자가 이어졌고, 삼성은 액정TV로 세계 1위가 됐다. 이 회장과의 대화 중 판단의 정확함, 즉 결단력에 상당히 놀랐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었겠지만 결정은 스스로 내렸다. 그런 점에서 시대의 흐름, 기술의 흐름을 잘 아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사람인 건 틀림없다.


마침 내가 게이단렌 회장을 맡은 기간(2006~2010년) 중 가전 부문에서 삼성이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일본에서도 삼성의 경영방식은 상당한 화제가 됐다. 이 회장은 하나씩 하는 게 아니라 거대한 자본을 배후로 큰 결단력을 갖고 회사를 크게 바꿔나갔다. 사고방식의 스케일이 대단히 크고 다이내믹했다. 나를 비롯한 일본의 많은 경영인이 그런 방식을 상당히 존경했다. 이 회장도 일본과의 관계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아쉽게도 이 회장의 건강이 악화해 10여 년 전 만남이 마지막 교류였다. 이후 이재용 부회장과는 여러 번 만나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2019년엔 내가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럭비월드컵 경기에 이 부회장을 초청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이 경영자로서 훌륭하게 성장한 만큼 이 회장도 안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회장이 남긴 가장 큰 레거시(유산)는 역시 시대를 읽는 눈과 결단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회장이 건강을 회복해 꼭 다시 만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것을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도쿄=윤설영 특파원 snow0@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액정TV·반도체·스마트폰…이 회장엔 시대 읽는 눈과 결단력”

“한국반도체 인수 검토하라” 한마디…삼성, 세계적 기업 시발점 됐습니다

[중앙일보] 입력 2020.10.27 00:02 수정 2020.10.27 10:22

 

이건희 1942~2020 

손병두

“이건희 회장님.”
 

손병두 전 호암재단 이사장 추도사

건강을 회복하신 회장님을 이렇게 불러보길 얼마나 기도드렸는지 모릅니다. 매일 새벽 미사 때마다 회장님의 쾌유를 빌어드렸는데 제 기도의 힘이 많이 모자랐나 봅니다.
 
회장님과 맺었던 인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삼성 회장 비서실에서 부회장님으로 가까이 모시고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이는 저와 동갑이지만 과묵하면서도 깊은 사고와 내공, 사물에 대한 긴 안목과 통찰력, 일에 대한 무서운 집념, 대범하면서도 섬세하고 자상한 마음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한국 경제를 세계적 경제 강국의 반열에 올리는 데 크게 공헌한 기적의 사람이셨습니다.
 
삼성에서 아무도 반도체를 모르던 시절, 어느 날 하루 서류뭉치를 저에게 주시면서 검토하라고 하셨습니다. 한국반도체 인수 서류였습니다. 저 역시 반도체에 대해 문외한이었기에 국내 전문가를 찾아보고 외국 문헌을 뒤적이며 검토한 결론은 ‘반도체는 미래 산업의 쌀이다’였습니다. 회장님이 이병철 회장께 인수를 건의하니 처음엔 말리셨다고 했습니다. 이때 이 회장님이 ‘내 돈으로 인수하겠다’고 해 시작한 것이 오늘날 삼성전자가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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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대 회장님께서 이건희 회장님을 후계자로 키우시기 위해 엄한 훈련을 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후계자가 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묵묵히 인내하고 이겨내어 후계자가 되셨습니다. 회장님은 가히 초인적인 노력으로 밖에서 들려오는 온갖 악성 루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의 달성에 매진하셨습니다.
 
회장님은 항시 기업인으로서 국가에 대한 사업보국의 정신을 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참을성 많은 이 회장님도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한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시던 장면은 저희들로 하여금 숙연한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언젠가 회장님 초대로 승지원에서 전경련 회장단 부부 만찬 모임이 있었지요. 그때 제 소망은 회장님을 전경련 회장님으로 모시고 한국 경제계의 큰 혁신을 이루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뿐이 아니라 모든 전경련 회원사들이 이 회장님을 전경련 회장님으로 모시고자 했지만 건강상 이유로 고사하시어 모두들 아쉬워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제대로 말씀을 나누지 못하고 영면하시어 많은 회한이 있으시겠습니다. 그래도 든든한 후계자 이재용 부회장을 키워 놓으셨으니 후사를 맡기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가시옵소서. 천국에서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평화의 안식을 누리소서.
 
2020년 10월 손병두 올림
전 호암재단 이사장

[출처: 중앙일보] “한국반도체 인수 검토하라” 한마디…삼성, 세계적 기업 시발점 됐습니다

 

"일진과 붙어도 안밀렸다" 함께 떠난 60년지기 이건희·홍사덕

[중앙일보] 입력 2020.10.26 15:25 수정 2020.10.26 15:56

“고등학생 이건희 군은 엉뚱하고 싱거운 친구였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7년 쓴 책『이건희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 실린 ‘내가 만나 본 이건희 회장, 애벌레 시절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글을 쓴 이는 지난 6월 세상을 떠난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이다.
 
 

지난 6월 18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의 빈소. 영정사진 양옆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조화가 놓였다. 홍 전 부의장과 이 회장은 고교 동기동창이다. 과거 대학 입시를 앞두고 서울에 왔지만, 머물 곳이 없던 홍 전 부의장의 사정을 알고 이 회장이 지낼 방을 구해주기도 할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연합뉴스]

홍 전 부의장은 이 회장과 60년 동안 인연을 이어온 친구였다. 홍 전 부의장 장례식 당시 영정사진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는 이 회장 이름이 적힌 조화가 놓였다. 꽃으로나마 친구의 가는 길을 배웅했던 이 회장이지만, 그 역시 불과 4개월 뒤인 지난 25일 세상을 떠났다. 정계와 재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60년 지기가 같은 해 함께 삶을 끝마친 것이다.
 

‘힘자랑’ 하며 어울린 고교 시절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건 서울 사대부고 시절이다. 이 회장 책에 실린 홍 전 부의장의 글에는 두 사람의 학창시절 일화가 소개돼 있다.
 
“방과 후 그가(이 회장)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했다. 앞장서 가던 그가 배고프다면서 끌고 간 곳은 군용 천막 안의 즉석 도넛 가게. 시골 촌놈인 내 눈에도 비위생적인 곳이지만 그는 털썩 주저앉아 잘도 먹어 치웠다. 그의 아버지 함자는 물론, 얼마나 엄청난 부자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속으로 ‘녀석, 가정형편이 우리 집 수준밖에 안 되는 모양’이라고 단정했다.”
 

이병철 삼성창업주(왼쪽)와 함께 사진을 찍은 유년 시절의 이건희 회장(오른쪽). [중앙포토]

두 사람은 종종 ‘힘자랑’을 하며 몸을 부딪칠 만큼 친밀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 회장은 레슬링을 했고, 홍 전 부의장은 유도를 했다. 홍 전 부의장은 생전 이 회장의 승부사 기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중앙일보에 소개하기도 했다. 고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싸움 좀 한다는, 요즘 말로 하면 ‘일진’과 이 회장이 싸움을 벌인 사건이다.
 
홍 전 부의장은 “건희는 말도 잘 안 하고 정말 떡두꺼비 같았는데, 알고 보니 건희가 먼저 붙자고 한 싸움이었다”며 “내가 양쪽 가방을 들고 심판을 봤다. 근데 막상 붙으니까 건희가 힘이 좋았다. 말수는 적었지만, 승부를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 ‘싸움닭’ 기질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고비 때 서로 조언을 주고받는 사이기도 했다. 홍 전 부의장이 중앙일보에 입사해 기자생활을 시작한 것도 이 회장의 조언 덕분이었다. 홍 전 부의장 회고에 따르면 이 회장은 고교 시절부터 “나는 사람에 대한 공부를 가장 많이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실로 괴이한 두뇌의 소유자"

사회와 산업을 보는 이 회장의 시각에 대해서도 홍 전 부의장은 “남달랐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이 일본에 관해 나눈 대화를 한 예로 들기도 했다. 홍 전 부의장에 따르면, 이 회장은 느닷없이 일본 소학교 교과서 몇 권을 건네면서 “일본어를 배워놔라. 니 정도면 두어 달만 해도 웬만큼 할끼다”고 말했다고 한다. 반일감정이 팽배해있던 시절이라 홍 전 부의장이 ‘그걸 뭐하러 배우노?’ 하고 물었더니, 이 회장은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고 답했다.
 

지난 2000년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선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당시 홍사덕 전 국회부의장의 모습. YS와 DJ,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등 거물 정치인들이 고루 중용했던 홍 전 부의장은 생전에 정치권의 '풍운아'로 불렸다. [중앙포토]

  
홍 전 부의장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한 일화도 유명하다. 이 회장이 와세다대 재학 중 귀국했을 당시 두 사람이 제2한강교(양화대교)를 지나며 나눈 대화다.
 
홍 전 부의장=“봐라, 이게 우리나라 기술로 만든 다리다.”
이 회장=“이눔아. 생각 좀 하면서 세상을 봐라. 한강은 장차 통일되면 화물선이 다닐 강이다. 다리 한복판 교각은 좀 길게 잡았어야 할 것 아이가?”
 
홍 전 부의장은 이 일을 떠올리며 이 회장을 “실로 괴이한 두뇌의 소유자”로 평하기도 했다.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일진과 붙어도 안밀렸다" 함께 떠난 60년지기 이건희·홍사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