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대중문화전문기자
입력 : 2015.10.03 07:00 | 수정 : 2015.10.03 16:26 “삼십 대 중반에 이불 장사로 출발, 슬하의 세 자녀 과외비라도 벌려고 시작한 주부의 ‘치맛바람’이, ‘바람의 옷’이라는 패션의 나비효과를 만들어 냈다.”
이영희를 떠올리면, 천지 사방에 한복 천을 걸어놓고 전장의 지휘관처럼 앞서 달리는 스펙터클한 전사의 모습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림이 연상될 때도 있다. 그만큼 그녀가 벌인 일들은 쇼킹할 정도로 스케일이 커서, 그녀가 만든 옷보다 그녀가 치러낸 ‘행적’을 열거하는 것이 더 숨가쁘다.
- ▲ DDP에서 이영희 40주년 기념 전시회 ‘바람, 바램’ 전을 열고 있는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80세)./사진=박상훈 기자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4년 파리 프레타 포르테에서였다. 한국 디자이너로 최초 파리 쇼에 참가, 맨발에 저고리 없이 홀로 선 한복 드레스로 ‘바람의 옷(당시 프랑스 ‘르 몽드’ 지에 실린 표현)’이라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후 진통을 부수고 혁신을 일으킨 개척자라는 찬사와 전통을 훼손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정복자라는 비난을 동시에 관통하며, ‘이영희의 치맛바람’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2000년 뉴욕 카네기 메인 홀에서 패션 공연 ‘Wind of History’ 공연, 2001년 평양에서의 한복 패션쇼, 2004년 뉴욕 맨해튼에 ‘이영희 박물관’ 오픈, 2005년 APEC 정상회의 21개국 정상들의 두루마기 제작에 이어 2007년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이영희의 한복 16벌을 영구 소장한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파리 쇼의 단독 비행에서 시작해, ‘옷이 날개’라는 한국 속담을 현실 세계 속에 만들어낸 마술사’라는 헌사로 오랫동안 이영희의 든든한 우군 역할을 자원했다. 무주 전주 유니버시아드 개회식 때 캐나다의 두 여성 스키어에게 이영희의 한복을 입고 곡예 점프를 해볼 것을 제안한 사람도 이 전 장관이었다.
그리고 지난봄 샤넬의 크루즈 쇼가 열린 DDP에서 이영희는 ‘동양의 샤넬이고자 했던 자신의 오랜 바램’을 유려하게 펼쳐 보였다. 이영희 40주년 기념 전시회 ‘바람, 바램(9월 23일부터 10월 9일까지)’은 그녀의 한복 인생을 총결산한 자리였다.
- ▲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이영희가 옷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날개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이영희의 한복이 옷이라면 천상으로 비상하는 바람의 옷이고, 땅으로 내려오는 흙의 옷이라고.
‘절대 디올, 샤넬처럼 하지 말고 우리답게 마당을 거닐듯이 하라’는 이어령 선생의 조언은 전시 디자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전시장 입구부터 나부끼는 치마 속으로 진입하면, 마치 한복 속을 유영하여 타고 오르듯 평면 저고리와 만난다. 평면 재단인 한복이 입체적인 인체와 만나 생기는 여유 구조는 원형의 마당에서 절정을 이룬다.
패션 디자이너 이정우의 어머니이자, 여배우 전지현의 시할머니이기도 한 여든의 이영희. 샤넬의 칼 라거펠트가 직접 오면 한복을 가르쳐주겠다는 대담한 여장부이자, 올겨울 출산을 앞둔 손주 며느리 전지현의 아기를 위해 이미 고운 배냇저고리를 지어놓았다는 평범한 할머니이기도 한 이영희를 만났다.
자신의 육체가 자신의 옷을 표현하기엔 최적화되지 않았다는 생각에서인지, 인터뷰 자리에서도 이영희는 둥글게 말아 올린 검은 머리에 한복 라인을 변형해서 만든 투피스 차림이었다.
-올해 여든인데, 정말 정정해 뵙니다. 건강의 비결이 있으신지요?
“일주일에 4번 수영을 합니다. 리베라 호텔 수영장에서 150m를 열 번 왕복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그만하지 기운이 달려서 못한 적은 없어요.”
-몇 년 전 광복절 즈음해서 위안부 할머니들께 한복을 지어드리는 프로젝트로 만나뵈었습니다. 덕수궁으로 소풍 가서 한복 입은 할머니들 화사하게 영정 사진도 찍어드렸는데, 기억나세요?
“그럼요. 그때 그분들 다 돌아가셨지요? 옷감 고를 때부터 어찌나 아이처럼 좋아하시던지, 미용실 모시고 가서 머리하고 화장까지 해드렸는데, 다들 꽃분홍색 립스틱만 바르겠다고 그랬지요(웃음).
그런데 요즘엔 다문화가정 어린이한테 한복을 지어줘요. 그 애들을 우리가 또 보듬어야 하거든요. 50년 100년 후에도 한국에 살도록. 사소해 보여도 그런 게 정말 소중한 기억이 돼요.”
- ▲ 이영희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복,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한복을 지어주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일명 치유의 옷이고 화합의 옷이다./사진=박상훈 기자
-한복은 색이 화사해서 할머니들과 아이들이 좋아합니다. 한복 입은 유치원생 아이들을 모아 놓고 강의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았는데,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치나요?
“딱 세 가지만 가르쳐요. 첫째, 아침밥을 많이 꼭꼭 씹어먹어라. 둘째, 생일에는 꼭 한복을 입어라. 셋째, 약속을 잘 지켜라. 한복 고름 매는 거 그런 건 안 가르쳐요. 자기가 태어난 날 한복을 입는 게 멋있는 거다, 그런 근본이 몸에 배면 한복도 자연히 사랑하게 되죠.
저는 네 살 때부터 한복을 입었어요. 한복이 제일 멋있는 옷인 줄 알았지요. 어머니가 염색도 잘하고 한복도 잘 지으셨어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참 사랑하셨어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아버지가 첩을 몇이나 두면서 한량처럼 돌아다니셨는데,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 더 멋있어 보이라고 춘추복으로 두루마기를 8벌이나 지어 입히셨어요.
당시에 아버지는 절에서 종종 휴양하셨는데, 화선지를 딱 펴고 붓에 먹을 듬뿍 묻혀서 글씨 쓰길 좋아하셨어요. 제가 어린 시절 스님 옷을 많이 봐서인지, 지금도 회색, 먹색을 가장 고급스러운 색으로 쳐요.”
-먹색은 이영희 한복의 시그니처 컬러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도 제자들한테 색깔 배색이 막힐 때는 먹색을 넣어보면 풀린다, 그렇게 가르쳐요. 제가 파리 프레타 포르테 첫 쇼에 먹색 치마저고리에 자주색 고름을 달았는데 그 때부터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
-30대 중반에 이불 장사하다 운이 트여서 한복까지 이어진 것으로 압니다. 이불 한 장이 운명을 바꿨다지요?
“친척 언니가 비단 이불을 팔아보라고 가져왔는데, 제가 100장을 사면 한두 장씩 덤으로 줘서 팔면서 장사를 아주 잘했어요. 옛날부터 저는 꽃분홍, 초록 이런 배색을 싫어해서 제가 연핑크에 진한 핑크 이런 식으로 자연 염색으로 배색해서 팔았는데 고급 예단으로 아주 인기가 좋았지요.
그러다 남은 뉴똥 천 조각으로 잉크색 치마에 흰 저고리를 해 입었더니, 주위에서 너도나도 그 한복 해달라고 성화를 했어요. 그때가 마흔이었는데, 겁도 없이 서교동에 ‘이영희 한국의상’이라는 한복집을 차렸어요.”
-남편께서 직업 군인이셨고, 그 당시에 육사 출신 하나회 장교 부인들 한복 해주면서, 일명 ‘떴다’고 들었습니다.
“당시에 육해공 참모 총장 부인은 물론이고 장군 부인은 죄다 왔어요(웃음). 하나회 장교 부인들도 왔을 거예요.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도 단골이셨고. 시대적으로 압구정도 살아나고 부동산 경기가 한창 좋을 때였어요. 부인들은 너도나도 한복 지어 입는 게 유행이었고, 최고 사치였지요.”
- ▲ 옷감 위에 붓으로 직접 색을 칠하고 솥에 쪄서 말려야 비로소 우물처럼 깊은 색감이 나온다.
-요즘 영화 ‘암살’로 더욱 사랑을 받는, 손주 며느리 전지현도 한복이 잘 어울리죠?
“그럼요. 아주 예뻐. 명절 때도 외국 파티 때도 내가 해준 한복을 잘 입는대요. 시아주버니 결혼식 때도 입고 왔더라고. 오렌지빛이 참 잘 받아요. 이번 전시 오프닝에는 왔다가 가면서 밥 사 먹으라고 용돈도 주더라고(웃음). 한방 화장품 같은 것도 생기면 할머니 먼저 갖다 줘요.”
-뱃속 아기를 위한 배냇저고리는 시할머니 몫이겠지요?
“지금 배냇저고리를 예술로 만들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한복 입히려고 나들이옷도 꼼꼼히 다 만들고 있어요. 아기 때부터 내 혼을 입히려고 작정을 했어요(웃음).”
-예전엔 새해 달력에 당대 인기 여배우들이 한복 입고 찍은 사진이 실리곤 했어요. 한복을 입었을 때 예쁜 여배우로 누구를 꼽으세요?
“전지현도 예쁘지만, 하지원이가 참 예뻐요(웃음).”
-따님 되시는 이정우 디자이너(전지현의 시어머니)는 개인 브랜드 ‘사피’는 접고, ‘메종 드 이영희’ 일에 전념하고 있죠?
“처음 한복 할 때도, 저는 제 딸 정우 과외비 버는 재미로 했어요. 이번 전시도 정우가 우겨서 했어요. ‘이런 좋은 옷을 정리하고 보여줘야 다음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내가 빚을 내서 전시를 했어요(웃음).”
-엄마와 딸, 디자이너 이영희와 이정우는 한동안 갈등이 있지 않았던가요?
“그 아이나 저나 디자이너로서 서로 강해서 많이 부딪혔어요. 나는 나대로 내가 원조니, 이영희 법칙대로 해야 된다, 했죠. 파리 쇼부터 몇 년같이 하다 갈라졌고, 정우도 ‘사피(그녀의 딸이라는 뜻)’로 브랜드를 만들어 독립했는데, 이제 다시 정우가 물려받아서 해야지요.”
- ▲ 고름을 없앤 저고리. 그녀는 옷 안에서도 옷 밖에서도 끝없이 파격을 만들어 낸다./사진=박상훈 기자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의 의전복식, 북한 김정일의 한복, 부시의 두루마기와 힐러리의 한복 등등 정치인의 의복을 많이 담당하셨지요. 권력자의 마음을 얻는 비결이 있습니까?
“저는 한복이 펼쳐주는 길대로 갔어요(웃음). 영부인 중에서는 김옥숙 여사가 한복을 제대로 입었는데, 바바라 여사(부시 전 대통령 부인)가 많이 부러워했어요. 손명순 여사 옷 해준 걸 보고는 힐러리가 감탄했다고 해서, 나중에 그분 것도 인디언 핑크로 해드렸지요.
그런데 대통령 옷을 많이 했는데도, 박근혜 대통령 옷은 또 못했어요. 그것도 인연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2001년 평양에서 했던 한복 패션쇼는 디자이너 이영희의 배포를 보여 준 파격적인 행보였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지요?
“평양의 한복 쇼는 한국 최초의 백악관 출입기자이자 워싱턴 특파원으로서 저명했던 한국인 국제기자 문명자 씨가 나서서 일사천리로 진행했어요. 국가에서 1천 원도 안 받고, 김한길 당시 문화부 장관한테 보고만 하고 갔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방북 1주기 기념으로 6월 15일에 평양에 갔어요. 민간에서 여기저기 후원금을 주셔서 그걸 루이뷔통 가방에 달러로 바꿔 들고 가서, 호텔비며 체류비를 냈지요.”
-평양에서 그토록 쇼를 하고 싶었던 이유가 뭐죠?
“우리 한복이 얼마나 멋지게 발전했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평양 시민들이 자기네는 이런 옷감이 없다고 어찌나 부러워들 하던지, 가지고 갔던 옷 5백 벌을 모두 주고 왔어요. 당시에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한복을 해줬는데, 치수 재러 대역으로 온 사람이 키가 요만했었어요(웃음).
저는 과감한 배색과 스타일에 매료돼서 기녀 복으로 쇼를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북한에서는 남자 ‘꼬시는’ 옷이라고 싫어해서, 스토리를 조금 변형해서 보여줬지요.”
-남북관계가 좋았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해외에서도 큰 이슈가 됐었지요. 어쨌거나 1994년 파리 프레타 포르테 첫 쇼, 2000년 뉴욕 카네기홀에서의 첫 쇼, 2001년 평양에서의 첫 쇼, … 그렇게 대형 스케일로 일을 벌였는데, 그중에 최고는 2004년 뉴욕 맨해튼 32번가의 ‘이영희 박물관’을 세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박물관 문을 닫게 됐다고요?
“그게 돈이 어마어마하게 드는 일이었어요. 그동안 한 100억은 들어갔지 싶습니다. 80~90년대에 한복 팔아서 돈 많이 벌었으니 그런 식으로라도 되갚고 싶었어요. 이어령 전 장관께서도 “아파트 방 하나 빌려서, 치마저고리 한 벌이라도 횃대에 걸어보라”고 격려를 해주셨거든요.
많은 분 도움으로 제가 모아온 귀중한 옛 옷과 장신구, 소품, 왕비 대례복까지 지어서 전시했는데, 10년간 잘 버티었어요. 이제 경주로 옮겨서 다시 가다듬으려고 해요.”
- ▲ 과감함과 전통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찾아가는 이영희의 한복./사진=박상훈 기자
-이영희의 한복이 국제무대에서 주목받은 것은 저고리를 벗고 치마를 드레스로 만든 일명 ‘바람의 옷’ 덕분이었습니다. 저고리를 ‘벗겼다’라는 파격에서 글로벌 패션으로 비상했지만, 여전히 전통을 훼손했다는 부정적인 인식도 있습니다.
“파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파리에서는 그게 패션이었어요. 저는 한복 디자이너가 아니라 패션 디자이너로 프레타 포르테에 참석했거든요. 모던 한복의 시작이었지요. 그런데 가끔 국악 연주할 때 가야금, 단소 연주자들이 저고리가 없는 한복 드레스를 입는 걸 보면 “내가 너무 일찍 벗겼나?” 싶기도 해요(웃음).
바이올린이나 첼로 연주자들은 괜찮아요. 정경화 선생도 내 옷 입고 연주할 땐 기품이 있거든요. 단아해야 할 때와 현대적이어야 할 때는 입는 사람이 좀 구별을 해야 해요.”
-한복의 특징은 평면 재단, 풍부한 컬러 그리고 스트링(끈)입니다. 여기서 선생은 저고리보다는 치마가 지닌 잠재력을 더 크게 보신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도 한복에서 저고리와 치마 중 선택하라면 치마예요. 치마 하나로 옷이 되거든요. 제가 한복 드레스를 내놓기 전까지 서양 드레스는 가슴선이나 허리선이 잘록 들어간 형태였어요. 그런데 평면 재단으로 12폭으로 장대하게 펼쳐지는 드레스가 나온 거예요. 그리고 가슴 위에서 여며진 끈이 아래로 늘어지는 디자인도 굉장히 전위적으로 받아들여졌어요.
그리고 컬러도 몇 개의 천이 서로 겹쳐져서 아주 오묘한 빛깔을 띠지요. 빛이 천 사이로 새어 나오고 천을 뚫고 스며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빛깔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에요. 흰색 노방에 일일이 붓으로 다 색칠해서 찜 솥에 떡 찌듯이 쪄서 일주일을 말리면 먹색도 자주색도 입체적인 깊이를 띄게 돼요.”
- ▲ 한 장의 평면이 이루어낸 변화들. DDP ‘바람, 바램’ 전시.
-한복을 디자인하면, 우주를 디자인할 수 있다, 고 했습니다. 핏(fit)으로 조이는 옷이 아니라 무한대로 펼치는 옷이라서 그런가요? 가령 예전에 중국의 치파오, 일본의 기모노, 한국의 한복 … 아시아 3개국의 전통 의상을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치파오와 기모노는 몸과 옷감 사이에 공기층이 전혀 없을 정도로 스키니해 움직임이 한정되는 반면, 한복은 정말 바람을 타고 날아갈 듯이 전위적이고 호방해 보였습니다.
“맞아요. 한복은 컬러도 입는 법도 무한대예요. 고유한 형태 감은 있는데 그 컬러의 조합도 무한대, 스트링으로 치마 길이를 조절하는 법도 무한대예요. 치마 뒤 자락을 앞으로 할 수도 있고, 드레이핑도 자유자재로 잡혀서 무척 기능적이고 섹시해요. 얌전해 보이지만 굉장히 대담한 옷이에요.
한복을 연구하면 그래서 가구도 그릇도 집도 지을 수 있어요. 한복을 보던 눈으로 보면 그 구조와 색깔의 조화가 다 보여요(웃음). 그래서 예전엔 현대 자동차 수출용으로 까만 자동차 내부를 컬러풀하게 디자인한 적도 있고, 이번엔 에이스 침대하고도 협업을 했어요.”
-한복의 대담한 디자인이 선생의 대담한 기질과 잘 만난 듯싶습니다.
“저는 제가 현실에서 감히 못 해본 걸, 펼칠 뿐이에요(웃음). 2008년에 구글 아티스트 캠페인에서 제가 ‘세계 60인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뽑혔는데, 그즈음 구글 회장 주최로 배우 송승헌과 김동호 전 부산영화제 위원장과 나 셋이서 북촌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어요.
그때 구글 회장이 “이영희 선생이 전통에서 모던을 뽑아낸 게 참 놀랍다.” 그러더군요. 저는 그게 다 한국 전통을 사랑했기에 나온 출구라고 했어요.”
- ▲ 짧은 저고리에 치마 말기를 길게 한 기녀복.
-지난봄 DDP에서 샤넬의 크루즈 쇼가 열렸는데, 한복을 모티브로 한 드레스가 대거 등장했어요. 한복 전문가로서 어떻게 보셨나요?
“저는 그거 보고 속상해서 잠이 안 왔어요. 그래도 세계적인 대가가 한복 다뤄줘서 고맙다, 하는 마음으로 결론을 내렸지요. 조화가 좀 아쉬웠는데, 다음에 칼 라거펠트가 저한테 직접 오면 도와줄 마음이 있어요(웃음).”
-동양의 샤넬이 되는 게 꿈이었죠?
“맞아요. 동양의 샤넬이 되겠다고 꿈을 꿨는데, 그게 나 혼자 힘으로 되는 일은 아니더라고요(웃음). 세계 무대에서 모던 한복을 선보였고, 여기까지 했어요. 앞으로는 재능 기부를 더 많이 하고 싶어요.”
-장사는 예전만 못하지요?
“많이 어려워요. 80~90년대엔 뉴욕의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에서 파리 이영희 부티크에서 해외 바이어들이 엄청나게 주문을 많이 했어요. 세계 경기가 좋았죠. 지금은 한복 대중화에 힘을 써요. 올해는 ‘이영희 40주년 기념’이라 한 벌에 70~80만 원 정도에 좋은 한복 지어드리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연주자들도 한 벌에 150만 원 정도에 한복 드레스 해주려고 해요. 다문화 가족 아이들한테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통 사람들도 이영희 한복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도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50억짜리 플래티넘 드레스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보석하시는 분이 백금으로 짠 천을 주셔서 만든 거예요. 기모노처럼 럭셔리의 끝을 보여주는 최고급 한복 드레스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보석 회사 소유인데, 그 옷 때문에 보험도 들었어요.”
- ▲ DDP 전시장에 걸린 50억 짜리 플래티넘 한복 드레스.
-한복이 패션 한류의 원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번 제 전시 제목이 ‘바람, 바램’이에요. 한복이 ‘바람의 옷’이라는 이름으로 떴지만, 아직 날지는 못했어요. 한류도 그렇지요. 한복도, 한류도 이제 좀 날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40주년을 맞은 요즘, 어떤 상념에 사로잡히시나요?
“제가 모차르트와 고흐를 좋아해요. 그런데 어떤 데서 제 마음이 움직이는가 하면, 그네들이 고통 속에서 창작할 때에요. 모차르트가 빚에 쪼들려서 작곡을 할 때, 고흐가 ‘물감값보다 내 그림이 비싸지는 날이 오겠지.” 중얼거리면서 그림을 그리는 마음을 자주 생각해요.
내가 이제 여든인데, 나도 죽고 나면 내 옷값이 좀 비싸지려나(웃음)….”
이영희가 한복으로 일으킨 지속적인 파격은, 그렇게 한복 안에서 시작됐지만 이미 한복을 넘어섰다. 한때 남과 북이,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위안부 할머니와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그녀의 한복으로 시름을 잊고 화평했다. 그것은 패션의 추구인 동시에, 한국인으로서의 뜨거운 오지랖! 그리하여 서양 테일러링에 기반을 둔 한국의 그 어떤 디자이너도 앞으로 이영희의 한복만큼 역동적이고 전위적인 패션사를 만들어내기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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