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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고추로는 스트레스 안 풀려…'맵게 더 맵게' 외식업계 불황기 '핵매운맛' 경쟁

Shawn Chase 2017. 6. 11. 13:04

이경민


입력 : 2017.06.11 10:00


지난 7일 직장인 김모(31·여)씨는 퇴근 직후 찾은 치킨집에서 청양 고추와 아바네로 고추를 듬뿍 넣은 치킨 한 마리와 맥주를 주문했다. 아바네로는 세계적으로도 맵기로 유명한 멕시코 고추다. 그는 요즘 일주일에 서너 번은 속이 뒤집힐 정도로 얼얼한 매운 치킨이나 떡볶이를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술로 스트레스 달래면 몸도 힘들고 다음날 업무에 지장을 주지만, 매운 음식은 가격도 싸고 뒤끝도 없어서 좋다”며 붉은 양념이 뚝뚝 흐르는 치킨 한 조각을 삼키고선 마치 몸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굽네치킨이 내놓은 매운맛 메뉴 '볼케이노'(왼쪽), 크리스피크림이 내놓은 매운맛 도넛 '매운 오리지널'/굽네치킨, 크리스피크림 제공



대한민국이 매운맛 열풍에 빠졌다. 그냥 적당히 매운맛이 아니라 혀끝에 닿으면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온몸이 마비돼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정도로 너도나도 매운맛을 탐닉한다. 소비자들 입맛 잡기 경쟁이 가장 치열한 치킨업계를 선두로 매운맛 메뉴가 앞다퉈 나오기 시작해 매운 만두와 매운 죽, 심지어 매운맛 도넛까지 출시돼 눈물 빼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불황에는 매운맛이 유행한다’는 속설이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본다. 매운맛이 뇌신경을 자극해 순간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가장 손쉬운 스트레스 해소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매운맛에 익숙해질수록 더 매운맛을 찾게 되기 때문에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분석한다.

청양 고추로는 성에 안 차…세계적 매운 고추로 ‘극단적 매운맛’ 경쟁

지난 1일 굽네치킨이 한정판 메뉴로 내놓은 ‘익스트림 볼케이노’는 세계 매운맛 지표인 ‘스코빌 지수(SHU·캡사이신 농도)’가 1만2288로 기존 자사 매운맛 치킨 메뉴인 ‘굽네 볼케이노’보다 2배 맵다. 국내 처음으로 매운맛 지표를 쓰기 시작한 삼양식품의 ‘핵불닭볶음면’(8706SHU)을 뛰어넘는다.

극단적인 매운맛이 대중적인 유행을 불러일으키기 전 매운맛 마니아층 사이에선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이 큰 인기였다. 아바네로 고추와 캡사이신(고추에서 추출된 화합물)을 듬뿍 넣은 볶음라면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도전해볼 만한 한국의 대표적인 매운맛’으로 떠올랐다. 덕분에 삼양식품은 올해 1분기 매출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50% 넘게 늘었다.

지난달에는 도넛 프랜차이즈 크리스피크림에서도 매운맛 도넛인 ‘매운 오리지널’을 출시했다. 청양 고추보다 매운 멕시코산 고추 할라피뇨를 잘게 썰어 넣은 도넛에 설탕물을 입힌 제품으로, 도넛·베이커리 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인 매운맛 상품이다. 이외 신세계푸드는 매운맛 만두인 ‘짬뽕군만두’를, 죽 프랜차이즈 본죽은 매콤한 ‘진품쇠고기 육개장죽’을 여름 한정판 메뉴로 내놨다.

“싸고 빠른 스트레스 해소법 찾는 불황기 풍경”

전문가들은 최근의 ‘매운맛 열풍’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보고 있다. 매운맛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그 강도가 지나치게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위장을 상하게 할 정도의 매운맛이 등장하는 것은 ‘위험 신호’라고 경고한다. 사람들이 혀를 자극하는 것 외에 달리 건전하게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매운맛으로 스트레스를 달래려는 것은 고통으로 고통을 분산시키려는 심리”라며 “매운맛은 맛이 아니라 통각(痛覺)인데, 매운 음식을 먹으면 일시적으로 혀의 고통을 느끼며 다른 고통을 상대적으로 잊게 된다”고 설명했다.

곽 교수는 “점점 더 매운 음식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보통 매운맛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스트레스 강도가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우려했다.

매운맛에 도전하는 것을 일종의 ‘미션’으로 여기고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에 매운 음식을 먹어치우는 영상을 공유하며 묘한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남장현 경북대 식품외식산업학과 교수는 “최근 들어 맛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가 다양해지면서 매운맛에 재미로 접근하는 매니아층도 생겼다”고 분석했다.

이어 남 교수는 “매운맛은 김치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식습관에 비교적 잘 맞고, 마니아층이 두텁게 형성돼 있기 때문에 매운맛 열풍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10/201706100154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