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이야기들

네가 누구든, 말과 피부와 고향이 얼마나 다르든

Shawn Chase 2016. 1. 26. 18:54

런던에서 활동하는 레바논 출신의 영국 가수 미카(MIKA).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대표적인 친한(親韓)파 아티스트로 손꼽히는 미카는 국내 팬들로부터 '김믹하'라는 한국식 애칭을 얻기도 했다.
천재적인 싱어송라이터로 사랑받는 미카가 이번엔 테러리스트에 맞서는 인간의 가장 강한 가치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 미카(MIKA)·유엔난민기구 서포터
  • 편집= 뉴스큐레이션팀

 

입력 : 2016.01.25 14:51 | 수정 : 2016.01.25 15:01

미카/조선DB.

나이가 들수록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가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질문이 되어가고 있다. "당신은 어느 나라 출신입니까?"

나는 특정 국가 출신이 아니다. 오늘날 내 삶은 나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 조부모와 친척, 가족들의 삶과 문화가 만들었다. 조부는 시리아인으로 당나귀 등에 전 재산을 싣고 다마스쿠스를 떠났다. 레바논인 조모는 16세에 베이루트 코니시 지역에서 수상스키를 타다가 당시 58세인 할아버지와 만났다. 내 영국인 조모는 지나칠 정도로 우아한 와스프(WASP·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로, 언변이 유창한 사바나 조지아 출신의 외교관과 결혼했다. 내 아버지는 이분의 아들이다. 예루살렘에서 낳아 카이로와 로마에서 키웠다.

나는 1983년 내전(內戰)이 한창이던 베이루트에서 태어났다. 내전 중 키프로스로 피신했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왔다. 파리 내 레바논 주민들 틈에서 자라면서 레바논 문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나는 프랑스 사립학교에 다니는 미국인 소년처럼 보였지만, 레바논인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집에 깔린 카펫부터 접시에 담긴 음식까지 모두 레바논 것이었다. 부모님의 친구들도 레바논인이었다.

나는 프랑스인의 발음과 연한 피부색을 가진 덕에 문화적 차이를 느끼지 않고 유년 시절을 보냈다. 전쟁과 파괴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좋지 않은 시기에 아버지가 출장을 떠났고, 우리 가족의 삶은 불안정해졌다. 사흘간의 쿠웨이트 출장길에 올랐던 아버지는 걸프전쟁에 휘말려 미국 대사관에 8개월간 인질로 잡혀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전쟁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경험했다. 분쟁 지역과 멀리 떨어져 산다는 것이 전쟁에 대한 공감을 막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두 개의 삶을 살고 있었다. 학교에서 나는 프랑스인이었지만, 집에서는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이때의 느낌을 잊어 본 적이 없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느낌이었다.

 

 

성인이 된 후 레바논인의 정체성을 잃은 적이 없다. 지난 2008년 7월, 나는 내전 당시 동베이루트와 서베이루트를 분리하는 무인 '녹색선 (Green Line)' 지역으로 알려진 순교자의 광장에서 첫 베이루트 콘서트를 열었다. 이후 나는 여러 차례 베이루트를 방문했고 나와 연관된 레바논, 그리고 전 세계 많은 사람이 그렇듯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먼발치에서 시리아 내전이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성탄절 사흘 전, 나는 시리아 난민의 어려움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유엔난민기구(UNHCR)와 함께 레바논에 다녀왔다. 레바논은 전쟁과 파괴의 공포로부터 피신한 110만 명의 시리아 난민을 품고 있었다. 이들을 도우려는 기구들의 노력, 어마어마한 규모의 난민 인구를 맞아 준 레바논 주민들의 수고를 상상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내 두 눈을 열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단순한 수치와 논쟁거리가 되기 십상인 난민의 위기를 내면화하고 싶었다. 거리를 좁혀야만 했다. 나는 무방비상태로 난민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고 느꼈다.

"반군끼리도 전투… 주민들 버틸 수 없어 탈출"
'중동의 파리' 베이루트 중심가에 사람 빼고 다 있다

방문을 마치고 몇 주가 지난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두 개의 단어는 '의지'와 '유연함'이다. 엄청난 위기에 대처하는 그들의 의지와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생존하기 위한 유연함을 봤다. 지나치게 딱딱하게 굳으면 폭력에 쉽게 부서진다. 공포를 이겨내는 방법은 이런 유연함뿐이다. 이와 같은 의지와 유연성의 결합이 인간의 가장 강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의지와 유연함이야말로 테러리스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인 동시에 너무도 많은 것을 잃은 난민들에게 희망과 안식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가치이다.

폭탄조끼 테러범 막다가 爆死한 젊은 아빠
레바논 '쓰레기 혁명' 폭풍전야

MIKA는 누구


미카는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영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1983년 8월 18일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Mica Penniman.
아버지는 미국인이고 어머니는 레바논인.  미카의 가족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내전이 격화되자 레바논을 떠나 파리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가 9살 때, 아버지가 인질이 되어 쿠웨이트의 미국 대사관에 감금되는 일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의 비호를 받게 된 미카 일가는 런던으로 이주했다.
런던에서 미카는 프랑스인 학교에 입학했지만 동급생들의 심한 따돌림에 난독증까지 겹쳐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교육기관에서는 그에게 맞는 새 학교를 찾을 때까지 그를 수업에서 격리시켰는데 이 기간 동안 미카는 러시아인 소프라노 오페라 가수에게 노래 지도를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학교를 졸업한 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나 하루 만에 그곳을 나와 명문음악학교인 왕립음악대학에 입학했다.

유럽의 '무서운 샛별' 미카

그의 화려한 무대매너 때문에 미카가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어왔다. 미디어에 대한 응답으로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내 성정체성과 관련된 말은 어떤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난 단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사람들은 내게 항상 묻는다. 하지만 난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카는 2012년 8월 미국의 한 동성애 잡지에서“게이라고 묻는다면...네 맞습니다”라며 “동성애를 암시하는 자작곡도 내 이야기가 맞다”고 말해 커밍아웃을 했다.

2004년 무렵부터 마이애미와 뉴욕을 거점으로 미국에서 라이브 활동을 하던 그는 2006년 첫 싱글인 ‘Relax’를 인터넷에 발표했다. 그리고 2007년 2월에 발매한 데뷔 앨범 'Life In Cartoon Motion'으로 영국을 비롯 유럽 각국에서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출처: http://www.mikasounds.com/bi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