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남녀심리

[아무튼, 주말] "제 모습이 불편했어요?… 전 다른 사람 상관없이 수경씨를 사랑하는데"

Shawn Chase 2019. 3. 6. 23:18

조선일보

  • 이기호·소설가

  • 입력 2019.03.02 03:00

    [누가 봐도 연애소설] 엇비슷한 것 같으나 모두가 다른 사랑


    이기호 소설가
    이기호·소설가


    책이 좀 많구나.

    민규는 이층 계단에서부터 거실까지 쭉 이어진 책장을 보면서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이삿짐센터에 맡기기도 어려웠겠지. 민규는 뒷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던 목장갑을 꺼냈다. 어림잡아도 만 권은 넘을 거 같았다. 교수님은 이 책을 다 읽었을까? 책이란 건 읽지 않고 그냥 갖고만 있어도 영향을 받는다고 하니까…. 민규는 이 책을 보관하고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함께 이삿짐 정리를 도우러 온 최윤혜 연구원과 박균수 연구원, 김규승 사원과 홍수경 사원의 생각은 좀 달랐다. 이삿짐의 주인인 김상민 교수가 '이거 제가 이러면 안 되는데…. 어쨌든 이렇게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면서 인사를 하자 그들 또한 너나없이 고개를 숙이며 '저희가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말을 했다. 하지만 그건 당연히 그저 말일 뿐이었다.

    최 연구원과 박 연구원은 팔짱을 낀 채 김 교수가 사라진 현관문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들은 한 지방자치단체 부속 연구소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역의 부동산이나 산업 현황, 문화 콘텐츠에 대한 조사와 컨설팅을 수행하는 연구소였는데, 업무 특성상 지역 대학교와 공동으로 수행하는 사업이 많았다. 사업이 많으면 많을수록 지자체에서 평가하는 연구소의 입지도 더 올라가는 법. 그 점에서 김상민 교수는 연구소엔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사업 파트너였다. 더구나 그는 연구소 소장의 실질적인 인사권을 쥐고 있는 현직 시장의 선거 캠프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소장이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건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이사 가신다고요? 아이, 그럼 당연히 저희가 도와야죠. 김 교수보다 소장이 먼저 나선 일이었다.

    김상민 교수가 부동산 중개업자와 잔금 문제로 자리를 뜨자, 다들 표정이 변했다.

    "미친 거 아니야?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이런 갑질을 하지?"

    "김 교수도 김 교수지만, 우리 소장이 더 문제죠. 연구원들이 무슨 개인 잡부도 아니고."

    [누가 봐도 연애소설] 엇비슷한 것 같으나 모두가 다른 사랑
    일러스트=박상훈


    "이건 책임을 꼭 물어야 할 거 같지 않아요?"

    김규승 사원이 그렇게 말하면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빈 박스 사진을 먼저 찍었다. 홍수경 사원은 그들 옆에 가만히 서 있다가 층계참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민규를 보았다. 민규는 노끈을 길게 잘라 책을 스무 권씩 들기 좋게 묶고 있었다.

    "이 연구원, 이 연구원, 거 뭐 하는 거야? 잠깐만 있어 봐."

    박균수 연구원이 민규를 말리고 나섰다. 민규는 잠깐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하던 일에 열중했다.

    "이 연구원은 수치스럽지도 않아? 이게 그냥 시킨다고 아무 생각 없이 할 일은 아니잖아."

    최 연구원의 목소리는 마치 민규를 타박하는 듯한 말투로 변해 있었다.

    민규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목장갑을 낀 상태였다.

    "다들 도와드린다고 해서 온 거 아닌가요?"

    "아니 그게 어디 진심인가? 할 수 없이 온 거지, 할 수 없이."

    "그럼 소장님한테 미리 말씀하셨어야죠? 교수님한테도 한다고 하셨으면서…."

    민규가 계속 말을 받자 박균수 연구원이 벌컥 화를 냈다.

    "우리가 이삿짐까지 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왔겠어! 그냥 인부들 감독하고 눈도장이나 찍으러 온 거지! 우리 연구원이잖아!"

    민규는 가만히 박 연구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뒤돌아서서 층계참으로 올라갔다.

    "저는 오늘 연구원으로 온 게 아니니까요."

    사람들은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민규를 바라보았지만, 홍수경 사원만은 난처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실 쪽으로 돌렸다. 사실 그녀는 한 달 전부터 연구소 사람들 몰래 민규와 정식으로 사귀고 있었다. 민규는 둘 사이의 연애를 연구소 사람들이 알아도 상관없다고 말했으나, 홍수경 사원이 반대했다. 그녀는 삼 개월 뒤 재계약 사인을 앞둔 계약직 직원이었다. 연구원과 사귄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 아무래도 부담이 될 것 같았다. 민규에게 사귀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것도 그녀였다. 좀 독특하고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했는데, 오늘 민규의 모습은 좀 다르게 다가왔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 아닐까? 행동과는 다르게 사실 윗사람들 심기를 지나치게 염려하는 사람은 아닐까?

    한 시간 가까이 민규가 책을 싸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연구소 사람들은, 그러나 김 교수가 일군의 포장이사 직원들과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그제야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포장이사 직원들은 능숙하게 박스에 책과 옷가지를 담았는데, 민규 또한 그들 옆에서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김 교수는 박 연구원과 최 연구원과 함께 거실 소파 옆에 서서 테이크아웃으로 사온 커피를 마시면서 이삿짐을 싸는 것을 구경했다. 그들은 얼마 전 리서치를 시작한 구도심 주민들의 거주 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김규승 사원과 홍수경 사원의 커피는 없었다. 김규승 사원과 홍수경 사원은 민규와 함께 책을 쌌다.

    이사는 주위가 어둑해진 뒤에야 끝났다. 모두 뿔뿔이 흩어진 후 민규는 홍수경 사원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아까 좀 그랬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뭐가요?"

    "최 연구원님하고 박 연구원님이 안 좋게 볼 거 같아서요. 민규씨가 연구원 중에선 막 내인데…."

    민규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경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네?"

    "수경씨도 제 모습이 불편했어요?"

    "저야…. 민규씨가 걱정되어서…."

    "수경씨."

    민규가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저는 개인적으로 수경씨를 사랑해요. 다른 사람 상관없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민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01/201903010168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