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남녀심리

[friday] 하필 '녹색어머니' 봉사때 마주친 그녀

Shawn Chase 2019. 3. 6. 23:17

조선일보

  • 이기호·소설가


  • 입력 2018.07.06 03:01

    [삶의 한가운데]

    [누가 봐도 연애소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누가 봐도 연애소설]
    일러스트=박상훈


    길 건너편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 그녀는 굳은 듯 성오씨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분명, 그녀 역시 성오씨를 알아본 게 틀림없었다. 성오씨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아침부터, 이 무슨 운명의 가혹한 페널티킥이란 말인가. 성오씨는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 둘, 아이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 성오씨는 아내와 작은 말다툼을 했다. 초등학교 사거리 앞 녹색어머니회 봉사 문제 때문이었다.

    "녹색어머니회라고, 녹색아버지회가 아니고! 지난번에도 내가 얼마나 쪽 팔린 줄 알아? 지나가는 아주머니들마다 킥킥거리면서 웃질 않나…."

    10개월 전, 다니던 회사를 퇴직한 성오씨는 그때부터 개인병원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아내를 대신해 초등학교 3학년, 1학년 남매의 육아를 전담했다. 말 그대로 '독박 육아'인 셈. 방과 후 과정이 모두 끝나고 오후 3시 무렵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에게 핫도그나 만두 같은 것을 챙겨 먹인 후, 다시 영어 학원과 피아노 학원 버스를 태워 보내는 것, 중간 중간 집 청소와 빨래를 하고, 마트에서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고, 저녁 설거지를 하면서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받아쓰기 급수장을 불러주고, 마지막으로 같은 침대에 누워 책을 읽어주다가 아이와 함께 스르르 잠드는 삶, 그것이 성오씨의 일과였다. 성오씨는 그런 삶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빨래를 개키면서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면서 '건조기야, 건조기야, 네가 아무리 좋다고 소문나 봐라, 내가 그거 사나? 그 돈 있으면서 국물 떡볶이나 하나 더 사먹을 테다' 흥얼거리기도 했다. 어? 의외로 적성에 맞네. 성오씨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녹색어머니회만큼은 사정이 좀 달랐다. 한 학기에 한 번씩 초등학교 사거리에 녹색 조끼를 입고 나가 아이들이 안전하게 횡단보도를 건너도록 돕는 그 봉사활동은, 성오씨가 하기엔 좀 쑥스러운 데가 있었다(아이가 두 명인 성오씨는 이미 한 번 그 일을 경험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큰아이가 말하기를 '자신이 지금까지 오랜 기간 학교에 다녔지만 엄마가 아닌 아빠가 나온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실제로 녹색어머니회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성오씨 옆에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서서 계속 같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아저씨는 왜 출근을 안 해요?' '아저씨가 엄마예요?' 아이는 녹색불이 켜졌는데도 건너지 않았고, 급기야 성오씨 옆에 쪼그려 앉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아, 그래. 아저씨는 직장도 없고 출근도 안 한단다, 그러니 제발 횡단보도 좀 건너 줄래? 성오씨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트라우마 때문에 아내에게 대신, 병원에 사정 좀 말하고 한 번만 녹색어머니회 나가 달라고 부탁했지만…돌아온 답변은 이런 것이었다.

    "그냥 모자 쓰고 마스크하고 나가. 당신 요새 얼핏 보면 아줌마처럼 보여."

    그렇게 다시 나간 횡단보도 앞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었다. 본래 녹색어머니회는 2인 1조로 횡단보도 이쪽과 저쪽에 한 명씩 배치되는데, 성오씨 반대편에 그녀가 서 있었다. 대학교 3학년 2학기 때 만나 이듬해 2월에 헤어진 그녀, 졸업할 무렵 법대에 다니는 남자와 사귄다는 소문을 들은 그녀, 성오씨가 몇 번 수유리 집 앞까지 찾아가 울면서 매달렸던 그녀, 그녀, 최민아…. 그녀를 십수 년이 지난 아침,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친 것이었다. 아이 씨, 남들은 공항에서, 파리에서, 하다못해 극장 같은 곳에서 우연히 재회한다던데…나는 왜 녹색어머니회에서 옛 애인과 마주친단 말인가. 성오씨는 그런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다. 아내 말처럼 그냥 마스크라도 하고 나올걸…홧김에 뛰쳐나오는 바람에 머리도 감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런 성오씨의 원망과 후회와는 상관없이 아이들은 계속 횡단보도 앞으로 몰려들었다. 8시 20분, 등교 피크 타임이었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뀔 때마다 성오씨가 깃발로 도로의 차들을 막아주어야 했지만…성오씨는 자주 신호를 놓쳤다.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반대편 그녀 역시 마찬가지인 거 같았다. 아이들은 성오씨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횡단보도를 건넜다. 지난번, 성오씨에게 출근 안 하느냐고 묻던 아이가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슬퍼요? 슬퍼서 출근 안 하는 거예요?"

    등교시간이 모두 끝난 후, 성오씨는 입고 있던 녹색 조끼와 깃발을 학교 교문 옆 경비실에 반납했다. 거기에는 그날 아침 봉사했던 다섯 명의 학부모가 모여 있었다. 녹색어머니회 활동 일지에 아이들 반과 이름, 학부모 이름을 적고 서명까지 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성오씨는 그녀, 최민아의 딸이 자신의 3학년 아들 바로 옆 반인 것을 알게 되었다.

    "저기요."

    활동 일지를 적고 있는 성오씨를 등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돌아보니 봉사활동을 나온 어머니 중 한 명이었다. 최민아는 그 옆에 계속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민성이 아빠 되시죠? 우린 요 앞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할 생각인데, 같이 가실래요?"

    성오씨는 잠깐 망설였다. 가고 싶다는 마음과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서로 싸웠다. 그는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거기 가면…정말로 옛 애인과 오랜만에 만나 건조기에 대해서만 말할 것 같았다. 성오씨는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오씨는 편의점에 들러 국물 떡볶이를 하나 샀다. 아이들이 모두 등교한 거리는 놀랄 만큼 조용했고 또 한산했다. 그 길을 성오씨는 터덜터덜 걸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성오씨는 느닷없이 옛 노래가 떠올랐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녹색어머회가 되어서 다시 만났 다. 성오씨는 그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해졌다. 성오씨는 국물 떡볶이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든 손으로 코를 훔쳤다. 에이 씨, 국물 떡볶이나 해 먹어야지….

    아침 9시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05/201807050191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