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남녀심리

[아무튼, 주말] "너희 사귀니?" 한마디에 그만… 저놈의 발연기, 내가 못살아

Shawn Chase 2019. 3. 6. 23:14


조선일보

  • 이기호·소설가·2018 동인문학상 수상자



  • 입력 2019.01.26 03:00

    [누가 봐도 연애소설] 社內 비밀연애 들통기


    [누가 봐도 연애소설]
    일러스트= 박상훈


    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사내 연애가 시작되면, 더욱이 그 연애가 은밀한 경우라면, 그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연기력이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고, 대학교 2년 선배인 지은 언니가 해준 말인데, 그녀는 비밀 사내 연애만 3년을 해오다가(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재작년 말 결혼까지 해서 회사 동료 모두를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은 당사자이기도 하다.

    "야, 말도 마. 나중엔 이이가 지금 연기를 하는 건지 진심을 말하는 건지 나도 헛갈릴 정도였다니까. 이건 그냥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급 연기였다니까."

    신혼 집들이에 갔을 때 지은 언니는 형부의 어깨를 치면서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지은 언니보다 직급이 높은 형부가 다른 직원들 앞에서 괜스레 통박을 주고 꼬투리를 잡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시 언니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비아냥대는 연기를 실감 나게(언니의 표현대로라면 '거의 일일 연속극 찍는 수준'으로) 한 결과, 나중엔 극장에서 우연히 둘을 맞부닥뜨린 바로 옆 부서 과장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와, 이 영화가 인기가 있긴 있나 봐요. 우리 셋이 이렇게 우연히 만나기도 하고."

    나에겐 그런 지은 언니의 말이 그저 단순한 무용담처럼 들리지만은 않았는데, 나 역시 2개월 전부터 사내 비밀 연애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같은 부서 신입사원인 김규훈 사원. 김규훈 사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제 입사한 지 1년이 막 지난, 누가 봐도 아직은 사회 초년생티가 팍팍 나는 27세 청년이었다. 키는 170㎝를 간신히 넘을 만큼 크지 않았고, 몸무게는 80㎏에 육박해 어쩐지 더 퉁퉁해 보이는 체형이었다. 인사성 좋고 요령 부리지 않는 성격이야 신입사원 대부분 그러니 유별나 보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나만 보면 함박웃음을 짓고 이것저것 더 챙겨주려는 모습을 보였다(그는 내가 복사하는 꼴을 못 볼 만큼 부담스럽게 굴기도 했다). 그때마다 '저게 왜 저러나? 아서라, 내가 집에 돌아가면 너만 한 동생이 있다. 어디 나이도 두 살 어리고 직급도 낮은 게 함부로 애교를 부리나?'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런데도, 어이없게도, 자꾸 눈이 갔다. 내가 솔로 생활이 너무 길었나? 사무실 자리 배치가 잘못 됐나? 자꾸 쓸데없는 환경 탓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가 다른 여자 직원과 농담을 하는 모습을 보면 은근슬쩍 부아가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그런 날들이 3개월 넘게 지속되다가 김 부장이 퇴근 무렵 제안한 번개 모임에 어쩌다 김규훈 사원과 나 단둘이 남게 되고(김 부장, 이 인간은 자기가 번개를 제안하고 오는 사람이 별로다 싶으면 소리 소문 없이 내빼는 게 특기다), 맥주 몇 잔에 벌겋게 달아올라 에라, 모르겠다, 김규훈씨, 너 마음에 든다, 내뱉고 말았는데 그게 우리 둘의 시작이 되고 말았다.

    막상 연애를 시작하고 나니 전에 없이 애사심(?)도 생기고, 맛집 리스트도 챙겨 보고 데이트 코스 같은 것도 심상치 않은 눈길로 살피면서 마치 하루하루 대학 신입생이 된 듯한 기분으로 지냈는데, 그럼에도 계속 걸리는 것이 사무실 내에서의 표정 관리였다. 주로 중국과 동남아 국가를 대상으로 의료기 수출입을 하는 우리 회사는, 사내 연애를 금기시하거나 남녀차별이 노골적으로 존재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몇몇 친한 동료에게만이라도 말을 할까, 생각했지만 그게 또 쉽지가 않았다. 사내 연애를 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무슨 회사 내 규정 때문에 비밀에 부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말하자면 '쪽팔리고' 무안해서, 그래서 스스로 조심하는 것뿐이다. 가뜩이나 나 같은 경우,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 꾀었다는 질타 아닌 질타를 받을 게 뻔했다. 또 그러다가 깨지기라도 하면…. 나는 이런 내 마음을 에둘러 김규훈 사원(한동안 이 호칭이 입에 붙어서 잘 고쳐지지가 않았다)에게 말했고, 그 또한 그런 내 의견에 쉽게 수긍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그때부터 그의 발연기의 향연이 시작된 것이었다.

    돌아보면 지금도 참 환장하겠는 것이 아니 왜 멀쩡히 잘 있다가 퇴근 시간만 되면 쭈뼛쭈뼛 내 자리 앞까지 와서 '민 대리님, 퇴근 안 하십니까? 하하하, 이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같은 대사를, 마치 무슨 한국말을 처음 배운 재미교포처럼 내뱉은 것인지, 나로서도 도통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로 인해 사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나와 김규훈 사원에게로 향하고, 김 부장은 '쟤가 왜 저러는 거야? 민 대리가 쟤 괴롭혀?' 큰 소리로 묻기까지 했다(그 와중에도 김규훈 사원은 계속 부장을 바라보며 어색한 얼굴로 하하하, 웃기만 했다). 그 난리를 몇 차례 겪고 내가 또 따로 지도해서, 이제는 메신저나 문자로 은밀하게 서로의 퇴근 시간 여부를 확인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른 동료와 함께 점심을 먹거나 회식을 할 때 하하하, 뻣뻣하게 웃으면서 나를 보는 버릇은 여전했다.

    그러던 그의 발연기가 최고조에 오른 것은 지난주 부장에게 월차를 냈을 때였다(물론 월차를 함께 내고 전주까지 데이트하러 갈 예정이었다). 서로 우연히 월차 날짜가 겹친 것처럼,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할 작정이었다(나는 이사 갈 방을 알아보러 간다고 둘러댈 예정이었고, 그는 물리치료를 받으러 간다고 할 계획이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부장이 책상에서 고개도 들지 않은 상태로 오케이를 받아냈지만, 문제는 김규훈 사원이었다.

    "하하하, 이게 참. 제가 이사 가려고 급히 물리치료실을 알아봐야 할 일이 생겼거든요. 하하하."

    이 사람아, 그게 말이야, 방귀야…. 말하자면 김규훈 사원이 대사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만 것이었다. 그러자, 부장이 뚱한 얼굴로 한 말.

    "너희 사귀니?"

    그러면 순발력을 발휘해서 말이 헛나왔다거나,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잡아떼기라도 하면 좋았을걸. 우리 사랑스러운 김규훈 사원은 부장을 보면서 계속 '하하하' 웃다가 이내 풀죽은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나는 황급히 부장의 눈길을 피해 파티션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내가 못 산다, 못 살아. 저놈의 발연기.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25/20190125018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