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치

이병호 前 국정원장의 항변 이병호를 체포해 “공화국으로 넘겨라”고 한 北, 이유는?

Shawn Chase 2018. 9. 27. 20:04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이병호의 증언 통해 재확인한 《월간조선》의 ‘김정은 암살 시도’ 특종 보도!

⊙ 北이 가장 경계한 국정원장 “이병호를 지체 없이 체포하여 공화국으로 넘겨야”
‌⊙ “기조실장이 靑과 유일한 소통 채널… 거기(특활비)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 “(특활비에 관한) 보고 당시 낌새 알아차렸다면 1원도 지원하지 않았을 것”
⊙ 국정원의 ‘정치 간여’ 여부에 대해 “나는 절대 그런 짓 안 해”
‌⊙ “역대 정보기관장은 대통령의 측근… 이병호는 유일하게 대통령과 정치적 인연 없어”
‌⊙ 재임 중 北의 電子 전문가 탈북시켜… “北 떠나면서 모든 정보 가져와”
⊙ 옥중서 쇠약해진 심신, 부인은 가족력 때문에 ‘치매’ 걸릴까 걱정
‌⊙ 南과 北 ‘라스트 배틀’의 대한민국 지휘탑 이병호, 대한민국은 그를 어떻게 대하고 있나?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상납 혐의 등으로 구속 수감 중인 이병호 전 국가정보원장이 재임 시절 북한 내부의 김정은 저항집단을 지원하고,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전자(電子) 전문가를 탈북시켰다고 증언했다.
 
  《월간조선》이 단독 입수한 이병호 전 국정원장의 ‘항소이유서’ ‘항소이유보충서’ ‘보석청구의 이유보충서’엔 이병호 전 원장 재임 시절, 국정원이 수행했던 대북(對北) 공작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문건에서 이병호 전 원장은 “김정은 독재에 반발하는 기류가 생겼다. 국정원이 그를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건 당연하다”면서 “자생적인 저항집단에 돈을 주고 여건도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다.
 
  이 증언은 《월간조선》 2018년 6월호가 보도한 ‘박근혜 국정원, 김정은 암살하려는 북한 내 혁명조직 존재 파악하고 지원했다’는 제하의 기사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당시 기사를 쓴 최우석 기자는 국가정보원이 “북한 내부에 혁명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들이 구체적인 김정은 암살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고 특종 보도했었다. 이병호 전 원장은 또 “북한의 전자 전문가를 탈북시켰다. 북한을 떠나면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왔다”고도 했다. 이는 국내 언론엔 처음 공개되는 내용이다.
 
  문제가 된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의혹에 대해선 무죄를 주장했다. 이병호 전 원장은 “원래 기밀이 유지되는 정보 예산은 개인 적인 횡령이 아닌 한 어느 나라나 국익을 위해 사법처리 대상에서 제외시킨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보 예산을 법의 잣대로 재려고 하니까 국정원장인 내가 회계 관계 직원이라야 성립하는 국고 손실죄의 범인이 되어 버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특활비에 관한) 보고 당시 낌새를 알아차렸다면 1원도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전 원장은 특활비 상납의 중심엔 당시 국정원 기조실장 이모씨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밖에 국정원의 ‘정치 간여’ 여부에 대해선 “나는 절대 그런 짓 안 한다”며 자신의 결백을 재차 강조했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이병호 전 국정원장의 ‘항소이유서’ ‘항소이유보충서’ ‘보석청구 이유보충서’.
  “짐승 우리 같은 좁은 감방 안에서 울분이 가득 찬 채 있는 거죠. 이 안에 있으니까 시간이 영원(永遠)인 것 같아. 하루가 얼마나 긴지 모르겠어.”
 
  박근혜 정부 마지막 국가정보원장으로, 문재인 정부 들어 특수활동비 상납 혐의로 구속수감 중인 이병호(78)씨가 자신의 변호인에게 한 말이다.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던 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지난 6월 15일 1심에서 국고(國庫) 손실 등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 됐다. 이병호 전 원장 측은 즉각 항소했고, 지난 8월 3일 서울고법 형사3부(부장판사 조영철)에 보석을 청구한 상태다.
 
  최근 《월간조선》은 이병호 전 국정원장 변호인 측이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서’와 ‘항소이유보충서’ ‘보석청구의 이유보충서’를 입수했다. 이 전 원장의 분노가 서려 있는 듯한 이 말은 이병호 전 원장 변호인이 작성한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인용한 것이다.
 
  ‘항소이유서’란 피고인 측이 확정되지 않은 법원의 판결에 대해 불복 신청하는 ‘항소’를 제기할 때, 양형부당(量刑不當) 등의 사유를 기재한 문서를 말한다. ‘항소이유보충서’는 항소이유서를 재판부에 제출한 후 추가적으로 보충할 사안을 명기한 문서이다. ‘보석청구의 이유보충서’ 역시 재판부에 보석을 청구한 뒤 보석 사유에 관한 추가적인 입장을 담은 것이다. 이 세 종류의 문건을 통해 사건을 대하는 피고인(이병호 전 국정원장)과 변호인의 인식과 시각, 그리고 재판에 임하는 피고 측의 논리를 엿볼 수 있다.
 
  지난 7월과 8월 변호인은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이병호 전 원장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청취한 뒤 이 문건을 작성했다. 이 전 원장은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청와대로 건너간 배경 ▲논란이 된 국정원 정치 개입설에 대한 반박 ▲북한 체제의 잔인성과 재임 중 벌인 대북(對北) 공작 등을 비교적 소상히 털어놨다. 때로는 감정에 북받치는 듯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월간조선》은 이를 정리해 독자들에게 최초로 공개한다.
 
 
  “남과 북 양쪽에서 죄인인 존재”
 
2015년 3월 18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병호 신임 국정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항소이유보충서’는 이병호 전 원장을 “지금 북과 남 양쪽에서 죄인이 되어 극단적으로 쫓기는 노인이 있습니다”라며 “나이 팔십이 얼마 남지 않은 이병호라는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했다. 이어지는 내용이다.
 
  “얼마 전 북한의 김정은은 〈조선중앙통신〉과 〈조선중앙방송〉 등 관영매체를 총동원하여 성명을 냈습니다. 김정은은 ‘남(南)의 국가정보원장 이병호가 북에 침투시킨 수뇌부를 노린 테러범 일당을 체포해 진면목을 낱낱이 파헤쳤다’면서 ‘남측은 국정원장 이병호를 지체 없이 체포하여 우리 공화국으로 넘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변호인은 “이병호라는 인물은 북한의 테러 납치의 대상이 됐다”며 “동시에 남쪽에서 이병호는 구속이 됐다. 그는 남과 북 양쪽에서 죄인인 존재가 됐다”고 기술했다. 이병호 전 원장을 ‘북으로 넘기라’는 이 비난 성명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지난해 5월 12일 나온 것이다.
 
  이처럼 이병호 전 원장은 북한 정권이 가장 경계하는 국정원장이었다. 2015년 3월 21일, 그가 국정원장에 임명되자마자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명의로 ‘시작부터 독기를 뿜어대는가’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조평통은 “괴뢰정보원 원장 이병호가 ‘일부 북 추종 세력이 우리 사회를 폭력적으로 위협하고 있다’느니 ‘눈을 부릅뜨고 정세를 살피고 대책을 강구하겠다’느니 뭐니 하며 독기를 뿜어댔다”며 “이것은 남조선을 파쇼독재의 난무장으로 만들려는 노골적인 속심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 닷새 전인 3월 16일 이병호 원장은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일부 북한 추종 세력의 행태가 우리 사회를 폭력적으로 위협하는 상황마저 나타나고 있다”면서 “눈을 부릅뜨고 정세를 살피고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국정원의 임무가 더욱 막중해지고 있다”고 말했었다.
 
 
  대통령과 국정원은 ‘안보 공동체’… “(특활비 지원이) 불법인지 의문”
 
이병호 전 국정원장이 번역한 《기드온의 스파이》.
  이병호 전 원장은 1963년 육군사관학교(18기)를 졸업, 7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한 후 1970년 중앙정보부에 입부(入部)했다. 그는 정보부에서 해외공작 분야의 계장, 과장, 부국장, 국장을 지냈고, 주미 한국 대사관에 파견돼 정보관 임무를 수행했다. 1993년 중앙정보부의 후신(後身)인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해외담당 차장에 임명됐다가 1996년 안기부를 퇴직했고 주(駐)말레이시아 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대한 논픽션을 번역해 《기드온의 스파이》란 책을 발간하기도 했었다. 이 때문에 정보기관 업무에 전문성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박근혜 청와대’에 전달했다는 ‘국고 손실’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전 원장의 특활비 관련 진술을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옮겨본다.
 
  “검찰은 대통령의 국정원 자금 지원 요청을 위법이라고 보면서 그 지시를 거부하지 않고 자금 지원을 한 국정원장의 행위가 불법이라고 봤어요. 저는 여기서 대통령과 국정원 간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대통령과 국정원이 독립된 정부부처 간의 관계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상호 긴밀하게 작동되는 특별한 안보 공동체 관계로 볼 것인가죠.”
 
  이병호 전 원장은 ▲‘국정원법’을 근거로 국정원은 ‘대통령 소속’으로 돼 있고 ▲‘정부조직법’상 대통령의 국가보위의 헌법적 의무를 보좌하기 위해 국정원을 두도록 돼 있다고 전제했다. 그는 대통령이 국정원 기조실장 임명 등 국정원 인사에 간여하고, 국정원 회계감사 결과를 보고받는다는 점을 들어 “대통령과 국정원의 관계는 일반 정부부처 간의 관계라고 볼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어 “대법원과 법원행정처보다도 더 긴밀한 안보 공동체인데 그 수장(首長·대통령-기자 주)이 자금을 요청하는 게 불법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 전 원장의 말이다.
 
  “1심 판결을 보면 대통령의 지시를 불법으로 전제하고, 국정원장인 제가 그걸 거부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대통령이 독대(獨對)를 할 때 직접 자금 지원을 요청하셨어요. 그리고 전화로도 얘기한 적이 있고. 그런 지시를 받았을 때 저는 그 지시를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불법이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었고요.”
 
 
  특활비가 청와대로 건너간 배경
 
  이 전 원장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청와대에 전달된 배경을 살필 필요가 있다. ‘항소이유서’에 따르면, 2016년 5월경 박근혜 대통령은 “그간 국정원에서 지원한 자금이 있지 않습니까. 그거 계속 지원해 주세요”라고 이병호 원장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이때 국정원 기조실장 이○○은(는) 이미 특별사업비(특수활동비 중 국정원장이 쓸 수 있는 돈-기자 주)의 청와대 지원이 전임 국정원장 시절부터 관례상 있어 왔던 것이라고 이병호 원장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병호 원장은 기조실장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다. 이 전 원장이 기조실장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는, 그 돈이 대통령의 국정 수행을 위해 쓰일 것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용도는 알 수 없었고, 대통령에게 물어볼 수 있는 사항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항소이유보충서’에 적힌 이 전 원장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2015년 3월 국정원장으로 부임했는데 청와대 자금 지원은 이미 계속되어 왔고 행정적으로 정례화되어 있는 상황이더군요. 갓 부임한 제 입장에서는 기존의 지원 구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입장이었죠. 그걸 변경시켜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었어요. 그래서 그동안 해오던 대로 기조실장 이○○(이)가 알아서 지원하는 시스템이었어요.”
 
  그는 특활비 등과 관련해 “기조실장 이○○(이)가 책임자로 청와대와 유일한 소통 채널이었다”면서 “나는 거기에 대해 일절 관여하지 않고 이따금씩 기조실장 이○○한테서 간단히 전화보고를 받는 수동적인 자세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 문제(특별사업비 지원-기자 주)는 루틴(routine·정기적)하게 이루어지는 행정적 사안이고 주변적인 일 정도로만 치부했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청와대로 전달한 돈은 정무수석실이 실시한 여당(당시 새누리당)의 여론조사 비용으로 쓰인 것으로 검찰수사 결과 드러났다. ‘항소이유보충서’를 인용하면, 당시 국정원 기조실장은 이병호 원장에게 ‘국정 운영에 관련된 여론조사 비용을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의 보고를 했다고 한다. 즉 ‘정무수석실에서 의뢰한 여론조사 기관에 대한 채무변제’를 위해 돈을 지원해야 한다고 보고했을 뿐, 특정 정당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는 것이다.
 
 
  “기조실장이 특정 정당의 여론조사 비용이라고 보고한 적 없다”
 
  이 전 원장은 “기조실장이 특정 정당의 여론조사 비용이라고 내게 보고한 적이 없다”면서 “그런데 내가 여당의 여론조사 비용을 지원한 것처럼 검찰조사에서 진술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순수 정보기관을 만들자는 게 나의 의지였는데, 만약에 보고 당시 그런 낌새를 알아차렸다면 단돈 1원도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내 속마음을 누가 알아주겠나”라고 분개했다. 그의 진술로 미뤄보아 이 전 원장은 기조실장의 보고를 액면 그대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1심 재판부는 국정원장을 실질적으로 회계 관계 업무를 처리하는 지위에 있어 ‘회계 사무를 처리하는 자’로 봤다. 이를 근거로 ‘정보기관의 책임자인 국정원장이 대통령의 요구·지시를 받았다는 사유로 그러한 자금 지급이 과연 적법한지에 대한 최소한의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정원 예산을 함부로 대통령에게 전달하여 지속적으로 국고를 손실했다’는 취지의 판단을 했다.
 
  이와 관련해 이 전 원장 변호인은 “국정원의 경우는 차관급인 기조실장이 예산 회계의 책임자로 되어 있고 국정원장은 보고받는 결재권자”라며 “국가정보원장을 회계 관계원으로 보는 것은 결론을 정해놓고 무리하게 꿰어맞춘 법률 해석”이라고 반박했다. 또 이병호 원장의 정치 불개입 원칙을 잘 아는 기조실장이 “허위보고를 했다”고도 주장했다.
 
  이병호 전 원장도 “원래 기밀이 유지되는 정보 예산은 개인적인 횡령이 아닌 한 어느 나라나 국익을 위해 사법처리 대상에서 제외시킨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런 정보 예산을 법의 잣대로 재려고 하니까 국정원장인 내가 회계 관계 직원이라야 성립하는 국고손실죄의 범인이 되어 버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8월 21일 서울고등법원 312호 법정에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이 전 원장은 자신의 무죄를 거듭 강조하며 “제도화된 특활비의 지원을 거부하지 않았다고 그걸 죄라고 하는데 그건 현실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지는 그의 지적이다.
 
  “제가 아니라 누가 국정원장이 돼도 범죄자가 되는 상황이었다면 이건 근본적인 제도의 문제입니다. 역대 국정원의 특활비 지원을 적폐라고 한다면 그걸 세 명(이병호·이병기·남재준-기자 주)의 국정원장 개인이 책임을 지는 게 법에 맞는지 의문입니다. 대체 법적 정의가 뭡니까? 법리에 의해 억울한 사람이 생기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석 신청과 관련해서 구차스럽게 나이가 많은 걸 가지고 말씀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법에도 사람에 대한 연민(憐憫)의 정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치 간여 여부’ 묻자 “나는 절대 그런 짓 안 해요”
 
이병호 원장(맨 오른쪽)을 비롯한 박근혜 정부 국정원장 세 명은 현재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왼쪽부터 남재준, 이병기 전 국정원장. 사진=조선DB
  일각에서는 국정원이 ‘정치에 간여했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변호인이 ‘국정원의 정치 간여 여부’에 대해 묻자 이 전 원장은 “나는 절대 그런 짓 안 해요”라고 단언했다. 이 전 원장은 국정원장 재임 시절의 일화 한 토막을 얘기했다. 국회에 파견된 국정원 요원이 수시로 국회의장이나 의원들의 동향을 보고한 사실을 알고, “당장 그 직원을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항소이유보충서’에 기재된 이병호 전 원장의 말이다.
 
  “70이 넘은 나이라는 건 국정원장직을 끝낸 후에 다른 야망이 있을 나이가 아니죠. 저는 정보조직에서 뼈가 자란 사람이에요. 국정원 안에서 수없는 연설을 통해 우리가 순수 정보기관으로 다시 태어나야 국민 사이에 뿌리내릴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국정원 직원들도 겉으로는 명령에 복종하지만 속으로는 정치공작이나 그런 걸 싫어해요.”
 
  실제로 이 전 원장은 ‘정치 불개입’ 원칙을 지속적으로 피력해 왔었다. 그는 2015년 국회 인사청문회 모두 발언에서 “정치 개입은 국정원을 망치는 길”이라며 “국정원이 망가지면 국가 안보가 흔들린다. 저는 결코 역사적 범죄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난 직후인 2016년 11월 국회 정보위원회에서도 그의 이러한 원칙은 재확인된다. 이 전 원장은 “국정원을 정치에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작년 1월 신년사에서도 “앞으로 있을 대선 정국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국정원을 뒤흔드는 시험대가 될 수 있다”면서 “우리를 정치에 끌어들이려는 유혹에 절대 빠지지 않겠다는 윤리의식과 프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그가 정치와 거리를 둘 수 있었던 데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정치적 인연이 없는 상태에서 국정원장에 발탁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전 원장의 ‘항소이유보충서’에 따르면, 그가 퇴직을 한 후 15년간 쉬고 있던 어느 날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국정원장을 하지 않겠느냐’고 전화가 왔다고 한다. 전임(前任) 국정원장 이병기씨와 전전임(前前任) 국정원장 남재준씨와 달리 이 전 원장은 박 전 대통령과 개인적인 인연이 없었다. 변호인도 “역대 정보기관장은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이 그 자리를 맡았다”며 “이병호는 유일하게 대통령과 정치적 인연이 없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발족한 국정원 적폐청산위원회가 국정원 메인 서버를 비롯한 기밀문건, 수백여 명에 달하는 원(院) 간부들을 샅샅이 조사했지만, 이 전 원장의 정치 개입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병호 원장의 증언 통해 확인한 《월간조선》 특종: “(북한의) 저항집단에 돈 주고 여건도 만들어 주었는데…”
 
《월간조선》 2018년 6월호는 이병호 원장 체제 국정원이 “북한 내부에 혁명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들이 구체적인 김정은 암살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고 특종 보도(사진)한 바 있다. 이번 이병호 전 원장의 증언을 통해 이 보도는 사실임이 입증됐다.
  이병호 원장 관련 문건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북한 김정은 정권과 관련된 것이었다. 변호인이 ‘김정은이 이병호라는 이름을 대면서 북으로 꼭 넘겨달라고 했는데 왜 김정은의 공격 대상이 됐냐’고 묻자 이 전 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그건 비밀이기 때문에 제가 전모(全貌)를 말할 수는 없어요. 정보기관은 수동적으로 방어를 하는 군대와는 달라요.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남북의 정보전에서 북한을 뒤흔들고 압박해야 하는 겁니다…. 북한 내부에서도 자유사회의 문화나 정보가 들어가면서 주민들이 달라졌어요. 김정은 독재에 반발하는 기류가 생긴 거죠. 국정원이 그를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건 당연합니다. 자생적인 그런 저항집단에 돈을 주고 여건도 만들어 주었는데 그런 시도가 중간에서 발각되는 바람에 제가 북의 최고 존엄의 생명을 해치려는 테러리스트가 되고 김정은이 저를 지구 끝까지 따라가서 죽이겠다고 한 거죠.”
 
  《월간조선》은 2018년 6월호 ‘박근혜 국정원, 김정은 암살하려는 북한 내 혁명조직 존재 파악하고 지원했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국가정보원이 “북한 내부에 혁명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들이 구체적인 김정은 암살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고 특종 보도한 바 있다. 이 기사를 쓴 최우석 기자는 박근혜 정부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이 정도의 내용은 국정원장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한다”며 “다만 당시 상황을 봤을 때 국정원이 북한 내 혁명 세력의 존재를 파악하고 지원해 줬을 것이다. 이럴 때 쓰라고 국정원 특별활동비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박근혜 정권 때 국정원 핵심 인사도 “국정원이 혁명조직을 지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시 국정원장은 무조건 2년 안에 통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정보 당국 수장이 ‘예상’이 아닌 ‘확신’을 가졌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류경호텔 여종업원뿐 아니라, 故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 이은 ‘최고위급’ 탈북자인 태영호 전 주영 북한공사도 이 전 원장 재임 시절 탈북했다. 사진=조선DB
  이 기사의 ‘당시 국정원장’은 바로 이병호 원장을 말한다. ‘김정은 독재에 반발하는 저항집단을 지원했다’는 이병호 원장의 말을 통해 《월간조선》 보도가 사실임이 다시 한 번 입증된 셈이다. 이 전 원장은 변호인에게 자신이 국정원장으로 있으면서 “북의 전자(電子) 전문가를 탈북시켰다. 그 친구가 북을 떠나면서 모든 정보를 가져왔다”고도 증언했다.
 
  최고위급 탈북자 중 한 명인 태영호 전 주영(駐英) 북한공사도 이병호 원장 재임 시절 탈북했다. 중국 옌지(延吉) 소재 류경호텔 내 류경식당 여종업원 탈출도 그의 재임 중에 이뤄진 일이다. 이 전 원장은 “국정원은 북한 내부의 상황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듯이 봐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북한의 권력층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포섭해서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태영호 같은 고위층 출신 인물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밝혔다.
 
  변호인은 ‘보석청구 이유보충서’에서 “이병호 국정원장의 지휘 방침에 따라 많은 작전이 전개됐다. 북의 태영호 공사 등 엘리트들이 갑자기 남쪽으로 오는 현상이 벌어졌다”면서 “비밀 대북 공작 업무에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은 역대 국정원장 중 이병호가 아마 유일한 인물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해 지난해 5월 미국 CIA 폼페이오 국장(현 미 국무장관)은 이 전 원장에게 ‘조지 태닛’ 메달을 수여했다. 조지 태닛(George Tanet)은 1997년부터 7년간 CIA 국장을 지낸 인물로, 특유의 친화력과 조직 장악력을 바탕으로 민주당과 공화당 양쪽으로부터 신뢰를 받았다.
 
 
  “김정은은 정말 나쁜 놈… 국내엔 간첩 득시글”
 
지난 5월 좌파 성향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2016년 중국 소재 류경식당 여종업원 탈출과 관련해 ‘국정원이 기획탈북을 한 것’이라며 이병호 전 국정원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사진=KBS 캡처
  이병호 전 원장은 “김정은은 정말 나쁜 놈 같아요”라며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전 국민을 굶어 죽게 하면서 호의호식하고 정적(政敵)을 잔인하게 죽이는 전제군주”라는 평가를 내렸다. 이 전 원장은 김정은의 잔인성을 원장 재임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변호인에게 자세히 이야기했다.
 
  “제가 직접 사람을 죽이려고 준비한 말뚝을 위성사진을 통해 보기도 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을 말뚝에 매어놓고 12미터 앞에서 고사포로 산산조각을 내버린 인물입니다. 그 형도 독극물로 죽였습니다…. 김정은이나 남한의 좌파 인사들이 말하는 사람은 국민 전체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북한에서 잔인하게 공개처형하듯 그렇게 숙청하고 싶은 대상일 것입니다.”
 
  이 전 원장은 “북한의 핵개발을 막아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정보조직이 북의 상황을 샅샅이 파악하고 흔들고 견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국내에는 간첩이 득시글하다”면서도 “변호사들 때문에 간첩 수사를 못하겠다. 간첩의 모든 증거가 사실 북한에 있는데 변호사들이 하나하나 증거를 트집 잡으니 어떻게 잡나”고 변호인에게 반문하기도 했다.
 
 
  “제가 정말 사법처리의 대상이란 말입니까?”
 
  이 전 원장은 일련의 대북(對北) 공작을 언급하며 “저보고 국고를 손실했다고 하는데 판사들이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나는) 대한민국에 엄청난 예산상의 이익을 준 사람”이라고 항변했다. 그는 인공위성을 예로 들었다. 우리나라 인공위성 ‘아리랑’이 촬영한 정보 사진 한 장 가격이 200만원인 데 반해, 미국 위성이 촬영한 사진은 해상도가 높아 70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자신의 대북 공작으로 이러한 불필요한 금전적 지출을 줄일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 전 원장은 문제가 된 국정원 특수사업비를 ‘정보 예산’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이다.
 
  “예를 들어 정보조직에서 비밀리에 포섭하고 싶은 인물을 매수하기도 해요. 또 범죄조직이나 테러리스트에게 돈을 주고 은밀히 어떤 일을 시키기도 하죠. 그래서 모든 정보 예산은 철저히 기밀로 되어 있어요…. 그 돈은 국정원 내부에서도 어디에 쓰는지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고도의 기밀사항입니다…. 원래 기밀이 유지되는 정보 예산은 개인적인 횡령이 아닌 한 어느 나라나 국익을 위해 사법처리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죠. 정보기관의 업무란 법으로 재지 못할 음지(陰地)에서의 그런 특성들이 있는 겁니다.”
 
  그는 “기밀이 유지되어야 하는 정보 예산의 사용을 이렇게 공개적인 사법처리의 대상으로 삼아도 좋은 겁니까”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지는 말이다.
 
  “북한에 심은 어떤 정보원에게 얼마를 주고 북한의 누구를 얼마에 매수해 포섭하고 이런 것들이 다 공개되어도 되는 겁니까? 이런 선례(先例)가 주는 앞으로의 파장은 어떨 것 같아요? 국정원장의 재량으로 사용하라고 준 특별 정보 예산을 제가 착복한 것도 아니고 직속상관인 대통령에게 지원하도록 승낙한 제가 정말 사법처리의 대상이란 말입니까?”
 
  항소심 첫 공판에서도 이병호 전 원장의 항변은 이어졌다. 검찰 측은 보석이 되어 이 전 원장이 불구속 재판을 받을 경우, 도주의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 전 원장은 “그건 제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국정원장을 했던 사람이 왜 도망을 하겠냐”며 “그건 저 자신에 대해 가족에 대해 또 국정원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
 
 
  심신 쇠약해진 이병호… 부인은 ‘치매’ 걸릴까 봐 남편 걱정
 
  ‘항소이유보충서’ 등 변호인이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현재 이병호 전 원장은 심신이 매우 쇠약한 상태라고 한다. 문건을 보면, 고령인 이 전 원장의 건강을 걱정하는 변호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전 원장은 “늙어서 그런지 자리에서 일어나면 주위가 빙빙 돌아요. 한참 있으면 괜찮아지고”라며 다소 체념한 듯 말했다. 또 “맨바닥에 누웠다가 일어날 때면 온몸의 뼈가 마디마디 덜거덕거리는 것 같다”고도 했다. ‘외부 진료를 청구하겠다’는 변호인의 제안에 이 전 원장은 “수갑을 차고 감시를 받으면서 나가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다”고 거절했다.
 
  항소심 첫 공판에서 재판부 측이 그에게 주소를 물었는데, 이 전 원장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것은 재판부를 겨냥한 저항이 아니었다는 게 변호인의 의견이다. 변호인은 그때 이 전 원장의 표정에 대해 “힘이 다 빠진 하얗게 바랜 노인의 얼굴이었다”고 ‘항소이유보충서’에 썼다. 심지어 그의 부인은 변호인에게 치매가 ‘가족력’이라며 “그이(이병호)의 형제들이 지금 모두 치매 상태다. 그이가 치매에 걸릴까 봐 걱정”이라고 하소연했다고도 한다.
 
 
  대한민국은 이병호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나?
 
  변호인은 “그가 감옥 안에서 겪는 고통은 더 이상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겠다”며 “동정을 구걸하기 싫다는 게 이병호 피고인의 법정진술”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전 원장의 결백을 재차 강조하며 “중죄(重罪)를 졌어도 인생 70의 노인은 석방할 수 있다고 형사소송법은 규정하고 있다”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형사소송법 471조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고 해도 70세 이상의 노인의 경우는 형(刑)의 집행을 정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변호인은 이 전 원장의 청렴함도 강조했다. 현재 그의 재산은 서울 가락동 소재의 작고 오래된 연립주택 한 채와 통장에 들어 있는 약간의 생활비가 전부라고 한다. 그나마 변호사 비용으로 거의 다 나갔다고 한다. 2010년엔 은행 직원의 감언이설에 속아 퇴직금을 날린 적도 있다고 한다. 펀드와 예금의 차이를 모를 정도로 평생을 정보 전문가로 헌신한 ‘순진한’ 사람이라는 게 변호인의 말이다. 변호인은 비장한 투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재판부에 건넸다.
 
  〈2018년 8월 변호인은 구치소의 어둠침침한 복도에서 기운을 잃은 그(이병호-기자 주)의 모습을 보고 있다. “모든 게 눈에 보이지 않는 섭리인 것 같습니다” 그가 현실에 대해 하는 입장 표명이다…. 이병호는 (남과 북이 벌인) ‘라스트 배틀’의 대한민국 지휘탑이었다. 그런 이병호를 지금 대한민국은 어떻게 취급하고 있나. 대한민국을 위해 또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영웅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