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자명예훼손 재판은 5·18기념재단과 5·18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 고(故) 조비오 신부 유족이 광주지방법원 민사21부에 낸 전두환 전 대통령 회고록의 판매 및 배포 금지 가처분(假處分) 신청에서 파생된 것과 다름없다. ‘전두환 회고록 배포 금지 가처분’ 인용 판결에 힘입어 전 전 대통령이 기소되어 사자명예훼손 재판에 넘겨졌기 때문이다. 전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지칭한 것이 조 신부와 5·18희생자, 유가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광주지검 형사1부(부장검사 이정현)는 ‘명예훼손 고소 수사 과정에서 당시 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했다’며 전 전 대통령을 기소하기로 했다고 한다.
‘5·18 당시 계엄군의 헬리콥터가 시민을 향해 사격을 했다’는 주장은 1988년 국회의 광주특위 때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후 광주사태에 대한 국가적 조사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헬기 사격은 부정되어 왔다. 이제 와 새삼 또 논란이 된 것은 광주광역시 금남로 소재 전일빌딩 10층 전일방송 내부에서 150개 이상의 총탄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 판매 금지 처분도, 검찰의 사자명예훼손 혐의 기소도 모두 ‘전일빌딩 탄흔’에서 비롯됐다.
‘헬기 사격으로 양민 학살’
1980년 5월 21일 헬기 사격에 관한 특조위 보고서. |
국과수 발표 몇 달 뒤인 2017년 5월 취임한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은 5·18 기념식에서 “새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에 노력하고, 헬기 사격까지 포함해 발포의 진상과 책임을 반드시 밝혀 내겠다”고 말했다. 곧이어 문 대통령은 ‘1980년 5·18 광주사태 당시 신군부가 시위대를 대량 살상하기 위한 헬기 사격을 계획했고 실제 전일빌딩 기총 사격으로 일부 실행됐다’는 주장과 관련, 이 두 가지 문제를 특별 조사하라고 송영무(宋永武)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5·18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대기 관련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이하 5·18특조위)’가 설립되었다.
2017년 9월 출범한 5·18특조위는 5개월의 활동기간을 거쳐 지난 2월 ‘5·18 기간 동안 광주지역에서 공지협동작전의 일환으로 헬기 사격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계엄군은 5.21. 헬기를 이용하여 일반시민에게 위협사격을 하였고, 무장을 하지 아니하고 시위를 하는 시민들에 대하여 직접사격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5.21. 헬기 사격은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것으로서 계엄군 진압작전의 야만성과 잔학성 그리고 범죄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또한 시민들과 물리적 충돌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실시되었던 지상군의 사격과 달리 헬기 사격은 사전 계획적·공세적 성격을 띠고 있다. (중략) 대량살상 능력을 갖춘 무장헬기까지 동원하여 사격을 하고 시민을 살상하는 행위는 집단살해 내지 양민학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논리의 비약
5·18 당시 출동했던 헬기 조종사들이 한결같이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특조위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다. |
〈계엄군 지휘부가 문서로 ‘헬기 사격 실시’를 지시했고 이를 하달 받은 현장 지휘관들의 헬기 조종사들에 대한 구두명령이 있었다 → 헬기가 무장한 상태로 작전활동을 했다 → 특조위 면담 조사에서 5명의 헬기 조종사들이 무장헬기의 출동사실을 시인했다 → 당시 사실상 발포를 허용하는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으며 자위권 발동명령이 하달된 상태였다 → 평시보다 엄중한 군법이 적용되는 비상계엄하에서 헬기 사격 명령을 받은 헬기 조종사들이 헬기 사격 명령을 무시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 → 따라서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헬기 사격이 존재했다는 뚜렷한 증거다.〉
굉장한 논리적 비약이다. ‘땅은 젖지 않았지만 날이 흐렸기 때문에 비가 왔을 것이다’는 식이다. 이런 유의 비약은 ‘조사결과보고서’ 곳곳에서 나타난다.
5.22. 103항공대장 등 조종사 4명은 AH-1J 코브라 헬기 2대에 벌컨포 500발씩을 싣고 광주에 출동했다고 진술하고 있고, 20사단 충정작전상보 첨부자료에 의하면 103항공대는 5.23. 전교사에서 벌컨포 1500발을 수령했다. 따라서 코브라 헬기에서 벌컨포를 사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5.24. 11공수여단장은 103항공대장에게 무전으로 11공수여단 병력을 공격하는 시민군에게 ‘무차별 사격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103항공대장이 코브라헬기로 현장에 출동해 보니 공수여단을 공격한 무리는 시민군이 아니라 보병학교 교도대로 확인됐다. 11공수여단장은 믿지 않고 재차 사격을 지시했다. 103항공대장은 사격을 실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헬기 사격 명령을 내린 사실이 있고 실제 그 목적으로 출동하였으며, 출동 당시 공격한 무리가 교도대 병력이 아니라 시민군이었다면 시민군을 향해 발포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명령을 받은 헬기 조종사들이 실제 사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5·18특조위의 조사 발표에 따라 국방부는 1980년 5월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공식 인정했고, 송영무 국방부 장관도 “우리 군이 38년 전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역사에 큰 아픔을 남긴 것에 대해 국민과 광주시민들께 충심으로 위로와 사과를 드린다”고 발표했다. 언론도 5·18특조위의 발표를 비판 없이 수용해 받아썼다. “무장 상태로 비행했지만 사격은 하지 않았다”는 당시 조종사 전원의 일관된 증언은 묻혔다. 헬기 사격을 했다는 사람도, 그 사격으로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확인하지 못했는데 비무장 시민들에 대한 헬기 사격이 국가적으로 인정됐다.
前 육군항공작전사령관의 항변
단 한 사람, 육군항공작전사령관 출신의 5·18특조위 위원인 최해필 예비역 육군소장(少將)만이 “헬기 사격이 반드시 있었다고 특정할 수 없다”는 소수(少數)의견을 냈다. 최 소장은 조종사들이 한결같이 ‘헬기 사격 명령을 받은 것은 인정하지만 시민을 향하여 직접 사격을 하지는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진술자들의 증언이 불분명하고 사실과 다른 점을 짚었다. 5·18특조위 활동의 계기가 된 전일빌딩 탄흔에 대한 국과수 감정결과에 대해서도 ‘높은 빌딩에 남아 있는 탄흔이라고 하는 이유만으로 헬기 사격에 의한 탄흔이라고 주장하기에는 그 탄흔의 밀집도가 아주 조밀하여 헬기 사격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헬기 공중사격 시 발생한 탄흔의 밀집도가 반경 1m가 안 되는 좁은 범위 안에서 수십 발의 탄흔이 생기도록 밀집사격을 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당시 진압군 대대장(임○원)의 진술에 따르면, 진압군이 시민을 향한 사격을 할 때에는 45˚ 하방, 무릎 아래쪽으로 총구를 향하도록 지시하였는데 ‘건물 안으로 진입하던 진압군의 M16 사격 탄흔이라면 몰라도 헬기 사격 시 발생한 탄흔이 그렇게 밀집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5·18특조위는 헬기 조종사들의 “헬기 사격은 하지 않았다”는 증언은 묵살하면서도 “헬기 사격을 봤다”는 목격 증언에는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조사결과보고서’는 ‘헬기 사격을 직접 목격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은 헬기 사격 사실을 보다 뚜렷하게 증명하고 있다’면서 목격자들의 진술을 정리했다. 이들의 증언은 1995년 검찰·국방부 합동조사에서는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닌 전문(轉聞)이었거나 헬기의 기체 성능이나 무장화기의 특성 등을 몰라서 한 주장으로 평가되었었다. 5·18특조위는 그 증언들을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증거로 다시 끌어낸 것이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과 사자명예훼손으로 엮인 조비오 신부의 증언은 국회 청문회, TV 드라마 증언, 검찰·국방부 조사, 재판정에서 면밀히 검증되어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지만, 이번 5·18특조위에서 헬기 사격이 존재했다는 유력한 증거 중 하나로 채택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은 조비오 신부의 주장이 “단순한 오해나 착각에 따른 것이 아니라 고의적인 허위 진술”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비오 신부 증언의 逆轉
5·18 당시 헬기사격 주장을 해온 故조비오 신부. 사진=조선DB |
광주에서 무장(武裝) 헬기의 공중 사격으로 많은 인명 피해가 야기되었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었고, 조비오 신부·이광영 승려·아널드 피터슨 목사 등이 헬기 기총 소사를 목격하였다고 주장했다. … 먼저 목격자들의 진술을 살펴보면, 위 이광영은 5월 21일 14시경 헬기 사격으로 15~16세의 여학생이 어깨 부위를 피격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했다고 진술했다. 적십자병원의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그 당시 헬기 사격 피해자가 내원했음을 확인할 수 없었다.
조비오 신부가 5월 27일 헬기 사격의 피해자라고 지목한 홍란은 검찰조사에서 건물 옥상에 있던 계엄군의 소총 사격에 의해 다쳤다고 진술했다.
정낙평은 5월 21일 14시경 광주경찰서 상공에서 기종 미상의 헬기가 기관총 사격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부근 진주다방의 종업원이 옥상에서 헬기가 쏜 기관총을 맞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진주다방 종업원인 심동선(남·30세)에 대한 검시조서에 의하면 사인이 M16 소총에 의한 관통총상(射入口 1×1cm)이고, 당시 빌딩 옥상에 있던 공수부대원의 사격에 의한 피격이라는 취지의 증언(광주오월항쟁사료전집 714쪽)도 있다.
아널드 피터슨 목사는 헬기가 선회(旋回)하고 상공에서 총소리가 들려 헬기에서 기총 사격을 한 것으로 믿고 있으나 헬기 사격 자체를 목격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사격 장면을 촬영한 것으로 검찰에 제출한 사진상의 헬기 하단 불빛은 기관총 사격 시 발생되는 섬광이 아니라 헬기에 부착된 충돌방지등 불빛임이 확인되었다. 그 밖의 목격자들도 막연하게 헬기에서 사격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일 뿐, 달리 구체적으로 피해 사실을 진술하지 못하고 있다.
광주시내 적십자병원·기독병원·전남대학병원의 각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들의 진술을 검토해 보아도 그 당시 각 병원에서 헬기 총격에 의한 피해자가 내원했거나 입원·치료를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광주시위 관련 사망자 165명에 대한 광주지방검찰청 사체검시기록에서도 특별히 헬기 기총 사격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
“사격 명령 거부했다”(조종사들)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의 쟁점에 대하여 가장 중요한 증언자는 당시 출동했던 육군 31·61항공단 소속 헬기 조종사들이다. 이들은 지난 30여 년간 일관되게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무장한 채 출동했지만 한 번도 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번 국방부 5·18특조위 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자는 이들의 증언 녹취록을 입수했다.
“(정○ 사단장이) 나한테 대뜸 ‘사격할 수 있느냐’ 이렇게 물어봐서 ‘사격할 수 있는 준비가 바로 되어 있다’ 이랬더니 ‘그러면 다리만 쏠 수 있느냐’ 이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어요. 그래서 ‘그렇게는 못 쏩니다. 한 번 당기면 2000발이 나갑니다. 꽉 당기면 4000발 나갑니다. 엎드려서 쏴도 다리 못 맞히는데 비행기로 4000발씩 쏴가지고 다리 맞힌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다 죽입니다’ 이렇게 얘기했어.
계획하는 사람들이 미리 (사격)지침을 내릴 수는 있지만은 비행기에서 총 쏘면 어마무시한 사람들이 죽는다는 거를 조종사면 다 알아요.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건 불가능한 얘기인 거고 모르는 사람이 하는 얘기이지, 그건 안 된다’ 딱 잡아뗐어. 아주 강하게 얘기하니까 당신(注: 사격 명령자)도 꼼짝 못하지.” (최○○ 2017. 12.26. 녹취, 당시 31항공단 506항공대대 작전과장)
“광주시내에 있는 천(川)에 가 무력시위를 하라 그래서 내가 ‘나는 못합니다. 그거 하려면 장명(注: 작명의 오기로 보임)을 달라’고 그랬어. 그러니까 그 양반이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끄집어 내 착 찢어서 거기에 ‘즉각 출격해서 제압할 것’ 하고 사인 착착착 해가지고 날 주더라고. 내가 못 받아들인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이 양반이 흥분을 해가지고. 그 양반은 장군이에요. 나는 육군 중령입니다. 감히 그것도 작전지역에 작전 주무참모인데 지시하는 거를 내가 딱 잘라서 못한다고 얘기했거든요. 그게 화 안 나겠어요? 나라도 때려죽이고 싶지. 영창에 집어넣고 싶지만 사안이 사안이에요. 내가 ‘진정하시고 제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하고 못하는 이유를 설명 드렸어요. 2.75인치 로켓을 천(川)에다가 쏘면 수심이 깊은 데는 조비탄이 세지고 얕은 데는 파편이 된다고. 튀는데 럭비공 튀듯이 방향이 없어요. 산발적으로 튀어요. 7.62mm 기관총도 마찬가지야. 기관총도 쏘면 깊은 물에는 조비가 생겨서 튄다고. 그런데 개울가에 있는 집들이 전부 다 민가야. 한두 집도 아니고 줄줄이 쭉 늘어서 있는 그 집에 파편이 튀어 들어가 사상자가 났다, 그러면 계엄군이 선량한 시민 기총사격해가지고 사살했다는 게 불 보듯이 뻔하게 보도가 된다. 그때 어떻게 책임질래? 그러니까 ‘이거는 고정하고 하지 맙시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김○○ 중령 2017. 12.29. 녹취, 당 시 31항공단 506항공대대장)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이 죽어!”
헬기나 장갑차, 군함에 탑재하는 벌컨포는 사람의 몸을 산산조각 낼 수 있다. |
“(광주川 사격 지시에 대해) 난 전혀 몰랐어. 전혀 들은 적 없음. 서면자료 내려와도 코브라 20mm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화력인데… 나도 국민인데 거기에 대해서 사격한다? 생각도 못했지. 그 코브라가 사격했으면 역사가 바뀌었을 거야.”(차○○ 소령 2018. 1.22. 녹취, 당시 31항공단 103항공대대 조종사)
“그 사람들이 벌컨이 어떤 총인지를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벌컨은 총(銃)이 아니라 포(砲)야. 포하고 총하고는 개념이 틀려. 포는 날아간 게 터져. 총은 그냥 뚫고 들어가는 게 총이야. 벌컨포가 예를 들어서 맞았다, 어디 땅에, 그거는 상상을 초월할 사람이 죽어. 그거는 있을 수가 없어.”(최○○ 2017. 12.26. 녹취, 당시 31항공단 506항공대대 작전과장)
“(코브라 사격 관련) 나는 그거 있을 수가 없는 거야. 시민을 향해 공격헬기가 그걸 당기면 피해가 보통 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걸 볼 때 나는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해. 들어보지도 못했어 사격 자체를…”(최○○ 준사관 2017. 11.1. 녹취, 당시 61항공단 203항공대대 조종사)
1995년 검찰·국방부 합동조사에서도 동일한 취지의 증언을 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인명피해가 없도록 벌컨 사격하라’고 지시한 상관에게 ‘어떻게 그런 무식한 지시를 하느냐’고까지 말한다.
“첫 번째 사격 관련 요청은 5월 22일 김○○ 장군이 이○○ 대대장에게 광주천을 따라 위협사격을 하라는 것이었음. 이 대대장이 ‘코브라의 경우 20mm 벌컨으로 사격을 하면 그 위력이 엄청나 광주천에 사격을 해도 파편으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생긴다’면서 김 장군에게 불가함을 보고하고, 다시 저와 여단장에게 전화보고를 하여 저와 여단장이 ‘광주가 전쟁터이냐’고 하면서 사격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한 사실이 있음. 그러자 김 장군이 처음에는 화를 내었지만 전교사의 방침이 바뀌었는지 결국은 사격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고받은 기억이 있음.
그 외에도 언제인지는 기억에 없으나 전교사에서 APC(장갑차)를 타고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시위대에 대해서 벌컨으로 사격을 해 달라고 하면서 사람은 다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를 하였다고 하면서 이○○가 저에게 ‘어떻게 그런 무식한 지시를 하느냐’고 하며 ‘사격을 하지 않았다’고 보고한 기억이 있음.” (방○○ 1995. 5.17. 진술조서, 前 육군1항공여단 31항공단장)
‘영웅’을 ‘양민학살범’으로 모는 特調委
헬기 조종사들은 헬기 기총사격 시 발생할 수많은 인명피해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사격 명령에 대해 부당성을 설명, 납득시켰다는 것이다. 헬기 사격을 지시하는 상관에게 ‘사격 못한다’고 대들고 ‘시키는 대로 하지 무슨 말이 많으냐’는 힐난을 들으면서도 정식 서면 명령서를 요구하며 끝내 헬기 사격을 하지 않았다. 영화에 나올 법한 영웅들인데 국방부 5·18특조위는 이들을 ‘양민학살범’으로 모는 발표를 한 셈이다.
“김○○ 장군이 저에게 코브라로 광주천을 따라 천에다가 위협사격을 하라고 지시하여 코브라의 경우 20mm 벌컨으로 사격을 하면 그 위력이 엄청나 천에다가 사격을 하여도 파편으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생긴다며 불가함을 보고하였음. 이에 김 장군이 ‘배속이 되었으면 시키는 대로 하지 무슨 말이 많으냐’고 힐난하여 저가 ‘그러면 서면으로 지시를 해 달라’고 하였으나 서면지시가 없어 그날은 사격을 하지 않았음.”(이○○ 1995. 5.15. 진술조서, 前 육군1항공여단 31항공단 103항공대대장)
“김○○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이 ‘항공대장, 도청 옥상에 있는 대공화기진지를 제압하라’고 지시, 저희가 ‘도청 옥상에 있는 대공진지를 단발로 제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관총 사격의 경우에는 한번 방아쇠를 당기면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수십 발이 한꺼번에 나가기 때문에 주위 민가에 피해가 야기될 수도 있으니 사격이 곤란하다’고 하면서 ‘정히 사격을 해야 한다면 정식 서면명령서를 달라’고 하였더니 그 장군이 흥분을 하여 무슨 말을 하고는 들어갔는데 그 후 다시 지시를 받은 일이 없음.”(김○○ 1995. 5.24. 진술조서, 前 육군1항공여단 31항공단 506항공대대장)
헬기 조종사들의 공통된 진술은 결국 어떤 기종의 헬기든-그것이 코브라든 500MD든 UH-1H든- 일단 기총사격을 하게 되면 수많은 인명피해가 야기된다는 것이다.
여단장의 사격명령을 거부한 조종사
앞에서 설명한 보병학교 교도대의 오인 사격과 관련된 조종사의 증언은 국방부 5·18특조위 조사결과보고서에서 ‘사격이 있었다’는 증거로 인용되었는데, 이번에 기자가 1995년 수사자료를 얻어 읽어 보니 ‘사격명령은 있었지만 사격은 없었다’는 증거로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1980년 5월 24일 오후 1시55분경 공수11여단 63대대가 광주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효천역 앞에 이르렀을 때, 부근에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병력이 이들을 무장시위대로 오인,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mm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키는 등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이에 63대대도 응사, 계엄군끼리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63대대 병력 9명이 사망하고 63대대장 등 군인 33명과 마을 주민들이 총상을 입었다(검찰 국방부 합동 조사 보고서). 이 사건 직후 출동한 이정부 육군1항공여단 31항공단 103항공대대장의 증언이다.
“5.24.(注: 자료에는 5.23.으로 되어 있음) 공수부대가 비행단으로 철수하는 것을 엄호하라고 하여 코브라 2대를 인솔하고 공수부대 이동로를 엄호하다가 2시간 정도가 지나 연료 재보급을 위해 광주비행장에서 급유를 하고 있는데 헬기의 무전으로 11여단장이 자기 병력이 이동 중 산 쪽에 있는 폭도로부터 공격을 받아 난리가 났으니 폭도들에게 무차별 제압사격을 해 달라고 요청하여 저가 즉각 출동하여 현장으로 갔는데 막상 공중에서 7.5배 망원경을 사용하여 지상에 있는 병력들을 정확히 확인하니 산 위에 있는 병력이 아군 보병학교 교도대로 확인되어 (그 망원경으로는 병력들의 상의 마크까지 확인이 가능하였음) 저가 아군이라고 보고하니 여단장이 말도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사격을 하라고 하여 저가 다시 확인 후 재차 보고를 하였으며, 저가 그 상황을 전교사에도 보고를 하니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결국은 저의 말을 믿고 조치를 하여 그날도 결국은 사격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상황이다. 여기서 이정부 대대장은 공수여단장의 사격명령을 두 번 거부한다. 아무리 사격명령이 내려가도 현장에 출동한 조종사들의 주장이 관철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런데 국방부 5·18특조위는 〈당시 교도대가 아니고 시민군이었더라면 실제 사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의 뒷받침으로 삼는다. 가정과 추리를 결합시키면 공상(空想)이 된다. 이번에 이정부 같은 사격명령을 거부한 조종사들을 찾아냈으니 광주시민들이 이들을 의인(義人)으로 기려야 하는 것 아닌가?
전일빌딩 탄흔의 문제
문재인 대통령의 진상규명 지시에 따라 구성된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는 2017년 9월 13일 광주 동구 금남로 전일빌딩을 찾아가 현장조사를 했다. 사진=조선DB |
“전일빌딩 10층 피탄 흔적을 보면 점표적 사격이 아니고 지역표적을 사격하는 것인데, 이런 점표적에 어떻게 사격을 해요? 따라서 여기에 이런 피탄 흔적이 나올 수 없어요. 시험을 해 보면 바로 답이 나와요. 직접 사격을 해 보고 피탄이 어떻게 흩어지는지를 보여 줘야 의문을 제기하지 않아요. 이런 기둥에 한 발이 맞을까 말까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힘들어요. 10층 전체에 퍼지거나 7층에서 10층까지 전 지역에 피탄 흔적이 발견되어야 설명이 됩니다.” (2017. 9.25. 녹취, 당시 31항공단 505항공대대 500MD조종사)
5·18특조위는 이런 반론을 의식했는지 ‘조사결과보고서’에 이렇게 쓰고 있다.
…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전일빌딩 내부에 남아 있는 탄흔의 직경과 방사형으로 펼쳐진 탄착군의 모양을 기초로 총기의 종류를 판단해 볼 때 5.56mm 실탄을 사용하는 M16 소총일 가능성이 높고, 7.62mm 탄을 사용하는 M60 기관총일 가능성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위 총기의 종류를 기초로 헬기의 종류와 사격방법도 함께 판단하면서, 500MD에 장착된 M134 미니건에 의한 사격 가능성은 배제하고, UH-1H의 마운트에 장착된 M60에 의한 사격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서에서 명확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UH-1H에 탑승한 승무원 또는 공수부대원이 슬라이딩 도어를 개방하거나 창문을 개방한 상태에서 개인화기인 M16으로 사격을 하는 경우에도 전일빌딩 내부에 남아 있는 것과 같은 탄흔 발생이 가능하다. 결국 전일빌딩에 남겨진 탄흔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결과는 UH-1H 헬기가 호버링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UH-1H에 탑승한 승무원 또는 공수부대원이 M16으로 전일빌딩에 사격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영화 시나리오를 연상시킨다. 국과수는 M16 소총이나 UH-1H의 마운트에 장착된 M60일 가능성이 있다고 결과를 내놓았을 뿐이다. M16 가능성을 더 높게 보는 뉘앙스다. 그러나 헬기 기총사격으로는 전일빌딩에 남아 있는 것 같은 탄착군이 나올 수 없다는 조종사들의 반박에 5·18특조위는 ‘헬기에 탑승한 승무원이나 공수부대원이 슬라이딩 도어 또는 창문을 개방하고 M16으로 전일빌딩에 사격을 했다’고 결론 내린다. M16 소총과 헬기 사격을 무리하게 연결지으려 한다.
한 조종사는 기가 찬 듯 이렇게 화를 냈다.
“내가 조종사인데, 내가 비행기 몰고 다니는데 내 뒤에서 앉아 있는 놈들이 내 명령 없이 총 쏘게, 당신이 조종사라면 그걸 놔두겠어? 내가 비행기 몰고 가는데 내 명령 없이 뒤에서 쫄병 새끼가 총 쏜다고? 그건 내려서 내가 쏴 버리지. 그건 누가 말을 만들어도 비슷하게 만들어야지.”(최○○ 2017. 12.26. 녹취, 당시 31항공단 506항공대대 작전과장)
헬기가 호버링(공중정지) 상태여도 요동이 심한 헬기에서 목표를 맞히기는 어렵다. 헬기에 기관총이 거치돼 있는데 굳이 소총을 쏜다는 것도 어색하다. 최해필 5·18특조위 위원의 소수의견, ‘건물 안으로 진입하던 진압군의 M16 사격 탄흔이라면 몰라도 헬기 사격 시 발생한 탄흔이 그렇게 밀집될 수가 없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증거도 없이 국군을 학살범으로 규정
5·18특조위 활동에 대한 한 가지 의문은 5개월 동안 과거 기록 조사, 참고인 대면 조사는 그렇게 열심이었는데 정작 헬기 사격 실험은 왜 하지 않았는가 이다. 그 한 번의 실험이면 모든 게 명확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실제로 5·18특조위 활동 초기인 2017년 9월 말경 군 헬기 사격장 중 한 곳을 금남로 전일빌딩과 동일한 조건으로 설정한 뒤 헬기를 띄워 사격을 재현하는 실험 가능성을 검토한다는 내용의 언론 보도가 있었다(KBC 광주뉴스, 조인스닷컴). 5·18특조위는 실험을 하지 않았고, 과거 국가조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지도 못했지만 비약적인 논리 구조로 ‘5·18 당시 국군의 야만적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데, 여전히 헬기 사격을 했다는 사람도 총탄에 맞은 사람도 확인되지 않았다. 헬기 사격 지시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사격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는데도 국군을 학살범으로, 국가를 야만적 존재로 공인하는 보고서가 나온 것이다.
5·18특조위는 “5·18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40여 대가량의 헬기가 광주에서 헬기 사격을 비롯한 병력이동, 보급품 수송 등 많은 시간을 운행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정확히 재구성하기 위해 헬기운행일지 등을 찾고자 노력했으나, 해당 부대들이 보관하고 있지 않거나 보존 기간 경과로 파기되었다고 주장해 확인하는 데 실패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는 고백이다. 5·18특조위의 조사결과에 근거하여 이른바 ‘헬기 사격’이 교과서에 기록된다면 문제 교사들은 국군을 ‘국민을 도륙한 집단’으로 매도, 북한군보다 더 나쁘게 가르칠 것이다.
5·18특조위 위원장에 위촉되어 활동한 후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차관급)에 임명된 이건리 변호사는 5·18특조위 조사결과보고서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대기 관련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는 … ‘정의의 역사’, ‘진실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나가고자 지난 5개월간 정정당당하고 의연하게 조사활동을 해 왔습니다. … 보존되어 있는 군 자료 중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중요한 부분들이 부실하게 기재된 경우가 많았고, 보존연한의 경과 등으로 이미 폐기된 자료도 있었으며, 보존된 중요자료 가운데 일부는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진실 앞에서 침묵해 왔던 분들의 용기 있는 증언도 기대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진실을 세상 밖으로 내놓지 않았습니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실로 ‘가짜와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 진실은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거짓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진실로 둔갑될 수 없습니다.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또 다른 불의입니다.
시간을 매개로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고 있는 쪽은 누구일까.
국가에 의한 역사 조작은 전체주의
5·18특조위가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을 재판에 비유하자면 살인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한 것과 같다. 5·18특조위 발표대로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조종사들은 ‘양민학살범’이 된다.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려면 완벽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5·18특조위 조사결과보고서에는 완벽한 증거는커녕 비약과 추리만 있다. 어떻게 이런 조사를 근거로 조종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었는가? 더 섬뜩한 것은 이런 부실한 조사가 아무런 반론도 없이 국가적 사실로 인정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중대한 사안에 객관적 증거 없이 ‘야만적 사격’이 있었다는 발표를 하는 것을 묵인한다면 이는 국가 기관에 의한 역사 조작을 용인하는 것이 된다. 적어도 국방부 장관은 이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선언, 대한민국 국군의 명예를 지키고 현대사의 왜곡을 막았어야 했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2 더하기 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썼다.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개인의 자유도 지켜 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국가 권력으로 사실을 억압하면 독재국가, 사실을 조작하면 전체주의 국가라고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2 더하기 2는 5’라고 말하는 데 국가기관이 앞장서고 있다.
이 조사결과가 번복되지 않고 ‘국가가 공인한 사실’로 굳어지면 조종사들은 나치 유대인 학살범처럼 취급될 가능성이 있고, 국군과 국가도 전(全)세계 앞에서 학살집단으로 취급될 것이고,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갈 수도 있다. 5·18특조위는 이런 끔찍한 연쇄반응을 생각하고 이런 무서운 결론을 내렸는가? 언젠가는 5·18특조위 조사위원들이 조사를 받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참고로, 조사위원들의 명단을 붙인다.⊙
국방부 특조위 위원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5·18 당시 헬기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위원 중 최해필 전 항공작전사령관만이 소수의견을 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