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운 기자의 살롱]
1980년대 한국경제 도약기 이끈 사공일 세계경제硏 이사장…
그가 말하는 리더십과 처세의 비결
리더십의 첫째는 실력, 둘째 사심 없어야 하고, 그 다음은 솔선수범
한국 정치판에서 명예를 지키긴 어렵다. 정권 말기엔 국정 조사로, 정권이 바뀌면 검찰 조사로 오욕의 인생이 시작된다. 실세(實勢)라 불렸던 이들이 존경받는 원로(元老)로 남는 건 극히 드문 일. 당장 이전 정권 실세들을 보라. 그렇다면 사공 이사장의 비결은 무엇일까. '능력'일까, '처세(處世)'일까, '운(運)'일까, 아니면 이 모두의 슬기로운 결합일까. 지난달 25일 서울 삼성동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권불십년, 정치는 하지 마라"
―김영삼 대통령 때만 임명장을 안 받으셨네요.
"김 대통령은 저한테 국회의원 하라고 수차례 제안을 했어요. 대구 어딘가 구(區)까지 정해서. 끝까지 안 하겠다고 했지. DJP 연합 때도 서울 어느 구 제안이 있었고. 제가 대통령께 전한 거절의 이유가 이겁니다. '내 비교 우위가 정치에 있지 않다.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으니 날 그냥 둬라. 전문가들이 들어가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내가 왜 국가발전을 위해 안 하겠느냐. 그런데 지금과 같은 정치판에서 주말마다 상가 누비고 소주 마시고 난 그거에 경쟁력 없다. 체질에 안 맞는다'."
―많은 국회의원은 해본 직업 중 정치가 가장 재밌다고들 합니다.
"박태준 총재가 아침에 전화해서 그래요. '사공 장관 국회의원 하라고'. '정치는 안 합니다' 그랬지. 그랬더니 DJP 연합 고위 인사들이 저한테 그래요. '사공 장관. 국회의원 하면 최고다. 딴 건 몰라도, 몇만 명이 모여서 '사공일 사공일' 하면 미친다'.(웃음)"
―한번쯤 출마하셨을 법도 한데요.
"우리 아버님이 한학을 하셨어요. 시골에서는 부잣집 소리를 듣는 가정의 육남매 막내아들로 태어났어요. 바로 위 형님이 7년 위니깐 아버지·어머니께 사랑을 많이 받았죠. 6·25 일어나고 할 때인데, 내가 아침마다 신문이 오면 정치면 보면서 아버지에게 묻고 그러니깐, 그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야. '권불십년(權不十年)인데, 너는 정치는 하지 마라.'"
―어릴 적 꿈이 궁금합니다.
"외교관이 되고 싶었어. 대한뉴스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나오면, '외교관이 돼 외국에서 활동했으면 좋겠다' 했지. 그런데 아버지는 내게 '은행가가 되라' 하셨어. 일제 치하도 겪고 그랬으니깐 (은행가가) 가장 안정돼 보이셨나 봐."
―정치도 잘하셨을 것 같습니다만.
"출마했으면 뭐 (국회의원) 했겠지. 그리고 안양교도소를 들락거렸겠지(웃음). 정치하면 '안양교도소 담벼락을 걷는다'잖아. 안으로 떨어지면 교도소고, 밖으로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랬어. '이 판에 들어가면 그렇게 놀아야 할 것 아니오. 나는 그 판에는 안 갑니다.'"
수석론(首席論) "뒤에서 일하라"
지난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신년인사회에서 "나는 경제를 잘 모르는데 사공일 같은 사람이 잘 받쳐줘서 까먹으려고 해도 못 까먹게 했다"고 말했다. 세간의 평가는 나뉘지만, 그 시기에 경제가 크게 성장한 것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그 뒤엔 사공일이 있었다.
―4년 최장기 청와대 경제수석 기록이 아직도 안 깨지고 있습니다.
"내가 수석 할 땐 대통령이 신임하면 전적으로 맡겨주고, 건의한 건 거의 다 들어주고 했어요. 금융·산업계가 제일 싫어하는 게 불확실성이에요. 우리는 장관을 운동선수처럼 수시로 바꿔요. 대통령 책임제의 장점을 스스로 포기하고, 내각 책임제의 단점을 스스로 답습해요. 전 6공으로 바뀔 때도 외교와 경제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조각(組閣) 전에 연임된다는 거 알았습니다."
―청와대 경제수석과 재무장관 시절, 어떻게 달랐나요?
"내가 아무리 '실세 장관'이었다고 해도, 청와대 나가면 다 권력에서 멀어지는 거예요. 수석 때는 하루에도 몇 번을 대통령과 만나요. 장관 보고 때, 대통령이 외국 갈 때, 지방 갈 때 수행해요. 수석이 부총리나 장관에게 힘 안 실어주면 그들이 일하기 어렵습니다. 수석이라는 자리가 크게 (역할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야말로 비서 역할, 그다음에 중요한 것이 자문 역할이에요. 내가 수석 할 때는 이게 50대50이었어요."
―그 시절이 경제 호황이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당시 고속 성장으로 누적된 부작용이 많았어요.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에 2차 오일쇼크까지. 국제 수지도 적자였고. 새 정부가 경제 안정화를 해야겠다고 해서 굉장히 정치적으로 인기 없는 걸 했어요. 그게 예산·추곡수매가 동결이야. 1985년 되니깐 물가 안정에 대한 자신감이 붙어서 긴축을 풀기 시작했죠. 그러다 1986년에 첫 경상수지 흑자를 낸 거예요. 그때가 세 마리 토끼 다 잡았다고 할 때야. 국운도 좋았던 게 3저 호황이라고 해서 국제 유가, 금리, 달러 다 낮을 때지. 그런데 인도네시아, 라틴아메리카에도 다 왔는데, 우리만 왜 그 운을 잡았느냐. 준비가 됐기 때문이야.”
―문민정부로 바뀌고는 검찰 수사를 받으셨는데요.
“5공 비자금은 정치 이슈죠. 내가 재무부장관을 할 때는 선거자금법 이런 게 없었어. 정부가 기업들로부터 정치 헌금을 받고 영수증을 끊어줄 때야. 그게 우리나라 정치 발전 과정에서 문제가 되고 하니깐 재판장에도 가고 그랬죠.”
―청문회부터 국정감사까지 살아남으신 처세의 비결이라도 있으신가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건 아니고. 난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았는데. 사심 가지고 한 건 전혀 없으니깐. 내가 부실기업 정리하니깐 사람들이 틀림없이 정치적인 결탁 있었을 거다 해서 청문회도 하고 국정감사도 하고 검찰 조사도 했는데, 난 국정감사가 좋더라고. 설명할 수 있게 장을 펴주니깐. 저는요, 법적인 게 아니고 정책이 잘못됐다고 그 사람들을 처벌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부실기업 정리할 때 정치권에서는 경남기업을 왜 김우중에게 줬느냐며 분명히 돈 먹고 줬을 거라며 말이 많았어요. 그때 우리 근로자들이 중동에 몇만 명 나가 있었고, 건설 중인 것도 많았어요. 부도가 나면 주거래 은행인 외환은행 장부를 다 까야 해요. 그러면 우리가 외채를 못 빌리니까 국가 부도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생각한 게 제삼자 인수예요. 그럼 이걸 누가 (인수) 하겠느냐는 거야. 나하고 김만제 재무부장관하고 힐튼호텔에서 제일 먼저 정주영 회장님 보자 했다고. 정 회장님이 이명박 당시 건설 사장님과 같이 들어오셨어. 왜 들어온지 아니깐 이미 결심이 섰더라고. 정 회장이 ‘어, 이 사장 어떻게 생각해?’ 이러니깐, 이 사장이 ‘아이, 안 됩니다.’ 이래요. 그러면 김우중 회장 들어오라고 했지. 김 회장은 ‘오케이, 하겠습니다’이래요. 그래서 거기로 간 거예요.”
―그때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신 건가요?
“청와대 수석 할 때 이명박 대통령은 여러 번 만났죠. 정 회장님은 그때 전경련 회장을 했기 때문에 청와대에 정책 건의하러 종종 들어오셨어요. 이 대통령과 개인적으로는 식사 한 번 같이한 적 없어요. 그러다가 이명박 당시 후보가 첫 당내 경선할 때 직접 찾아와서 ‘경제 고문으로 도와달라’ 하더라고. ‘나는 캠프에는 안 간다. 대신 경제 중진들이 모인 조찬 모임을 만들겠다”고 했지. 이후 당선되던 날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국경위)’ 위원장 제안하더라고.”
―그때 G20 정상회의준비위원회 위원장도 하셨습니다.
“리먼 브러더스 파산 이후 제가 대통령을 대신해서 (2008년 10월)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린 (세계정책) 회의에 참석했어요. 그때까지 회자되던 G14에는 한국이 안 들어가 있었는데, 내가 에비앙에서 연설하면서 꼭 한국이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를 폈지. 그랬다가 파리로 갔는데, 거기서 사르코지 대통령의 외교 안보 수석인 장 다비드 르비트와 친해졌고. G20 첫 회의는 워싱턴에서 하고, 그다음에 런던에서 회의하는데, 미국이 대통령 인수인계로 바쁘니깐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밑에서 G20을 총괄한 존 컨리프라는 보좌관이 같이 일할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 이 사람이 미국 프레드 버그스텐한테 하소연을 하니, 버그스텐이 ‘한국의 사공일하고 같이 일하라’고 알려준 거예요. 그 사람들하고 친해져서 나중에 한국이 의장국이 되는데 큰 도움이 됐지요.”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여소야대 때 청와대 경제수석 하고 재무장관을 했지만, 다 잘 지냈어요. 내가 금리 자율화한다니깐 야당 의원이 나한테 와서 ‘사공 장관,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 뭐 이렇게 골치 아픈 거 하려고 하노’ 하면서 말릴 정도였어요. 사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은 직접 같이 일한 적도 없는데, 그 밑에 사람들이 날 좋게 이야기해서 알게 된 거예요.”
―무역협회장 연임을 사양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임기가 다 돼 그만둔 거지. 위에서는 ‘연임을 해라’고 했는데, ‘난 안 한다. 난 연구원으로 돌아간다. 후배들에게 이런 선배들도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했지. 하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자리 욕심이 더 안 나시던가요?
“내 좌우명이 ‘진인사대천명’이에요. 모든 일을 성실히 하면 운도 따르는 거고. 운은 따르려고 해봐야 따르지도 않고요. 리더십이라는 게 첫째는 실력이 있어야 해요. 두 번째는 사심이 없어야 해. 그다음은 솔선수범해야 해요. 내가 늘 그랬어요. ‘정치적으로 억지로 해서 성공한 사람 중 끝까지 간 사람은 한 번도 못 봤다’고. 정치로 선 사람은 반드시 정치로 망하게 돼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항상 그 말씀 하셨어. ‘순리대로 살아라.’”
정치로 선 자, 정치로 망해
―유학은 어떻게 결심하셨나요?
“어릴 때부터 가고 싶었어. 서울대 상대 졸업한 뒤 등록금 면제해준다고 해서 UCLA 갔죠. 그랬더니 담당 교수가 외국 학생이 공부 열심히 하니깐 날 시험지 점수 매기는 ‘리더’를 시켰어요. 이걸 열심히 하니깐 RA(리서치 어시스턴트) 하라고 해. RA 한 학기 하니깐 또 TA(조교) 하라더라고. 내가 첫 미국 생활을 유대인 변호사 집에서 했어요. 그때 부자들이 외국 학생들 도와주고 했거든. 그러니 영어를 옳게 배웠지.”
―귀국은 어떻게 결심하셨나요?
“뉴욕대 교수하다 영국 초청 교수로 가는 길에 노모 뵈러 잠깐 한국에 들렀는데 당시 김만제 KDI(한국개발연구원) 원장이 내가 오는 걸 아시고 점심 같이하자 한 거예요. 갔더니 나보고 빨리 KDI 나오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NYU 가서 1년 더 가르치고 귀국했죠.”
―청와대행은 빠르셨습니다.
“내가 KDI에서 부원장 하다가 산업연구원 원장으로 가 있는데 아웅산 사태가 일어나. 10월 9일 한글날. 그러니깐 대통령이 그 다음 날 오셔서 나한테 청와대 들어와 수석 하라고 했어요. 내가 ‘김만제 원장은 KDI를 11년을 해서 세계적인 기관으로 만들었는데, 저도 가능하면 산업연구원에 좀 더 오래 있고 싶습니다’고 하니 대통령이 ‘안 돼, 지금 김재익 수석도 없고, 경제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해’ 하시더라고.”
―IGE는 어떻게 세우셨나요?
“노태우 대통령 때 전면 개각으로 장관직 떠나 IMF 초청받아서 미국 가서 책 쓰고 돌아오니 노 정권에서 ‘산하기관 하나 골라’ 하시는 거예요. 내가 ‘산하기관장 필요 없습니다. 연구원 할 겁니다’ 했지. 세상이 이렇게 빨리 변하는데 정책·기업 한다는 사람들 머리 안 바꾸면 안 되니깐. 그때 시작한 게 벌써 25주년 됐어. 정부에 있는 후배들이 도와주겠다 했지만 ‘후배들한테 신세 지는 건 독립성도 없어지고 싫다’ 했죠. 그래서 조그맣게 시작한 거야.”
―IMF 총재 자리에도 계속 거론됩니다.
“2007~8년에 워싱턴 지식인 중심으로 신흥국 사람이 하면 좋지 않겠느냐는 말이 나왔지. 그때 프레드 버그스텐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장이 공개 연설하면서 날 추천해서.(웃음) ‘내가 너의 캠페인 매니저 할 게’이러면서 하라더라고.
내가 ‘워싱턴 가서 뛰어다니고 그러는 거 원치 않는다’ 했지.”
―해외 명사들과 친분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세상 제일 바쁜 사람들이랑 친하려면 사람이 ‘나이스하다’ 정도론 안 돼요. 대화가 되고, 그쪽에서 얻을 게 있어야 해요. 내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부하는 이유예요. 난 아직 은퇴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계속 이렇게 현역 활동을 하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