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논설위원
국내에도 이런저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측근들이 있다. 그 나름으로 반 총장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한 측근에게 “결국 대권 도전의 문을 두드리게 되지 않겠느냐”고 물어봤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짧은 유엔 방문 기간 중 반 총장과 일곱 번을 만난 것은 어쨌든 국내 정치권에 무언(無言)의 메시지를 던졌기 때문이다.
12월 기후협약 성공에 골몰
그는 “반 총장의 머릿속에 대권이나 국내 정치는 없다”고 단언했다. 의외였다. 반 총장의 관심은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COP21)에 온통 쏠려 있다는 것이다. 파리 당사국총회는 새로운 기후협약에 대한 모든 국가들의 합의점을 도출하는 신기원을 이룰 행사다. 반 총장은 지속가능한 개발을 강조하며 환경 정상회의에 오랜 기간 공을 들였다.
국내 언론에선 박 대통령과 반 총장이 새마을 고위급 행사에서 만나 서로 힘을 실어준 것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반 총장이 가장 신경을 쓴 행사는 기후변화당사국 정상들과의 오찬이었다. 미국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강대국의 협조로 이런 노력이 결실을 앞두고 있다. 파리에서 구속력이 있는 합의안을 도출해내면 환경 분야에서 세계사적인 성취를 이룬 셈이다.
이 측근은 “반 총장이 국내 정치에 끌려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유엔 사무총장이 되려 한다고 됐겠느냐. 하늘의 뜻이…”라며 여지는 남겼다. “파리 회의에서 좋은 성과가 나오면 유엔이 힘을 기울인 지구촌의 빈곤 퇴치 활동과 함께 업적을 평가받는 날이 올 것”이라며 내년 반 총장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떠오를 수 있다고 했다.
반 총장이 2016년 12월 말 사무총장을 마친 뒤 정치에 뛰어들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여야 정치권은 어떻게든 그를 대선과 엮기 위해 집요하게 유혹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전 유엔 사무총장 가운데 2명이 퇴임 후 대선에 출마했다. 오스트리아 출신 쿠르트 발트하임만 당선돼 6년 임기의 대통령을 지냈다. 그러나 대선 전 폭로된 나치 군복무 경험 때문에 미국 방문도 못 했다.
대선주자라는 관점에서 반 총장은 출마 의사를 밝히기 전부터 1위를 달린 높은 지지도와 합리적이고 유연하다는 점에서 고건 전 국무총리와 닮은 점이 많다. 현실 정치의 벽을 뼈저리게 체험했을 고 전 총리의 실패담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진흙탕에 발을 딛고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이 된들 지금 같은 정치구도 아래선 고생만 하지 성과를 낼 수도 없다.
반 총장이 퇴임 후 가야 할 길은 ‘발트하임의 길’이 아니다. 평화 전도사로 불리며 2001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코피 아난 전 사무총장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 박 대통령부터 마땅한 대선 주자가 없다고 그를 징발하려는 생각을 접어야 한다. ‘미끄러운 뱀장어’로 불린 반 총장이 정치권에 포획당하지 않는 길은 간단하다. 뜸 들이지 말고 “대선에 안 나간다”고 미리 못 박으면 된다.
유엔 경험 살릴 곳은 국외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맡은 사람”(초대 사무총장 트뤼그베 할브단 리)이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말이 있다. 수행하기 어려운 범지구적인 역할을 맡았으나 권한은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역할을 수행한 경험이 빛을 볼 수 있는 공간은 국내가 아니라 나라 밖이다.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