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치

투쟁없이 권력없다..정부·여당 '2인자'의 권력투쟁사

Shawn Chase 2015. 10. 2. 08:31

[the300][런치리포트-與 '넘버2' 투쟁사①]역대 대선주자 청와대와 대립각…승률 67%

 

머니투데이 | 이하늘 기자 | 입력 2015.10.02. 05:52

 

 

[머니투데이 이하늘 기자] [[the300][런치리포트-與 '넘버2' 투쟁사①]역대 대선주자 청와대와 대립각…승률 67%]

청와대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갈등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대통령 직선제 이후 되풀이 돼 온, 정권 후반기 청와대와 여당 대선 유력주자의 갈등이 이번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

◇친구·동지도 '대권' 앞에선 '배신의 정치'

역대 청와대는 정국 주도권 강화와 레임덕 최소화를 위해 차기권력 견제를 이어왔다. 유력주자들 역시 차기 대선 도전 및 지지율 상승을 위해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웠다.

↑ /그래픽= 이승현 디자이너

현존권력과 차기권력의 갈등은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 사이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7년 6.29선언을 시작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멀어졌다. 이에 앞서 전 전 대통령은 4.13 호헌조치를 통해 대통령 간선제를 천명했다.

하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6월 민주화 항쟁이 본격화 되면서 들끓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 노 전대통령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6.29 선언을 연출,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였다. 대통령 후보가 된 노태우는 독자행보에 나섰고, 당선 이후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5공비리' 수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전 전 대통령 일가와 측근들을 교도소에 보내고, 전 전 대통령도 백담사로 유배됐다.

3당합당의 한 축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도 합당 이후 민정계와 계파투쟁에 나섰다. 내각제 합의 각서 유출 파문은 김 대통령이 당권을 장악하는 신호탄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은 이를 민정계의 정치공작으로 단정, 마산으로 내려가 칩거하며 여론을 등에 업었다.

민정계가 차기 대선주자로 내세운 박철언 전 의원은 결국 권력싸움에서 밀려 1995년 당을 떠났다. '6공 황태자'로 불렸던 박 의원은 김 전 대통령 당선 이후 슬롯머신 사건으로 완전히 몰락했다.

◇대통령과 투쟁, '약'(藥) 될수도 '독'(毒) 될수도

김영삼 대통령 역시 정권 후반기부터 역시 차기권력인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의 공격을 받았다. 이 전 대표는 1993년 국무총리 시절 청와대에 대해서도 직설을 서슴지 않으며 '대쪽총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권 말기에는 IMF 사태와 김 전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비리 사건을 계기로 이후 김 전 대통령과 완전히 갈라섰다. 이 전 총재의 지지자들이 김 전 대통령 모양의 인형을 불에 태우는 화형식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이 같은 갈등은 오히려 이 전총재에게 독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의 '적자'였던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탈당, 대선에 뛰어들면서 지지기반 중복으로 선거에서 패배했다. 대쪽총리 이미지와 상반된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도 악재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과 큰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의 아들인 홍업·홍걸씨가 비리로 구속되면서 김 전 대통령과 다소 거리를 둔 수준이다. 아울러 김 전 대통령의 가신그룹인 동교동계와의 관계 역시 소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선 이후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대북송금 특검 시행, 도청게이트로 인한 임동원·신건 전직 국정원장 구속수감 등은 한때 김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의 관계가 멀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노무현정부 탄생의 1등공신 가운데 하나인 정동영 전 의원 역시 정권 후반기부터 '마이웨이'를 선언했다. 유시민 전 의원의 입각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이해찬 의원의 총리 시절 골프파문에도 '사퇴 불가피론'을 주장했다.

정권 말기 노 대통령 지지율이 한자릿수로 떨어지면서 정 전 의원의 '노무현 때리기'가 더욱 심화됐다. 하지만 대선 성적표는 참담했다. 친노 지지자들의 표가 당시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에게 분산되면서 득표율 26.1%로 역대 여당 후보 가운데 최저 득표율을 기록했다.

◇직선제 이후 여당 후보 6명 중 대선 승리 4명 달해

대통령 직선제 이후 현존권력과 대립각을 세우고 차기 대선에서 승리한 정부여당 2인자들은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박근혜 등 4명이다.

특히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과 맞붙은 박근혜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줄곧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세종시는 그 갈등의 대표적 사례다. 2009년 정부는 '세종시특별법' 수정안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국민과의 약속"이라며 '원안+α'를 내세워 수정안 부결을 주도했다.

특히 친박계와 친이계는 18, 19대 총선에서 '공천학살'을 번갈아 주도하며 상호 견제를 이어왔다. 이같은 행보는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정부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지만 정부에 대한 비판이 박 대통령으로 전이되는 것을 최소화했다.

김 대표 역시 공천권을 놓고 청와대와 대립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과거 '개헌발언 번복', '유승민 전 원내대표 사퇴' 등으로 리더십에 상처를 입은 김 대표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이번에는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처지다.

이하늘 기자 iskra@mt.co.kr

 

김무성, 청와대와 세번째 전쟁 … “꼬리 내리면 미래 없다”

 

[중앙일보] 입력 2015.10.02 03:20 수정 2015.10.02 03:23

 

 

이가영 기자 사진이가영 기자

김경빈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왼쪽)가 1일 농어촌 지역 여야 국회의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는 국회 로텐더홀을 찾았다. 김 대표가 같은 당 황영철(홍천·횡성) 의원과 함께 앉아 있다.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에 불참한 김 대표는 국군의 날 기념식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참석 일정도 모두 취소했다. [김경빈 기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1일 정해진 공식 일정에 모두 불참했다. 안보에 치중해 온 최근 행보와 달리 국군의 날 기념식에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일정만 접었을 뿐 말까지 닫지는 않았다. 서울 여의도 자택과 국회 의원회관으로 찾아온 기자들도 만났다.

국군의 날 행사 불참하며 ‘시위’
전략공천 압박에도 불가론 고수
개헌 발언·유승민 파문 때와 달리
“국민에게 공천권” 명분 우위 판단
측근들 “과거와 다른 결기 보인 것”


 김 대표는 청와대가 지난달 28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회동한 것을 알리지 않았다고 비판한 데 대해 “(회동 전후) 청와대와 상의했다”고 반박했다. 그러곤 “(청와대의) 찬성·반대 의사는 듣지 않았지만 ‘이러한 방향으로 내가 하려고 한다’고 상의했다. (회동이) 끝나고 난 뒤 발표문을 그대로 (휴대전화로) 찍어 다 보냈다”고도 했다. 다만 해당 청와대 인사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전략공천에 대해서도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 전략공천은 여전히 반대인가.

 “정당민주주의를 하겠다고 약속했고, 그것을 실천하려 할 따름이다.”

 - 당 기구에서 전략공천을 하도록 의견이 모아지면 어쩔 건가.

 “아마 그렇게 안 모아질 거다. 설사 기구에서 그렇게 정해진다고 해도 의총에선 통과될 수 없을 것이다.”

 청와대를 상대로 한 김 대표의 ‘전쟁’은 이번이 세 번째다. 측근들은 “이번엔 과거와 다른 결기를 보인 것이다. 3라운드는 전과 다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1라운드는 지난해 10월의 상하이 개헌 발언 파동이었고, 2라운드는 올해 5월 유승민 전 원내대표 사퇴 파문이었다. 1·2라운드는 모두 김 대표가 청와대의 공세에 물러나는 모습으로 마무리됐다. 김 대표와 가까운 한 재선 의원은 “개헌이나 유승민 문제는 김 대표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공천룰은 김 대표의 정치생명 그 자체”라며 “공천룰 싸움인 3라운드에서마저 꼬리를 내린다면 정치 미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나 안심번호 공천제 등 상향식 공천은 김 대표가 전당대회에서 내세운 공약으로 의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김 대표의 한 측근은 “어제(30일) 의총 전 친박계의 대대적 공세에 대비해 몇몇 의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김 대표가 이번에 또 과거처럼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을 많이 들었다”며 “이런 우려를 아는 김 대표로선 물러설 수가 없다”고 말했다.

 김 대표가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데에는 “명분이 있다”는 자신감도 작용했다고 한다. 공천 방식을 떠나 그가 내세우는 명분은 “공천권을 내려놓고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것이다. 정병국 의원은 “김 대표가 과거 1·2라운드에서 흠집이 나면서도 버텼던 건 바로 공천룰 싸움이란 3라운드를 위한 명분과 힘을 축적하는 과정”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아직 김 대표가 막다른 길을 택한 건 아니라고 측근들은 전했다. 이날만 해도 그는 회의 불참에 대해 ‘칩거’라는 해석이 나오자 “몸이 찌뿌둥해 늦잠을 잤다. 왜 칩거하느냐. (일정 불참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측근 의원은 “김 대표가 무조건 청와대와 각을 세우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청와대의 반응에 따라 김 대표의 대응도 분명히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글=이가영·이은 기자 ideal@joongang.co.kr
사진=김경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