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경영

오늘날까지 거대기업으로 군림한 SK의 방향성인 SKMS를 정립한 최종현 회장

Shawn Chase 2015. 9. 13. 15:04
입력 : 2015.09.13 13:30 | 수정 : 2015.09.13 13:36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형제경영'의 힘 SK 최종건과 최종현 下-①

최종현은 종합무역상사 제도가 도입되면서 한국 경제계의 활발한 기업계열화 전략이 주효하다는 것을 알고 중소기업을 적극 계열화하는 데 서슴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규회사 설립과 계열화 전략에 집중했다. 그 결과 1976년 9월 선경기계, 11월 선경금속 설립, 1978년 경성고무를 인수했다. 1978년 1월 1일에는 선경머린을 설립한다. 1976년 12월 16일 최종현 회장은 폴리에스테르 필름이라는 극미(極微)의 세계에 도전할 목적으로 기존의 선경유화를 선경화학으로 상호 변경하고, 사업목적도 ‘섬유제품 도산매’에서 ‘폴리에스테르 필름 및 합성수지 제조·판매’로 바꾸었다. 그는 계속 선경마그네틱을 설비하고 1977년부터 선경종합건설을 설립, 중동 붐 건설업계 기상도를 바꾸는 꿈을 실현한다.

최종현이 50세 때 정립한 ‘선경경영관리체계(SKMS)’는 이후 경영학계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가 기업 현실을 보면서 기업경영에 대한 오랜 경험과 연구를 기본으로 한 선경인의 경영지침서로서 체계화한 것이다. SKMS는 수년간의 연구와 토의를 통해 산출해 낸 경영관리기법이며 오늘날까지도 SK그룹에서 이어진다. 경영관리체계가 있는 기업은 국내에서 SK가 유일하며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경영관리요소 가운데 일반적으로 경영학에서 등한시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동적요소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동적요소에서는 특히 관리역량을 다루어 일처리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했고, 선경인(人)의 자세를 정하여 경영자로서 갖추어야 할 자격요소로 삼았다. 최종현과 선경의 오랜 경험과 연구, 오랜 노력 끝에 이루어진 독창적 경영기법은 오늘날 세계로 나아가는 SK의 경영관리 요체이다.
1967년 선경화섬 주식회사 기공식. /주간조선
1967년 선경화섬 주식회사 기공식. /주간조선

 

1980년부터 1991년까지의 시기는 최종현과 SK그룹에는 화학공업시대였다. 최종현은 1980~1983년에 걸쳐 기업을 변신시키고, 1984~1988년에는 수직계열화를 위한 대단위 투자로 1989~1991년에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한다. 최종현은 그동안 창업과정에서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확장해 오고 또한 과다한 부동산을 매입해 오며 재무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냈던 선경그룹의 계열기업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동종 업종은 합병을 통해서 중소기업형 업종은 매각으로, 자본참여기업은 자본철수 방법으로 정리하되 누적적자로 재무구조가 부실한 기업은 경영상태가 개선될 때까지 그 정리를 유보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런 방침에 따라 최종현은 1980년부터 3년여에 걸쳐 그룹 산하 22개 기업을 절반인 11개 기업으로 정리하는 기업 변신에 성공한다. 1980년 최종현은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고 대망의 석유사업 진출을 기하면서 국내 경제계를 놀라게 하였으며, 선경은 이를 계기로 오랜 숙원사업이던 수직계열화를 시작한다. 단순 정유업체이던 유공을 종합에너지·종합화학회사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섬유회사이던 선경합섬㈜을 정밀화학회사로 유도하고, 폴리에스테르 필름 생산업체인 선경화학을 마그네틱테이프 제조업체로 확대·발전시켜 나갔다. 이런 최종현의 운영방침은 유공 인수와 더불어 석유제품회사인 홍국상사도 자동으로 인수하게 되었고, 1982년에는 대한석유공사를 유공㈜으로 상호 변경했다.

그 무렵 국내 산업계를 통틀어 매출액 1조원을 돌파한 유일한 기업인 유공을 선경이라는 신생 민간 석유사업자가 인수했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 사건이었다. 그 무렵 박봉환 동력자원부 장관은 국가보위 입법회의에서 “선경의 원유도입 능력과 중동 오일머니 조달능력이 탁월해 유공 최종 인수자로 낙점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선경이 정유사업자의 필수요건인 원료(원유)의 안정적인 공급을 가능케 한 유일한 기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최종현은 1973년 15만배럴 규모의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했었다. 하지만 중동전쟁이 터지면서 정유공장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최종현은 본격적으로 중동을 상대로 오일외교에 나섰다. 정유사업을 위해 중동은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하는 파트너였다. 특히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를 집중 공략했다. 그는 사우디와 무역거래를 튼 뒤 왕실 측근들을 현지 대리인처럼 활용할 정도였다. 그러기까지는 최종현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다. 사우디와의 무역거래에서 손해가 나도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고,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저명인사를 초청해 그 시절 최고급인 워커힐호텔에서 극진히 대접하기도 했다. 마침내 최종현의 이름은 사우디 왕가에까지 알려졌다. 최종현의 오일외교는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랍국 중심으로 결성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아랍의 적대국인 이스라엘과 친하다는 이유로 한국을 석유 수출 금지국으로 분류했다. 이는 한국 경제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난국 타개에 고심하던 정부는 사우디 왕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던 최종현에게 도움을 청했다. 최종현은 사우디 왕실 관계자들을 만나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한국은 그해 12월부터 다시 원유 전량을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공급받게 되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최 회장의 ‘오일외교’는 2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불이 타오른다. 1979년 2월 이란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이란의 석유 수출 중단과 함께 국제 석유 가격이 급등했다. 그 무렵 우리나라 원유 재고는 열흘 분밖에 남지 않았다. 국가 위기 상태였다. 최 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 지인들에게 간곡히 석유를 요청해 그들을 움직였다. 결국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벨기에로 향할 예정이던 5만배럴 물량을 우리나라로 돌린다.

그즈음 다국적 석유기업 걸프는 원유 확보에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다. 걸프는 1962년 우리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최우선 과제로 설립한 한국석유공사의 지분 50%를 갖고 있었다. 1980년 8월 걸프는 자신들이 보유한 유공 지분을 모두 팔아치우고 우리나라에서 철수해 버린다.

정부는 유공 민영화를 결정한다. 그때 유공은 국내 기업 최초로 매출액 1조원을 돌파한 기업이었다. 기업들이 눈독을 들이는 것은 당연했다. 오일쇼크를 겪으며 원유 확보의 중요성을 절감한 정부는 인수 자격으로 원유의 장기적·안정적 확보 능력을 우선적으로 내걸었다. 결국 1980년 12월 선경그룹이 쟁쟁한 대기업들을 제치고 유공 인수자로 최종 결정됐다. 재계 10위 안팎을 맴돌던 선경은 일약 재계 5위로 떠올랐다.
고 최종현 회장의 1980년대 초 가족사진. 오른쪽 끝이 최태원 회장. /주간조선
고 최종현 회장의 1980년대 초 가족사진. 오른쪽 끝이 최태원 회장. /주간조선
1982년 1월 최종현은 유공이 필요로 하는 원유 및 기타 유류의 적정안정수급체계를 확립할 목적으로 유공해운을 설립하고 대표이사 사장에 손길승 경영기획실장을 임명했다. 유공해운은 그해 6월과 7월에 파나마로부터 25만톤급 대형 유조선 2척을 도입, 본격적으로 해운업계에 진출했다. 유공해운은 유공이 도입하는 원유 말고도 셸(Shell)과 에콰도르산 원유 및 브루나이산 원유의 장기운송계약을 체결하고, 국제해운시장에 진출한다. 최종현의 선경은 1984년부터 1988년까지 대단위 투자를 벌여 수직계열화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커다란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1986년 신규 방향족 공장을 준공시킨 데 이어 1987년 10월 폴리에스테르 원료인 DMT/PTA 병산공장의 착공을 시작으로 신규 에틸렌 공장과 폴리올레핀 공장을, 1988년에는 PO(프로필렌옥사이드)/SM(스틸렌모노모) 병산공장과 7월에 OX(옥소자일렌)/PX(파라자일렌) 병산공장을 착공했다. 총 공사비 약 8100억원이 투입되어 1990년에 완공된 이 석유화학 콤비나트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이 시기에 돋보이는 것은 1987년 선경화학을 주식회사 SKC로 상호를 변경, 세계화로 약진하는 지명도 높은 브랜드로 정착시키기 위한 조치이다. SKC는 1983년부터 SKC를 비디오테이프, 오디오테이프, 플로피디스크, 콤팩트디스크 등 광자기 기록매체의 종합상표로 정해 연간 300만달러에 이르는 해외광고로 브랜드 알리기에 힘써 왔고, SKC 상품의 우수성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음에 따라 세계 일류브랜드로서 자리를 굳혀 갔다. 선경그룹은 마침내 1991년 6월 울산콤플렉스에서 제4정유시설을 비롯, 제2에틸렌 생산시설 등 신규 공장 9개 합동준공식을 가짐으로써 원유 개발에서부터 석유화학공업의 하류 부문인 필름·섬유·봉제까지 완전 수직계열화를 이룩한 국내 최초 기업으로 기록된다. 이와 같은 시설의 완공으로 SK는 물론이고 유공 자체로서도 2000년대에 세계적 에너지·화학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세워 나아갔다.

한편 최종현은 1993년 2월 한국 경제계의 총수 자리인 ‘전국경제인연합회’ 제21대 회장에 취임, 그간의 경륜으로 한국 경제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갔다. 그는 전경련 회장 취임에서 밝힌 ‘전경련 운영방침’을 통해, 기업인의 정치참여와 관련해 기업인의 첫째 의무는 기업활동임을 강조하고, 정경분리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정치자금에 대해서는 “현행 정치자금 모금법에 의한 조성에는 협조하되 비공식적인 정치자금은 거두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최종현은 선경의 ‘Globalization과 서비스의 첨단화’를 축으로 하는 경영이익 극대화를 위한 혁신전략(Innovation Strategy)을 적극 추진해 간다. 그의 혁신전략은 의류·생활용품 등 경쟁력을 잃은 부문의 과감한 통폐합을 단행하고, 복합상품 거래·브랜드 비즈니스 등 고부가가치사업 상품을 선정해 시장점유율을 확대해 갔다. 특수시장 진출에도 역점을 두어 소련에 모스크바 지사를 설치하는 한편, 한국 기업 최초로 중국에 북경(베이징)사무소를 열었다.

 

현상유지의 수준을 뛰어넘어 위험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마음가짐과 행동력이 기업가정신의 핵심이다. 기업가정신은 국가경제 전체의 활력을 불러일으키고, 성장의 원동력과 일자리 창출에 중요한 몫을 담당한다. ‘도전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최종현 회장의 경영이념이자 경영철학은 그의 나이 63세가 되어서 그 결실을 보게 된다. 그는 1992년 이후부터 21세기를 앞서가는 선경그룹의 청사진을, 그리고 정보통신시대의 개막을 열었다. 1980년에 들어 최종현은 정보통신사업이라는 새 목표를 세웠다. 이런 구상에 따라 최종현은 1984년 미주경영기획실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신설했다. 그때 한국에는 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법적·제도적 여건도 구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선경은 정보통신사업 선진국 미국의 정보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이용했다. 1990년 10월 선경은 주식회사 YC&C(Yukong Computer & Communication Limited)를 세운다. 설립 초기 YC&C는 주로 워크스테이션 사업과 소프트웨어 개발 판매에 주력했지만, 점차 PC사업 및 MIS 용역 등 관련 분야로의 사업 확대로 시스템통합(SI)사업 진출을 시도했다.

대한텔레콤의 전신인 선경텔레콤은 1991년 4월 설립, 선경의 정보통신 사업 진출 기반의 한 축을 이루었다. 선경텔레콤은 정보통신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용역·교육훈련·경영진단·컨설팅 사업 등을 벌였고, 1992년 6월 대한텔레콤㈜으로 상호를 변경,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에 참여한다. 1990년 7월 정부는 이동통신 분야의 경쟁체제 도입을 주요 골자로 하는 통신사업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했다. 선경은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위한 준비를 착실하게 쌓아 왔었기에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 1992년 1차 심사에 이어 2차 심사에서도 선경이 압도적 차이로 최고점수를 획득, 제2이동전화사업 최종 허가대상 법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정부 발표가 나자 국민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현직 대통령의 인척 기업에 엄청난 이권이 걸린 사업을 허가한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었다. 이에 1992년 8월 27일 선경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반납, “오해를 받을 우려가 없는 다른 정권 아래에서 실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아 이동통신사업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최종현은 1992년 사업권 반납결정에 이어 다시 한 번 대승적 차원의 결단을 내린다. 그는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포기하고 3500억원 안팎의 막대한 인수자금이 예상되는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서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두고 다른 기업과 경쟁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주식의 경쟁입찰에 참여해 한국통신이 보유한 주식의 23%인 127만5000주를 시가를 훨씬 웃도는 가격인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한다. 일부에서는 한국이동통신의 내정가격을 낮추기 위해 선경그룹이 한두 차례 유찰시킬 것으로 예상했으나 최종현이 직접 나서서 유찰을 막고 입찰가격도 예상보다 1500억원 넘게 더 올려 정하도록 했다. 10년 동안 준비해온 사업이었기 때문에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국이동통신은 이후 ‘SK텔레콤’으로 사명을 바꾸고 정보통신사업의 선두주자로 성장한다. 그 바탕에는 세계 최초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CDMA) 상용화라는 신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단군 이래 가장 큰소리 칠 만한 기술’이라고 할 만큼 CDMA 상용화는 오늘날까지 한국이 정보통신강국으로 손꼽히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CDMA 신화’를 SK텔레콤 홀로 이루어낸 것은 아니지만, SK텔레콤이 기술 발주자로서 주도 역할을 했음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경그룹은 SK로 이름을 바꾸고 패기와 열정으로 세계적 정보통신·에너지기업으로서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칼럼니스트이며 현대사상가인 월터 리프먼을 꿈꾸던 최종현은 시카고대학에서 만난 홍사중과 막역한 사이였다. 대논객이 된 홍사중이 권한 박두진의 시 ‘전율의 수목(樹木)’. 그는 일상의 막막함이 차오를 때 그의 나무를 심는 마음을 읊고는 했다.

‘반짝이며 파들대는 잎잎들의 전율/ 잎잎들의 눈, 잎잎들의 마음, 잎잎들의 정혼의/ 그 푸른, 먼, 미지의 갈망 위의/ 황홀한 몸짓이여’.

SK그룹은 30여년 동안 한결같이 나무와 숲을 정성껏 가꾸고 있다. 최종현은 사재로 SK임업의 전신인 서해개발주식회사를 1972년 설립해 충북 충원의 임야 약 2000만㎡(650만평)에 가래나무 등 150만그루를 심었다. 서해개발은 대학원 중심의 대학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이다. 가래나무가 수익성이 높아 20년 뒤면 고급목재로 활용할 수 있고 그 수익으로 재단 및 대학운영비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림사업은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주위의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최종현은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무를 심는다’며 자신의 뜻을 이해시켰다. SK가 전국에 보유한 조림지는 4100여ha(약 1200만평)이다. 남산 13개 또는 여의도의 5배에 달하는 면적이다. 이들 임야에는 팔만대장경에도 쓰인 고급 수종인 자작나무를 비롯해 조림수 40여종, 조경수 80여종 등 390만그루가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