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및 연예

무애 양주동의 생애와 작품세계 *

Shawn Chase 2015. 9. 7. 23:00

* 무애 양주동의 생애와 작품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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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동(梁柱東, 1903-1977). 호는 무애(无涯). 시인, 국·영문학자.  양주동은 음력으로 1903년 6월 24일 경기도 개성에서 아버지 남원 양씨 원장(元章)과 어머니 강릉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그 이듬해 황해도 장연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한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 두 살 때 어머니마저 여읜 천애의 고아가 된다.
  
   양주동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18세)년에 신학문을 배우려고 상경하여 중동학교 고등속성과에 입학한다. 그는 수학과 영어 학습에 열중하면서 1년 만에 중학교 전 과정을 마친다. 1928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조도전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뒤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 1940년부터 경신학교 교사를 지냈다.

   광복 후 동국대학교 교수가 되고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으며, 1957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8년 연세대학교 교수에 취임하였다가 1962년 다시 동국대학교로 옮겨 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젊었을 때에는 영문학을 강의하면서 시인 및 문학이론가로서 활약하였다. 《금성(金星)》 동인으로서 민족주의적 성향의 시를 썼다. 1928(26세)년에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다. 이듬해에 그는 <조선의 맥박>이라는 시를 발표한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30(28세)년에  시집 ≪조선의 맥박≫을 상재한다.

  한편 신라향가에 대한 연구가 일본인 학자에 의해 주도된 데 비분, 1937년부터 고증학적인 향가의 해독에 몰입하면서 고시가(古詩歌)의 주석에 전렴하는 국학자로 전신하였다.

  그는 1937(35세)년 ≪청구학총(靑丘學叢)≫ 제19호에 <향가의 해독, 특히 원왕생가에 취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일본 학계의 아성을 극복하고 한국학계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1942년에는 한국에서 최초로 향가 25수 전편을 해독한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출간하였다.
1947년에는 고려가요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한 《여요전주(麗謠箋注)》를 출간하였다.
  
    양주동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크게 성취한 것은 한국인의 옛 노래를 연구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역저로 향가를 연구한 ≪조선고가연구≫와 고려가요를 연구한 ≪여요전주≫ 이 두 책은 그가 성취해낸 학문을 대표하는 결과물이다.

   양주동의 업적에는 유달리 많은 칭호가 뒤따른다. 타고난 천재적 재질과 남다른 창작욕과 학구욕이 그런 다양한 이름을 남겨 놓은 것이다. 그는 한국문학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 시대가 한국문학을 위해서 양주동을 불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양주동은 한국문학을 올바로 읽고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물론 그 독창성과 세계성을 발견해 내면서 그것을 가르쳤으며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시와 수필을 쓰고 비평을 하는 한편 외국문학과 한국문학을 번역과 번안으로 소개하면서 다른 하나의 광활한 지평을 열어나간 이다. 그는 민족의식과 극일 사상으로 척박한 한 시대를 개척해나간 비범한 문화인이라 할 수 있다.

   양주동은 한국문학 연구의 1세대 학자로 우리나라의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 방종현, 이희승, 조윤제, 이병기 등과 일본의 금택장삼랑(金澤庄三郞),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 소창진평(小倉進平) 등이 그와 같은 시대의 학자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한국문학 연구로 일관한 대표적인 학자는 양주동과 조윤제, 이병기 세 사람뿐이다. 양주동은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한국 고시가 주석에 큰 기여를 하였다.

   양주동의 학문은 그 수단과 방법으로는 국어학이지만, 목적은 국문학 곧 고전시가 연구이다. 그 중에서도 향가와 고려가요의 연구이다. 양주동의 많은 학술 논저들 중 한국 고시가연구와 무관한 것은 5∼6종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논저들이 향가와 고려가요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양주동의 한국 고시가연구 업적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는 해독과 주석의 어학적인 연구이고, 둘째는 그 밖의 것을 총괄하는 문학적인 연구다. 양주동이 대학에서 전공한 서구문학 연구를 뒤로하고 한국문학 연구를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당시의 상황논리로 볼 때 일본을 이기고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극일의 유일한 방법은 학문뿐이라는 판단에 있었다.

   이처럼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무장된 정신세계와 동서양을 아우르는 탁월한 문학적 소양, 그리고 당시로서는 새로운 연구방법이 동원되어서 향가와 고려가요의 성공적인 문학적 주석이란 미증유의 결실을 만들어냈다. 양주동은 한국의 고시가연구에 대한 튼실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양주동을 일컬어 당대를 대표하는 국어국문학자라고 한다.  

   양주동은 "어려서부터 평소의 야망은 오로지 '불후(不朽)의 문장'에 있었으매, 시인, 비평가, 사상인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는 묵자, 순자, 공자처럼  '양자(梁子)'가 되어 위대한 사상가의 반열에 들기를 열망하였다.  

   그의 시집 《조선의 맥박》(1932)에는 시가 53편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시가 ≪조선의 맥박≫ 출간 이후에 발간된 사화집에 거의 수록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가 우리 문학에서 높이 평가되었는지 알 수 있다 .  

   또한 양주동은 수필 다음으로 많은 분량의 비평적 단문을 발표한 바 있다. 염상섭(廉想涉)과 함께 《문예공론》을 발간하여 본격적인 평론활동을 벌였는데, 특히 경향파의 기수였던 김기진(金基鎭)과의 문단논쟁은 유명하다.

   그의 비평적 산문은 대체로 그 길이가 짧고, 논쟁적인 내용이 많으며, 논지에서 자주 이탈하면서까지 지식과시형의 진술이 많고 주제에 관련된 논의보다 어휘와 부분적 국면에 대한 훈고학적 미세 담론이 우세한 비평적 양상을 흔히 드러내고 있다.

   광복 후에는 문학평론·시는 거의 발표하지 않았고 영문학분야에 있어서도 활동이 드물었으나 향가의 해독과 고려가요의 주석에 대한 정정과 보충을 지속하면서 문필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저서로 《조선고가연구》 《여요전주》 《국학연구논고》 《국문학고전독본》 등이 있고, 시집 《조선의 맥박》, 수필집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 《인생잡기》, 번역서 《T.S. 엘리엇 시선집》 《영시백선(英詩百選)》 《세계기문선(世界奇文選)》 등이 있다.


    그의 대표작 <조선의 맥박>을 보면,


    한밤에 불 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잠잠할 때에,
    나는 조선의 힘 없는 맥박을 짚어 보노라.
    나는 임의 모세관, 그의 맥박이로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훤한 동녘 하늘 밑에서
    나의 희망과 용기가 두 팔을 뽑낼 때면,
    나는 조선의 소생된 긴 한숨을 듣노라.
    나는 임의 기관이요, 그의 숨결이로다.

    그러나 보라, 이른 아침 길가에 오가는
    튼튼한 젊은이들, 어린 학생들, 그들의 공 던지는 날랜 손발, 책보  낀 여생도의 힘 있는
    두 팔
    그들의 빛나는 얼굴, 활기 있는 걸음걸이
    아아! 이야말로 참으로 조선의 맥박이 아닌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갓난아이의 귀여운 두 볼
    젖 달라 외치는 그들의 우렁찬 울음, 작으나나 힘찬, 무엇을 잡으려는 그들의 손아귀
    해죽해죽 웃는 입술, 기쁨에 넘치는 또렷한 눈동자 -
    아아! 조선의 대동맥, 조선의 폐는 아기야 너에게만 있도다.


    <주> "문예공론" 창간호(1929.5)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