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8.18 15:51 / 수정 2015.08.18 18:56
‘2014년 여름 파키스탄. 한밤중에 도움을 청하는 다급한 목소리에 진료소 문을 열었다. 출산이 임박한 산모가 숨을 헐떡이며 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 진찰대에 눕힌 뒤 살펴보니 아이의 팔 하나만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꺼멓게 변한 팔을 보니 괴사, 아이는 사산된 것이었다. 산모라도 살리려면 빨리 사산아를 빼내야 했다. 산모에게 무리가 될 수 있는 제왕절개는 할 수 없었다. 아이를 밖으로 꺼내기 위해 조심스럽게 자궁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사산아라고 생각했던 아이가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한 팔을 잃고도 아이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국제 인도주의 의료구호단체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세계 각지에서 구호 활동을 벌이고 있는 산부인과 전문의 이선영(48·여)씨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순간이다. 여성 한명이 보통 10명 이상의 자녀를 낳지만, 산모 10만명 중 300명은 사망하는 파키스탄의 상황을 감안하면 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한 것은 기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세계 인도주의의 날(8월19일)을 하루 앞둔 18일 만난 이씨는 “인도주의라고 하면 굉장히 도덕적인 사람들, 테레사 수녀님 같은 분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한국의 종합병원이든, 밖에서 총소리가 나고 기온이 섭씨 40도까지 치솟는 진료소이든 나를 찾아온 환자와 마음이 통하고, 그 관계 속에서 도움을 주고, 그를 통해 환자가 만족하면 의사로서 그 이상의 기쁨은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가톨릭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석·박사를 취득했고, 하버드 의대 연구원을 거쳐 분당 차병원에서 부인암센터 교수로 일해왔다. 구호활동에 뛰어든 것은 2012년.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이씨는 “명의로 이름을 날리고, 언론에도 소개되고, 논문도 많이 기고하는 것이 많은 의사들의 바람일텐데 어느 순간 그게 멋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말도 못하고, 내가 못났다는 걸 속이고 사는 게 ‘찌질’하다고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그는 “내 의술을 창피하지 않게 쓸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어 여러 구호 단체의 문을 두드렸고,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왔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상황이 됐고, 오지 봉사를 택한 것이 큰 선물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의사로서는 20여년 경력의 베테랑이지만, 의료구호활동은 이제 4년차 새내기.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씨는 처음 파견됐던 나이지리아에서 산모가 대부분 10대 소녀들인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그는 “대체 여기가 산부인과인지, 소아과인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질 누공으로 소변줄을 끼는 등 심각한 상황까지 돼서야 병원을 찾은 환자들이 많았다. 평생을 고생을 해야 하는 건데, 그 상황에서도 또래 친구들과 모여 이야기하며 까르르 웃는 해맑은 소녀들의 모습이 마음 아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소녀들도 어머니였다. 이씨는 “한국에서는 빈혈이라고 할 때 혈액 농도가 50% 정도면 심각한 악성이라고 판단하는데, 농도가 10%인 산모가 있었다. 말기암 환자도, 심지어 막 사망한 사람의 혈액도 이정도 농도는 아니다”라며 “그런데 무사히 아이를 낳고, 젖을 물리더라. 이걸 말릴 수도 없고, 모성은 다 같단 사실을 느꼈다”고 했다.
곧이어 파견된 남수단에서 이씨는 말 그대로 피를 나누는 경험도 했다. 패혈증으로 수혈이 필요한데, 말라리아 창궐 지역이라 혈액을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씨는 “정말 내일 정도면 환자가 죽겠단 생각이 들었다. 규정상 없는 일인데, 내 피라도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녀가 내 앞에서 죽는 것은 보기 싫다는 의사로서의 오기가 발동했다”고 말했다. 1pt(약 500ml)의 피를 뽑아 수혈했고, 소녀 산모는 살아났다. “그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는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다. 암조직을 깔끔하게 들어냈을 때보다 더 기뻤다. 그 가족들은 나에게도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했다. 내 피를 나눈 아이가 앞으로도 잘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현장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구호활동의 의미 아닐까 싶다.”
2013년 라오스에서는 그야말로 길바닥에서 아이를 받아야 했다. 쌍둥이를 임신한 산모인데, 아이 하나가 나오고 나서 며칠이 지나도 다른 아이가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모가 사는 곳이 너무 깊은 산속이라 갈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산모의 아버지가 이불에 딸을 감싸서 오토바이에 싣고 산길 중간까지 내려와 의료진과 만났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데 불빛 하나 없는 수풀 속에서 아이를 꺼내야 했다. 이씨는 “산모, 아이 다 무사했는데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감동을 채 다 느끼기도 전에 모기떼가 피묻은 손에 달려들더라”며 웃었다.
최근 파견됐던 곳은 레바논 베이루트에 있는 난민촌 샤틸라 캠프였다. 팔레스타인 난민과 시리아 난민들이 레바논 정부의 묵인 하에 생활하는 자치 지역이다. 인구밀도가 너무 높아 텐트 진료소조차 따로 지을 수 없어 폐가에 자리를 잡고 구호활동을 해야 했다. 이씨는 “수술 장비 등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주로 외부 병원 이송이나 현지의 조산사나 의료활동 가능 인력을 훈련시키고 지원하는 일을 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시리아 본국에서 의사로 일했던 이들을 보면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저들에게 일어난 것 뿐이란 것을 알게 됐다. 그들도 나처럼 의사면허를 따고 미국까지 가서 유학했던 이들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처럼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 의료진은 현재 30여명 정도 된다. 한국사무소는 2012년에 문을 열었지만, 한국 의사들의 구호활동 참여는 2004년부터 시작됐다.
이씨는 앞으로도 세계 각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들을 찾아다닐 생각이다. 구호활동을 먼 이야기로만 생각하는 동료 의사들에게 이씨는 이렇게 조언했다.
“한국에서나 오지에서나 저와 환자의 관계는 같습니다. 아프리카 하늘 아래라고 더 감동적이고, 한국에서 하는 진료라고 따분하지는 않죠. 모든 의사들이 험지에 가서 의료봉사를 할 필요도 없고요. 다만 어느 순간 환자를 보는데 내 자신이 자랑스럽지도 않고, 환자가 나를 통해 만족스러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올 거에요. 그 때는 한번 구호활동을 생각해보세요. 잃었던 ‘무언가’를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사진=국경없는 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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