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아베가 자초한 ‘세계 지식인 연대’

Shawn Chase 2015. 8. 4. 13:39

[오피니언] 시론-장재선 사회부장

게재 일자 : 2015년 08월 03일(月)

 

장재선 / 사회부장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역사 역주행이 참 큰일을 했구나.’ 최근 세계 지식인 528명이 일본의 과거사 반성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을 내는 것을 보며 이런 역설을 생각했다. 성명은 아베 총리가 지향하는 패권주의가 아시아 평화를 깨트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과 일본 지식인이 앞장선 성명 발표에 미국, 유럽 학자들까지 대거 동참했다. 아베의 우경화가 세계 지성인들의 ‘올바른 역사’ 연대를 낳은 셈이다.

이런 움직임 앞에서 최근 불거진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 씨 발언 파문은 사소할 수밖에 없다. 박 씨는 위안부 문제와 신사참배에 대해 일본 입장을 이해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일 우익의 군사확장주의와 그 위험성을 간과한 접근이다. 한·일 관계 해법의 본질은 자강(自强)임을 강조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일본 역사수정주의를 거드는 것으로 비친다. 이런 개인의 발언을 일부 세력이 이념 대결로 몰고 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속 보이는 작태다.

이번에 세계 지식인 성명에 참여한 인사들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국적뿐 아니라 이념적 지형을 넘어서 뭉쳤다는 것이다. 우선 성명을 주도한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와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東京)대 명예교수의 하모니가 뜻깊다. 국내 대표적 역사학자인 이 교수는 서울대 교수를 정년 퇴임하며 “1980년대에 좌(左) 편향 역사관을 지닌 제자들을 학교 밖으로 내보낸 데 대해 회한이 많다”고 밝혔다. 이 발언과 관련, 그는 일부 좌파 인사들로부터 극렬한 비판을 들어야 했다. 이 교수는 그런 공격에 타면자건(唾面自乾·얼굴에 묻은 침을 닦지 않고 절로 마르게 함)의 자세로 응대하며 역사 연구자로서 한일강제병합 과정의 불법성을 밝히는 데 천착해 왔다. 와다 교수는 북한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역사학자다. 일본의 대표적 좌파 지식인으로 자국 내 우파 세력의 공격 대상이 돼 왔다.

이런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세계 지식인 성명을 이끌어낸 것은, 아베 정권의 우경화를 더 두고 볼 수 없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베 총리가 한·일 지식인의 우호에 기여했다고나 할까.

이번 성명에 동참한 언어학자 놈 촘스키와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세계적 석학으로, 진보 좌파의 거물들이다. 이들과 함께 성명을 낸 국내 지식인 중엔 평소 좌파에 비판적이었던 보수 우파 인물들이 있어서 눈길을 끈다. 평화를 위협하는 일본의 행태 앞에서 이념적 지형을 넘어서 뜻을 함께한 것이다.

이번 성명에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이 참여한 것은, 일본을 압박하는 차원에서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사회를 지향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표방해 온 일본 정치인들은 서양인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무겁게 여긴다. 아베를 비롯한 일 우익들은 그동안 한국인들의 비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으나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서양 지식인들의 목소리엔 본능적으로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향후 일본 패권주의를 저지하는 세계적 연대를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 미국이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구사하며 일본과 가까워지고, 중국이 일본과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는 동북아 정세에 비춰 보더라도 이 연대의 중요성이 크다. 세계 열강이 일본 우경화를 좌시하면 머지않아 전쟁의 위험을 초래할 것임을 세계적 연대를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해야 한다.

아베 총리가 곧 발표하는 ‘종전 70주년 담화’에 세계 지식인 성명이 주장한 대로 ‘미래를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는’ 내용을 담을지는 알 수 없다. 기존에 식민지 침략을 반성했던 일 정부의 담화들보다 더 진전된 내용을 담으라는 요구를 그가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간의 행보와 모순되는 탓이다.

그럼에도 아베 총리의 고민이 깊다고 하는데, 안보법안 등에 대해 군국주의 부활을 우려하는 자국민의 반발이 커지고 있어서라고 한다. 최근 일본 시민사회 움직임을 보면, 전쟁 반대 세력이 꽤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은 일본(better Japan)을 위해서는 올바른 일본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시민들이다. 그들과 함께 세계적 연대를 확산시키는 방법을 모색할 때다. 세계 지식인 성명이 강조한 대로 적대감을 앞세우는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휴머니즘이 이 연대의 바탕이 돼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