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北김양건 노동당 비서 29일 교통사고로 사망...'권력암투說'도 제기돼

Shawn Chase 2015. 12. 30. 08:53

이동휘기자

 

입력 : 2015.12.30 07:27 | 수정 : 2015.12.30 08:28

김양건 노동당 비서/조선일보DB

북한 김양건 노동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 29일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향년 73세다.

김양건 비서가 지난 29일 오전 6시 15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30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김양건 비서는 지난 8월 북한의 서부전선 도발 이후 진행된 남북 고위급 접촉에 나왔던 인물이다. 김양건 비서는 우리 군의 대북 확성기 방송을 '피 흘리지 않고' 중단시킨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김정은의 '외교 브레인'으로 알려진 김양건 비서는 지난 2007년부터 9년간 대남뿐 아니라 대외 분야를 총괄해왔다. 김정일 체제에서 국제부장을 거쳐 대남비서를 하면서 대중국 외교 등을 외교 전반을 관장해왔다.

이날 조선중앙통신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위원인 당 중앙위원회 비서 김양건 동지는 교통사고로 주체104(2015)년 12월29일 6시15분에 73살을 일기로 애석하게도 서거했다"고 전하며 "수령에 대한 고결한 충정과 높은 실력을 지니고 오랜 기간 우리 당의 위업을 충직하게 받들어온 김양건 동지를 잃은 것은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큰 손실로 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김양건 비서의 사망을 두고 일각에서는 권력 암투에 의해 숙청을 당한 것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과거 북한은 권력 암투 과정에서 제거된 인물이 있을 경우 '교통사고' 등으로 위장하거나 관련 내용을 비밀에 부쳐왔다.



 北의 '대남(對南)정책' 총괄한 김양건 노동당 비서는 누구?

이동휘 기자

 

입력 : 2015.12.30 07:36 | 수정 : 2015.12.30 08:20

남북 고위급 접촉이 타결된 지난 8월 25일 새벽 회담장인 판문점 우리 측 평화의 집에서 홍용표 통일부 장관(왼쪽부터)과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김양건 북한 노동당 대남비서가 웃으며 얘기하고 있다. /통일부 제공


지난 29일 사망한 북한 김양건 노동당 비서는 지난 8월 남북관계가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는 최악의 상황에서 남북 고위 당국자 접촉에 나온 인물이다. 당시 북한은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김양건 비서를 회담에 내보내 남북 대화 의지를 나타냈다.

김양건 노동당 대남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은 '대남정책의 1인자'로 흔히 분류된다. 또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최측근 실세로 '이너 서클(inner circle·중추세력) 멤버'라고 할 수 있다.

1942년 평안남도 안주 출생인 김양건 비서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당중앙위원회 국제부에서 지도원, 부과장, 과장, 부부장, 과장의 직책을 맡으면서 외교업무 경험을 쌓았다. 지난 2007년 초 통일전선부 부장으로 임명됐다.

김양건 당 비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부터 북한의 대남 및 외교정책 전반을 관장해온 베테랑이다. 노동당 국제부의 말단 관료로 시작해 국제부장을 거쳐 통일전선부장 그리고 대남 담당 비서로 승진을 거듭하며 한번도 좌천한 적이 없이 줄곧 출세 가로를 달리고 있다. 그는 올 들어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북한 매체들은 지난 8월 남북 고위 당국자 접촉에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김양건 비서가 참석한 소식을 보도하면서 김양건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소개했다.

노동당 정치국은 김정은·김영남·황병서 등 3명이 맡고 있는 상무위원에 이어 위원, 후보위원 순으로 서열이 구성된다.

김양건 비서는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북측 주역으로, 당시 북측에서 회담에 유일하게 배석해 김정일 위원장을 단독 보좌했다.

지난 2007년 11월에는 통일부 장관과 국정원장의 초청으로 남한을 방문해 노무현 대통령과 면담을 가졌으며, 2009년 8월에는 고 김대중 대통령 조문을 위한 북측 사절단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외교분야에 대한 지식과 세련된 매너, 인품으로 과거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으며 짧은 기간에 실세로 급부상한 그는 김정은 정권 들어서도 대남 정책을 여전히 총괄하고 있다.




 

 

 

 

 

 

 

노무현 때 우리와 5대 1로 맞붙었던 김양건, 이명박 정부 출범후 추락

이동휘 기자

 

입력 : 2015.12.30 07:59 | 수정 : 2015.12.30 08:07

지난 29일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 김양건의 위상이 가장 높던 시절은 노무현 정부 때였다. 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이 당시 우리측 배석자가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이재정 통일부 장관,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백종천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등 5명이었던 데 비해 북측은 김양건 혼자였다. 발언 횟수도 오전과 오후 회담에 걸쳐 41차례에 달했다. 우리측 이재정 장관(29차례)과 김만복 원장(16〃)의 발언을 합친 수준이었다.

내용은 주로 김정일의 질문이나 지시에 간략히 답하는 것이 주를 이뤘지만 김정일의 발언을 부연해 설명하기도 했다. 김정일이 나선 특구에 대한 중국의 관심을 언급하며 “흑룡강성 같은 거는 바다 끼고 나갈라니까”라고 말하자 김양건이 “길림성도 같습니다”라고 덧붙이는 식이다.

또 김만복 원장이 김정일에게 “농업협력과 보건의료 협력도 다루어 주시기 바란다”고 부탁하자 김양건이 중간에 치고 들어와 “그거 어차피 농업·보건은 내각에서 하는 일”이라며 “부총리급에서 이제 새로운 협상기구를 내놓으면 거기서 포괄적으로 하는 게 합리적인 걸로 본다”고 하기도 했다.

6자회담 북측 수석대표였던 김계관 외무성 부상(현 제1부상)을 회담장(백화원 영빈관)으로 불러 6자회담 결과를 들어보자고 제안한 것도 김양건이었다. 김양건은 또 노 대통령이 “심심할 때 보시라”며 김정일에게 건넨 보고서를 “저한테 주십시오”라며 가져가기도 했다.

대북 소식통은 “김양건이 북한의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인물일 뿐 아니라 김정일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측근임을 보여준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에 근무한 전직 관리는 “대통령부터가 김정일을 상전 취급한 데다, 장관급 3~4명이 김양건 앞에서 쩔쩔맸다”며 “북한이 우리 정부를 우습게 본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김양건이 부장으로 있는 통일전선부는 남북 간 대화·교류·협력 외에 대남 공작, 대남 선전·선동 등 심리전, 한국 내 종북세력 지원 등 대남 사업 전반을 총괄하는 부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에 힘입어 노동당 내에서의 위상도 상당히 높아졌다. 2차 정상회담이 열렸던 2007년 10월은 통전부와 김양건의 위세가 극에 달했던 시기다.

하지만 2007년 12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 후 사정이 달라졌다. 우선 “남조선 정세 판단에 실패했다”는 비판에 따라 통전부에 ‘숙청 회오리’가 몰아쳤다. ‘실세’로 불렸던 최승철 부부장 등이 이때 실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 중단을 시작으로 남북 교류·협력사업들이 하나둘 중단되며 남북 경색국면이 조성되자 통전부의 입지는 더 좁아졌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8월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로 통전부는 급속히 힘이 빠졌다. 북한 내부가 혼란한 틈을 타 군부 강경파가 득세하며 대남 사업 주도권을 가져간 것이다.

2008년 11월에는 통전부 관할인 개성공단에 현역 군인인 김영철 당시 국방위 정책실장이 총을 차고 들어와 우리 기업인들에게 “나가라”고 협박하는 일도 벌어졌다. 특히 2009년 2월 기력을 회복한 김정일이 당과 군에 흩어져 있던 대남 공작 부서들을 통·폐합해 정찰총국(총국장 김영철)을 만들면서 통전부는 대남 사업에서 더욱 소외됐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김양건이 북한 조문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온 것은 통전부의 추락한 위상을 살려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전직 통일부 관리는 “김양건은 현인택 통일부 장관으로부터 대규모 식량 지원 약속을 받아내 명예회복을 노린다는 계산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미련을 못 버린 김양건은 그해 10월 싱가포르에서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을 비밀리에 접촉해 대규모 식량 지원 등을 포함한 3차 정상회담 문제를 논의했으나 최종 결렬됐다. 2010년 1월에는 외자 유치를 하겠다며 조선족 사업가 박철수를 끌어들여 대풍그룹을 출범시켰지만 아무런 실적을 내지 못했다. 현재 대풍그룹은 와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정부가 끝나고 박근혜 정부 2년차에 접어든 최근까지도 통전부는 예전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통일부 관리는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북한이 조문단을 파견했을 때와 지금 상황이 상당히 유사하다”며 “이번에 회담이 잘 되면 통전부가 기지개를 켤 수 있겠지만, 잘 안 되면 계속 군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