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치

“文폭주 막으려 마지막으로 한 일… 대권도전? 내 나이가 몇인데”

Shawn Chase 2021. 4. 11. 13:14

[아무튼, 주말-김윤덕 기자의 사람人]
4·7 재보궐선거 대승으로 이끈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김윤덕 주말뉴스부장

입력 2021.04.10 03:00 | 수정 2021.04.10 03:00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81세. 숟가락 들 힘도 없어진다는 나이에 폭주하는 권력의 고삐를 잡아젖혔다. 재주복주(載舟覆舟). 배를 띄우기도, 뒤집기도 하면서 대한민국 정치의 판세를 바꾸는 손. ‘독불장군’ ‘차르’ ‘상왕’이라 불리는 팔순 노인에게 이젠 30~40대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41대 0. 서울·부산 시장 재보궐선거 출구조사 결과 발표 직후 페이스북에는 40대 남성이 상심한 또래 페친들에게 쓴 ‘김종인 분석 글’이 화제가 됐다. 김종인을 “정치권의 고액 단타 과외 선생”으로 정의한 그는 “민주당의 압도적 패배 뒤엔 김종인이 있었다”며 “진영을 오가며 가는 곳마다 승리를 이끈 김종인의 특기는 특정 진영의 헤게모니를 흐트러뜨리는 것”이라고 썼다.

“김종인 목표는 킹메이커 아닌 킹”이라는 대권 도전 전망도 나왔다. 김미경(76)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아유, 나이가 몇 살인데 염치가 있지, 오십대도 아니고”라며 펄쩍 뛰었다. 선거 날이던 7일 전화 통화에서다. 김 교수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유일한 최측근”이라고 부르는 아내. ‘킹’ 운운하며 남편을 조롱한 정청래 의원에 대해서는 “한번 만나서 뭐라고 해주고 싶은데 참아요, 참아” 하며 웃었다. 김미경이 보는 김종인은 “체격이 크고 목소리가 커서 그렇지 드라마 보면서 우는 사람, 고1 손자에게 절절매는 사람”이다. “매일 아침 여의도로 출근할 때 이 나이에 무슨 짓이냐며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나라 위해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다’ 생각하자며 넥타이를 매줬다”고도 했다.

8일 비대위원장 역할을 마감한 뒤 광화문 개인 사무실로 돌아온 김종인 역시 ‘대권’이란 단어에 손사래를 쳤다. “사람이 칠십이 넘으면 덤으로 사는 거요. 나이 팔십에 당장 내일이 어떨지 모르는 사람이 무슨….” 무거운 짐을 내려놔서인지 바위 같은 얼굴에 미소가 자주 번졌다.

 

김종인 전 국민의 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들은 ‘세금의 정치’를 몰랐다

-압승이다. 출구조사 발표 직후 오세훈 후보는 울던데 위원장님은 덤덤하더라.

“내가 울 일이 뭐 있나. 오세훈이야 10년 만의 승리이니 감격에 겨웠을 거고. 승리를 예상했기 때문에 놀랄 것도 없었다(웃음).”

-선거 직전 ‘큰 차이로 이길 거다’ 예언하시던데.

“유세장엘 다녀보면 안다. 여론조사가 보여주는 수치와 달리 몸으로 느끼는 열기가 따로 있다. 그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4년 동안 성취한 게 없지 않나. 선거에서도 네거티브만 일삼는 폐습을 거듭하더라.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 그랬겠나.”

-민주당의 결정적 패인이 뭘까.

“그들이 ‘세금의 정치’를 몰랐다는 거다. 세금이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줄 모르고, 무턱대고 부동산 투기 잡는다고 세금 올리고, 공시지가 올리고. 조세 저항에 대한 감이 전혀 없더라. 성추행에 세금 폭탄까지 터졌으니 질 수밖에.”

-국민의힘 승리도 자력이라기보단 LH 사태, 아파트 공시가 폭등, 방역 불안 등 반사이익 덕분 아닌가.

“야당은 원래 여당의 실수를 먹고 산다. 여당이 계속 잘하면 야당에 무슨 희망이 있겠나, 하하!”

-그래도 퇴임하면서 ‘국민의 승리지 국민의힘 승리 아니다'라고 쓴소리하셨다.

“갑자기 압도적으로 이겨서 흥분 상태일 거다. 뭐가 된다 싶으니 욕심 부리는 사람 많아질 거고. 상당한 진통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이 진짜 변했다는 걸 인식시키지 않고서 계파 싸움이나 하면 국민이 바로 외면해버릴 거다.”

-김무성·이재오·홍준표·김문수 같은 정치인들이 국민의힘을 망쳤다고도 했다. 친박·친이와 결별해야 산다고 보시나?

“다음 대선엔 자기들이 무슨 큰일을 할 수 있는 양 간섭하는 사람들이 확 줄었으면 좋겠다. 이번 단일화 과정에서도 자기네가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날 공격하던데, 효과가 전혀 없지 않았나. 젊은 세대들이 당을 쇄신하며 끌고 갈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승리했는데 왜 나가시나? 당권을 쥐셔야지.

“지난해 내가 미래통합당에 갈 땐 4·15총선에서 참패한 이 당을 제대로 추스를 수 있을까 회의가 많았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의 폭주는 막아야 하니 야당이 다음번 대통령 선거를 준비할 수 있을 정도의 기반은 만들어줘야겠다, 그때까지만 한다고 했던 거다. 우연치 않게 박원순 사건이 터졌고, 그것이 국민의 힘을 살릴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국민의힘 후보로 단일화하는 것도 관철시켰고. 대선을 위한 필요 조건은 확립했으니 약속대로 물러나는 거다.”

-붙잡으면 바로 돌아올 듯한 뉘앙스다.

“당대표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라도 내가 물러나야지. 나는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상황 바뀐다고 돌아가거나 하는 일은 없다.”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온갖 욕을 들었다. 속좁은 꼰대, 상왕, 낡은 리더십이란 비판에 이어 사퇴하라는 요구까지.

“나는 국민의힘 대표였다. 국민의힘에서 후보를 만드는 게 내 책무 아닌가. 언론까지 내 이름을 걸고 비판하는 칼럼을 쓰고, 우리 집 앞에 와서 데모하는 당원들도 있던데 다 무시했다. 그런 데 끌려다니면 아무것도 못 한다.”

-오세훈으로 단일화될 거란 확신이 있었나. 여론조사는 줄곧 안철수가 1위였는데.

“내가 국회의원 할 때 여론조사 책임자로 2년을 일했던 사람이다. 밖에서 막연하게 여론조사 결과를 바라보는 사람과 하나하나 요소를 따져서 결정하는 우리와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작년 12월부터 팔로업하면서 지켜봤고 나경원이든 오세훈이든 단일 후보를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근거 없이 내가 밀어붙이는 게 아니다.”

-오세훈을 결국 후보로 만들고야 만 뚝심에 놀랐다.

“오세훈도 한동안 많이 흔들렸다. 주변에서 하도 압력을 가하니까. 그래서 정치인이 그렇게 허약하면 안 된다, 힘들면 (압력)전화 받지 말라, 욕은 다 내가 먹겠다고 했다.”

-안철수 후보는 왜 그리 미워하셨나?

“내가 그 사람 미워할 이유가 없다. 2011년 8월 처음 만나 지금까지 봐오면서 정치에 대한 생각이나 방식이 계속 어긋났을 뿐이다. 국민의힘 대표로서 단일화에 내가 할 수 있는 총력을 다한 것뿐이다.”

-비대위원장 1년, 스스로 몇 점 주시겠나. 개인적으로 5·18 광주 묘역에 무릎 꿇은 모습이 가장 인상 깊었다.

“작년 6월에 와서 10개월 하고 8일 됐다. 당명부터 바꾸고 미래 지향적인 정책 정당으로 변모시키려 노력했다. 국민의힘은 거슬러 올라가면 대통령 정당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의 민정당…. 그래서 이 정당은 자생력이 없고 결속력도 없다. 그저 자기네끼리 우리는 산업화 세력이라는 헛소리나 한다. 산업화든 민주화든 국민이 했지 정당이 했나? 당이 탄핵을 받고도 탄핵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더라. 그런 상태에서 쇄신하려니 저항이 많았다. ‘약자와 동행하자’ ‘서민을 먼저 생각하자’고 하니 좌클릭이라고 비난하고. 광주 갔을 때도 난리를 치던데 그걸 극복하지 않으면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런 행보에 국민이 긍정적 반응을 보여주니 지금까지 온 거다. 어떤 중진 의원은 대놓고 언제 그만둘 거냐 묻더라. 선거 끝나면 4월 8일 바로 나갈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웃음).”

8일 오후 국회를 떠나 광화문 사무실로 돌아온 김종인 전 위원장이 모처럼 신록 우거진 거리를 걸었다. 키가 매우 크다고 하자 “원래 185㎝였는데 늙으니 178㎝로 줄어들더라”며 웃었다. 정치인 필독서로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권했던 그는 최근 읽은 책 중엔 애플바움의 ‘민주주의의 황혼’이 기억난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윤석열은 특이한 공직자… 먼저 손 내밀진 않을 것

김종인은 일제강점기 민족변호사이자 광복 후 우리나라 사법제도의 기틀을 만든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1887~1964) 선생의 손자다. 스물세 살 때부터 할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했다. 한국외국어대에서 독일어를 전공했고, 김병로가 별세한 1964년 독일 뮌스터대로 유학, 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교수로 재직할 때 부가가치세 실시 문제로 박정희 정부와 인연을 맺은 후 근로자재형저축, 의료보험 도입을 주도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 당시, ‘경제민주화’란 단어를 넣어 부(富)의 편중 등을 막기 위해 국가가 개입할 여지를 둔 조항(제119조 2항)을 관철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실제로 노태우 정권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재직할 때 재벌의 비업무용 토지 수천만 평을 매각시켜 천정부지로 치솟던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킨 바 있다. 재정·조세 분야 전문가로 1981년 국회에 입성해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새천년민주당, 더불어민주당에서 비례대표로만 다섯 번 국회의원을 지냈다.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이 대통령 되는 데 일조해 킹메이커로 불린다. 한국 정치사의 주요 장면에 모두 등장한다고 해서 별명이 ‘포레스트 검프’다. 지난해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시공사)를 펴냈다.

-제3지대에서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만나 그의 킹메이커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윤석열이 특이한 공직자인 건 맞는다. 장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특검 할 때 문 대통령과 가까워지려고 그랬는지 무리수도 많이 두더라. 그런데 검찰총장이 되어 권력을 추종하는 대신 정의와 공정에 대한 소신을 밝히고 권력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줬다. 시대가 요구하는 ‘공정'이란 브랜드를 자기 것으로 만들더라. 그래서 ‘별의 순간’을 잡은 것이라고 했다.”

-선거 압승 후 김종인의 첫 일성이 ‘국민의 상식이 이겼다'였다. 공교롭게도 윤석열 역시 ‘상식과 정의를 되찾는 반격의 출발점’이라는 선거 메시지를 냈었다. 둘 사이 교감은 전혀 없었나.

“본 적도, 전화 한 적도 없다. 윤석열씨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 얘기를 많이 하는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