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11.24 03:00
[김영삼 1927~2015]
권영해 당시 國防이 말하는 軍 사조직 하나회 숙정 내막
"정기인사 때 하시라" 건의… YS, 단호하게 "안 된다"
그로부터 한달 뒤 "하나회 정리하겠다" 말해
1993년 국방장관으로 YS와 여러 차례 독대(獨對)를 해 하나회 숙정 내막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권영해〈사진〉 전 장관(전 안기부장)은 23일 본지 인터뷰에서 "YS는 대통령 취임하기 전부터 하나회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고 하나회 숙정을 직접 주도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1주일 뒤인 93년 3월 4일 육사 졸업식에서 "실추된 군과 육군의 명예를 바로잡는 데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고 말했다. 이때만 해도 하나회 숙정을 예상한 이는 없었다. 권 전 장관에 따르면 YS는 이어 3월 8일 권 전 장관을 불러 둘이 조찬을 하면서 "육군참모총장을 바꿔야겠다"고 말을 꺼냈다고 한다. 권 전 장관이 "육참총장을 교체하면 대규모 후속 연쇄 인사가 불가피하다"며 정기 인사 때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로 건의를 했지만 YS는 "안 된다.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오늘 자르겠다"고 했다.
권 전 장관은 "본격적인 하나회 숙정에 대한 YS의 언급은 약 한 달 뒤인 4월 초쯤 처음 나왔다"며 "YS는 '하나회를 정리해 야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YS는 특히 "하나회원들이 구명운동을 하는데 내 가신들에게까지 손을 뻗쳐 안 되겠다"고 언급했다고 한다. 그 직후 하나회원이었던 수방·특전사령관이 전격 경질되는 등 군 수뇌부 교체 인사가 이어졌고 12·12 및 5·18 인맥 숙정과도 맞물려 YS 정부 출범 초기 100일 동안 대장 7명을 포함해 19명의 장성이 전역 조치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위원회 2222명…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고문으로
입력 : 2015.11.24 15:06 | 수정 : 2015.11.24 15:40
행정자치부는 김 전 대통령 국가장의 장례위원회 구성을 완료했다고 이날 밝혔다. 전두환·노태우·이명박 전 대통령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고문에 포함됐다. 장례위원에는 YS의 상도동계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동교동계 인사가 모두 포함됐다.
장례위원장은 황교안 국무총리가 맡았다. 부위원장에는 새누리당 소속 정갑윤 국회 부의장과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이석현 국회 부의장, 이정미 헌법재판소 수석재판관, 황찬현 감사원장, 홍준표 경남지사, 김 봉조 민주동지회 회장 등 6명이다.
집행위원장은 정종섭 행자부 장관이, 집행위원은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 한민구 국방부 장관,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강신명 경찰청장으로 구성됐다.
장례위원 2222명은 정부 추천 인사 808명과 유족 측이 추천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주협)’ 창립멤버를 포함한 1414명이 합쳐진 숫자다.
김영삼 전 대통령 입관식 "평온한 얼굴로 구김 살 없이…"
입력 : 2015.11.23 16:35 | 수정 : 2015.11.23 23:36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아주 평온한 얼굴로, YS 답게 하나도 구김 살 없이 훤하니 좋더라. 만감이 오갔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가족과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란 삼베로 옷을 갈아입었다. 입관식은 예배와 함께 거행됐다. 극동방송 사장인 한기붕 장로의 사회로 시작된 입관식은 묵도와 찬송, 기도 순으로 진행됐다. 이후 찬송과 유가족의 인사,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이틀째 YS 빈소 찾은 손학규
입력 : 2015.11.23 14:39 | 수정 : 2015.11.23 15:11
손 전 고문은 이날 오전 11시 35분쯤 빈소를 찾았다. 손 전 고문은 빈소로 들어오는 길에 권노갑 새정치연합 상임고문을 만나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권 고문은 손 전 고문에게 “건강하셔야 된다”고 했다.
손 전 고문은 전날인 22일에도 오후 7시 30분쯤 빈소를 찾아 헌화를 했으며 기자들과 만나 "이 땅의 위대한 정치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며 "문민정치와 개혁, 현대 민주주의의 역사는 김영삼 정부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했다. 손 전 고문은 그 과정에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손 전 고문은 "YS는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위해 앞장서 싸웠고 뜻을 이뤘다"며 "무엇보다 이 땅에서 군부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정치의 문을 활짝 연 분"이라고 했다. 또 "YS가 저를 발탁하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했다"며 "YS 취임 후 개혁의 열기가 대단했고, 저는 당시 개혁에 힘을 보태겠다는 마음으로 참여했다"고 했다. "YS가 저를 많이 아껴주셨기 때문에 그 개혁의 정신을 잃지 않고 정치를 하고자 노력해왔다"고도 했다.
손 전 고문은 1993년 김 전 대통령 발탁으로 경기 광명 보궐선거에 출마해 국회에 입성했으며 그 지역에서 3선을 했다. 또 YS 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2002년에는 한나라당 후보로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었다. 손 전 고문은 지난 해 7·30 재보선에서 패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전남 강진의 토굴에서 생활하고 있다.
리퍼트 대사 "심심하고 진실한 애도", 손학규 "민주정신 영원히 빛나"
입력 : 2015.11.23 15:33 | 수정 : 2015.11.23 18:47
방명록에는 민주화에 기여한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많았다.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전 상임고문은 “김영삼 대통령님의 민주정신과 개혁정신은 우리 역사에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손 전 고문은 서강대 교수 시절인 1993년 김 전 대통령이 발탁했고, 경기 광명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주중대사를 지낸 황병태 전 의원은 “민주의 흐름을 열고 가신 선생님 영생(永生)하십시오”라고 했다.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군정 종식의 역사적 소임을 다하신 각하를 우리 국민과 역사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천정배 의원(무소속)은 “군정 종식의 역사적 위업을 남기신 김 대통령님의 뜻을 이어 풍요롭고 공정한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었다. 심대평 전 자유선진당 대표는 “민주화를 통해 조국의 번영을 이룩하신 업적 길길이 기억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사자성어를 인용했다. 그는 방명록에 “飮水思源(음수사원).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를 깊이 애도하면서”라고 적었다. 이 사자성어는 ‘목이 말라 물을 마시면 갈증을 해소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근본인 우물을 누가 팠는지 그 분에 대한 고마움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전 총재는 기자들과 만나 방명록에 대해 ““민주주의에 오기까지의 많은 족적을 잊기 쉽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같은 (민주화) 주역 역할을 한 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민주주의에 기여한 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음수사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수장학회에 내린 휘호 글귀이기도 하다.
김 전 대통령이 떠나는 길이 평안하길 기원하는 내용도 많았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민주화의 거목(巨木), 김영삼 대통령님 영면하소서”라고 적었다. 강창희 전 국회의장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상징, 김영삼 대통령님 편히 영면 하소서”라고 했다. 정홍원 전 국무총리는 “김영삼 대통령님의 서거를 애도하며 하늘 나라에서 평안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라고 했다.
이낙연 전남지사는 “아침에 가면 사모님의 시래기국, 밤에 가면 대통령님의 와인을 주셨던 상도동을 기억하며, 감사드립니다”고 방명록에 적 었다. 그는 “청년 기자 시절에 상도동을 담당하면서 무수히 얻어 먹었던, 사모님이 멸치를 넣은 된장 시래기국을 기억한다. 밤에 찾아가면 김영삼 당시 총재께서 직접 와인을 꺼내주시고 하셨다. 그때는 심지어 주일날 아침에 가면 당신이 옷을 갈아 입는 침실까지 들어오는 걸 허용해 주셨던, 의외로 따뜻한 인간미 넘치는 대통령님의 모습이 많이 생각난다”고 말했다.
초등생이 "무슨 꿈 꾸셨기에 대통령 되셨나요" 묻자 "난 숙면 취해 꿈 안꾼데이"
입력 : 2015.11.24 03:00 | 수정 : 2015.11.24 08:39
[김영삼 1927~2015] 에피소드 쏟아낸 YS
- DJ와의 경쟁
100만 서명운동 제의받자 "100만명이 뭐꼬, 1000만명은 해야지"
- 직설화법
MB가 초청한 청와대 오찬서 전두환 "와인 더 없냐" 하자
YS "술 먹으러 왔나" 소리쳐
- 특유의 사투리 발음
변화와 개혁을 '배나와 개핵'
통역이 못 알아듣자 "경상도말 왜 몰라, 배아라"
YS는 남다른 승부욕의 소유자였다. 특히 김대중(DJ) 전 대통령과의 경쟁 과정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남겼다. 측근들에 따르면 YS는 언론사 카메라가 DJ 쪽으로 향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럴 때 즐겨 사용한 방법이 비서진을 불러 귓속말을 주고받는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카메라 기자들은 다시 YS 쪽을 향하며 플래시를 터뜨렸다. 1980년대 당시 YS와 귓속말을 주고받는 장면이 카메라에 자주 찍혔던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뒷날 '무슨 얘기를 하시더냐'는 기자 질문에 "별 얘기 없었어. '덥다. 문 좀 열어라'고만 하더라"라고 했다.
1991년 지방선거가 다시 실시되면서 YS와 DJ는 유세 경쟁에 돌입했다. DJ의 갑작스러운 기자회견 소식을 접한 YS는 다음 날 아침 기자회견 자리를 급조했다. 급하게 만들어진 자리다 보니 별다른 내용이 있을 리 없었다. YS는 현안에 대해 짧게 언급을 한 뒤 중요한 선언이라도 할 듯 기자들을 바라보며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DJ는 나한테 늘 담배 얻어 피우던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떻게든 DJ를 공격해야겠다는 생각에 꺼낸 YS의 발언에 한바탕 폭소가 터져 나왔다.
양김(兩金)은 1986년 직선제 개헌을 위한 국민서명운동을 추진했다. 두 사람이 만난 자리에서 DJ가 먼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하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YS는 "100만이 뭐꼬. 1000만명은 해야지"라고 말했다. DJ가 "우리나라 인구가 몇 명인데 천만명의 서명을 받는단 말이냐"고 묻자, YS는 "누가 세리(헤아려) 보나?"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의 승부욕은 대통령 취임 후 외국 정상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어졌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외국 원수들, 특히 미국 대통령 만나고 오면 '기 싸움' 한 얘기를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며 "(한번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만나고 나서 '내가 꽉 눌러줬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조깅을 할 때 지기 싫어 전력 질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YS는 서민적이고 소탈한 풍모로 여러 차례 화제가 됐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 전 국회의장에 따르면 YS는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방한 당시 만찬주로 국산 포도주인 '마주앙'을 내놓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뒤늦게 이 얘기를 전해 들은 박 전 의장이 "그네들은 와인을 갖고 얼마나 잘 대접하는지를 따지는 사람들"이라며 만류했다.
직설화법은 YS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지난 2010년 8·15 때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로 자신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함께 초대하자 전 전 대통령에게 다 들리도록 "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본인이 처벌했기 때문에)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도 못 간다"고 해서 청와대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이어진 오찬에서 전 전 대통령이 "와인 더 없느냐"고 했더니 YS는 "청와대에 술 먹으러 왔나"라고 소리쳤고, 그런 YS의 말을 듣다 화가 난 전 전 대통령이 일찍 자리를 떴다고 한다.
측근들에게는 '다짜고짜 화법(話法)'을 많이 썼다. YS 비서로 정치를 시작한 정병국 새누리당 의원은 "YS는 측근들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니 그거 알재?'라고 물어보곤 했다. 우물쭈물하면 '한심한 놈'이라며 전화를 끊었다"고 회상했다. '픽션 같은 논픽션'도 적지 않게 만들어 냈다. 1992년 대선 유세차 속초를 방문했을 때 참모들이 써준 연설 원고에 "속초에는 함경도 분들이 많다"고 쓰여 있었다. 월남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YS는 실제 연설에서 "속초에는…속초에는…"이라며 몇 차례 머뭇거리다 "강원도 사람이 많습니다"라고 했고, 참모들은 거의 '기절'했다. '함경도'가 잘못 쓰인 것이라 생각하고 망설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말한 것이다. 대통령 취임 후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일일 교사로 수업을 했던 일화도 유명하다. 수업이 끝난 뒤 한 여학생이 "할아버지는 어릴 때 무슨 꿈을 꾸셨기에 대통령이 되셨나요?"라고 물었다. "중학교 때부터 대통령 꿈을 꿨다"는 정답을 기다리던 학생들에게 김 전 대통령은 "저는 숙면을 취하기 때문에 꿈을 꾸지 않는데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기자의 '우루과이 라운드' 질문에 "우루과이 사태?"라고 되물은 적도 있다.
YS 특유의 사투리 발음은 개그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YS 청와대
에서 통역 비서관을 맡은 박진 전 의원도 "거제도 사투리 때문에 알아듣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1993년 방한한 미 클린턴 대통령과 면담한 YS가 '변화와 개혁'을 '배나와 개핵'으로 발음했고, 이를 못 알아들은 박 전 의원의 통역이 끊겼다. YS는 이후 "박 비서관은 영어는 잘하는데 와 경상도 말은 못 알아듣노? 그것도 좀 배아라"라고 했다고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 입관식, 김수한 "YS답게 하나도 구김살 없더라" 눈시울 붉혀… 각계각층 조문행렬 이어져
입력 : 2015.11.24 12:11 | 수정 : 2015.11.24 13:58
김영삼 전 대통령 입관식, 김수한 "YS답게 하나도 구김살 없더라" 눈시울 붉혀… 각계각층 조문행렬 이어져
김 전 대통령 입관식이 23일 오전 10시 40분쯤 가족과 지인 4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1시간가량 예배 형식으로 치러졌다.
휠체어에 앉은 손명순 여사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 입관식을 지켜본 상도동계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YS답게 하나도 구김살 없이 훤하게 아주 평온한 얼굴로…(가셨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 인사들도 조문했다. 새정치연합 권노갑 상임고문은 "김영삼 대통령이 신민당 총재에 출마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이 적극 도와서 당선됐었다"며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축하하러 상도동으로 가던 길에 경찰들에게 끌려가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저녁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남 노건호씨가 들렀다. 노씨는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의 투사로 아버지께서도 항상 존경해오던 분"이라고 했다.
여권 인사들 발길도 끊이질 않았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방명록에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 족적을 기리자는 의미로 '음수사원(飮水思源·물을 마시면 물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라는 뜻)'이라고 썼다. '음수사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수장학회에 내린 휘호이기도 하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2009년) 총리 할 때 '세종시 개정(수정)안'이 꼭 관철되도록 하라고 격려하셨는데, 그렇게 못 해 안타깝다"고 했다.
상주·상제 역할을 자처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정병국 의원 등은 이날도 빈소를 지켰다. 김 대표는 "각하는 자기 건강을 과신했던 것 같다. 운동을 너무 심하게 했다. 배드민턴을 치면 안 되는데, 먼지 먹고…"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우(右)형우'로 불렸던 최형우 전 내무장관은 이날도 영정 사진을 보며 오열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좌(左)동영' 김동영 전 의원의 부인 차길자 여사가 울자 내빈실이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주한 대사들도 빈소를 찾았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는 방명록에 영어로 "미국을 대표해 깊은 애도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썼다. 추궈훙 주한 중국 대사는 중국어로 "생전에 한국 사회 발전과 중·한 관계의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셨다. 영원히 역사에 기억될 것"이라고 썼다.
YS와 2代에 걸쳐 굴곡진 인연
입력 : 2015.11.24 03:00
[김영삼 1927~2015]
朴대통령과 YS
- YS, 박정희와 평생의 政敵
수감·가택연금·의원 제명… 3선개헌 반대로 초산테러도
- YS, 朴대통령과도 긴장 관계
2007년 경선 때 MB 지지… 次男 공천탈락 뒤 더 악화
2012년 대선 직전 '朴 지지'
YS는 1972년 10월 미국 하버드대 초청으로 방미(訪美) 중 박 전 대통령의 '유신 선포' 소식에 급히 귀국했지만, 가택 연금을 당해야 했다. 1974년 신민당 총재에 취임한 뒤엔 유신헌법 개헌을 위한 원외(院外) 투쟁을 선언했다.
하지만 유신 체제는 이어졌고, YS도 박 전 대통령을 계속 비판했다. 결국 YS는 1979년 10월 4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다. 야당 총수였던 YS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가 박정희 정부를 지지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 여당이 이를 문제 삼아 YS의 국회의원직 제명안을 처리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YS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부마(釜馬) 항쟁'을 불러왔고, 결국 22일 뒤인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의 서거로까지 이어졌다.
YS가 지난 1998년 정치계에 발을 들인 박근혜 대통령과 가장 처음 부딪쳤던 것도 '박정희 평가' 때문이었다. YS는 1999년 5월 시국 성명을 발표하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남았다. 결코 미화될 때가 아니다"고 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재평가를 하자, YS가 반발한 것이었다. 그러자 당시 초선 의원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하면 옳다고 주장하고 남이 하는 것은 부정하는 반사회적 성격의 인물이 다시는 정치 지도자가 돼선 안 된다"면서 YS를 비판했다.
YS는 2001년 이후엔 "아버지와 딸은 다르다"며 박 대통령에게 호감을 표하기도 했지만,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박 대통령 대신 이명박 전 대통령을 사실상 지지했다. 이 때문에 두 사람 사이는 다시 소원해졌다. 여기에다 YS의 차남인 김현철씨가 '박근혜 비대위' 체제로 치러진 2012년 총선에서 공천 탈락한 뒤 상황은 더 나빠졌다. YS가 박 대통령을 겨냥해 "칠푼이"라고 한 것도 그해 7월이었다. YS는 당시 자신을 찾아온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이번에는 토끼(김문수)가 사자(박근혜)를 잡는 격"이라며 당 대선 후보 경선에 임하는 각오를 말하자, "그건 사자도 아니다. 칠푼이"라고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당 대선 후보로 결정된 뒤 YS를 예방하는 등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YS도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당시 선대위 총괄본부장)를 통해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YS의 상도동계 출신 일부가 문재인 민주당 후보 지지 선언을 했을 뿐 아니라, 차남인 김현철씨는 대선을 앞두고 "혹독한 유신 시절 박정희와 박근혜는 아버지와 딸이 아니라 파트너로서 이 나라를 얼음 제국으로 만들었다" "이번 선거는 민주 세력이 이겨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YS의 의중이 정확하게 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회창, 민주화 족적 기리며 쓴 飮水思源
입력 : 2015.11.24 03:00
[김영삼 1927~2015]
-정치권 조문행렬 줄 이어
이희호 여사, 휠체어 타고 조문… 리퍼트 미국대사도 애도 표해
'左동영' 부인의 울음에 내빈실이 눈물바다 되기도
검은색 옷차림의 이 여사는 이날 오후 휠체어를 타고 아들 김홍업 전 의원,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 등과 함께 조문했다. 휠체어에서 일어난 이 여사는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를 보더니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귀빈실로 자리를 옮겨서는 현철씨가 "(어머니 손명순 여사가) 아무래도 충격이 없진 않으시다"고 하자 손 여사의 손을 잡고 "위로 드립니다"라고 했다. 손 여사는 "오래오래 사세요"라고 했다.
여권 인사들 발길도 끊이질 않았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방명록에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 족적을 기리자는 의미로 '음수사원(飮水思源·물을 마시면 물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라는 뜻)'이라고 썼다. '음수사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수장학회에 내린 휘호이기도 하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2009년) 총리 할 때 '세종시 개정(수정)안'이 꼭 관철되도록 하라고 격려하셨는데, 그렇게 못 해 안타깝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 입관식은 이날 오전 10시 40분쯤 가족과 지인 4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1시간가량 예배 형식으로 치러졌다. 휠체어에 앉은 손명순 여사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 입관식을 지켜본 상도동계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YS답게 하나 도 구김살 없이 훤하게 아주 평온한 얼굴로…(가셨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주한 대사들도 빈소를 찾았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는 방명록에 영어로 "미국을 대표해 깊은 애도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썼다. 추궈훙 주한 중국 대사는 중국어로 "생전에 한국 사회 발전과 중·한 관계의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셨다. 영원히 역사에 기억될 것"이라고 썼다.
母校에서도, 뉴욕에서도… YS 추모 물결
입력 : 2015.11.24 03:00
[비 내렸지만 지자체 '김영삼 前대통령 분향소' 188곳 발길]
신안군 "DJ때만큼 애석"… 5·18 3개 단체 애도 성명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이틀째인 23일, 김 전 대통령 고향인 경남 거제시 대계마을 '김영삼 대통령 기록전시관' 1층에 마련된 분향소 방명록에는 추모 글이 빼곡했다. 이날까지 이틀 동안 부산·경남은 물론 서울·경기·충남 등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조문객 1000여명이 글을 남겼다. 오후 들어 가랑비가 내렸지만 추모 발길은 끊이질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부터 손주까지 3대가 한꺼번에 분향소를 찾은 가족도 있었고, 유치원생 40여명이 단체로 오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열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경남 지역은 물론, 정치적 동지이자 맞수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 신안과 목포에도 분향소가 설치됐다. 행정자치부는 이날 오후 2시 현재 전국 지자체 188곳에 분향소가 설치됐으며, 1만6144명이 조문한 것으로 집계했다.
서울시는 이날 오후 서울도서관 앞 서울광장 한편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추모객을 맞았다. 가로 22m, 높이 10m 크기로 쌓은 추모단에는 김 전 대통령의 영정 사진과 국화 2만4000송이가 놓였다. 분향소를 연 지 1시간 만에 시민 516명이 찾아 헌화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우리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와 통합을 한 단계 발전시킨 위대한 업적이 있는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충남도는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22일 도청사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도입, 공직자 재산 등록 등 개혁적 조치는 김 전 대통령의 우직한 뚝심이 아니면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충북도는 김 전 대통령이 재임 중 자주 찾았던 옛 대통령 별장 청남대 등 11곳에 추모 공간을 마련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목포시는 이날 오후 5시 쯤 시청 민원봉사실 앞 야외 마당에 분향소를 마련했다. 신안군도 압해읍사무소 2층 회의실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군 관계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군민 모두 애석해하고 있다"고 했다. 5·18 기념재단과 5·18민주유공자유족회 등 3개 단체도 이날 오후 애도 성명을 내고, "비보를 접하고 슬픔을 금할 수 없다"고 애도의 뜻을 밝혔다.
싸우더라도… 選擧·國會 통해 해결했던 '의회주의자'
입력 : 2015.11.24 03:00
[김영삼 1927~2015]
YS "모든 나랏일은 國會에서 결정돼야 한다" 강조
國會에 일생을 바치다 - 與대표 한번, 野대표 세번
원내대표도 다섯번 맡아… 國會내에서 민주주의 확장
'YS정신' 외면하는 與野 - FTA·예산 등 놓고 또 충돌
"與는 소수에 대한 포용을, 野는 의회 원칙 중시해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23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김 전 대통령은 고통과 인내를 요구하는 민주화 투쟁 속에서도 결코 국회를 떠나지 않고 국회 일을 최우선으로 챙기는 진정한 의회주의자였다"며 "민생 최우선이야말로 화합과 통합을 마지막 메시지로 남긴 고인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도 주승용 최고위원이 대독(代讀)한 메시지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민주주의 퇴행을 걱정했고 어떤 형태의 독주와도 타협하지 않은 진정한 민주주의자였다"고 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의회주의자였다. 하지만 둘은 방식에선 다소 차이도 있었다. DJ가 군부 정권의 투옥·연금·해외 망명으로 1987년 이전에는 줄곧 재야(在野) 인물로 살았다면, YS는 상대적으로 열려 있던 정치 공간을 파고들어 국회에서 민주주의 '영지(領地)'를 확장해 나갔다. 특히 두 사람이 주도했던 신민당은 1985년 2·12 총선에 참여해 돌풍을 일으키며 민한당을 대신해 단박에 제1 야당으로 올라섰고 민주화 진영은 신민당을 중심으로 의회 투쟁과 장외 투쟁을 결합해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선거 보이콧 주장에 "관제 야당을 깨기 위해서라도 선거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신민당이라는 의회 속 야당과 국민운동본부라는 재야(在野)가 힘을 합친 덕에 1987년 민주화 투쟁은 성공했고 그 중심에 YS가 있었다. 일부 세력이 섣부른 민중 봉기나 혁명을 주장하며 다른 길을 주장할 때 그가 택한 '선거 혁명'은 의회주의자로서의 그의 통찰력을 드러냈다. 이용희 전 국회부의장은 "군부 정권에서 김 전 대통령이 버텼던 것은 삼권분립, 의회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야는 한목소리로 고인의 의회주의 정신을 기렸지만 이날도 한·중 FTA, 노동 개혁 법안, 폭력 시위, 내년도 예산안 등 현안을 놓고 충돌만 할 뿐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야당이 협조하지 않으면 정부 원안대로 내년도 예산안을 처리하겠다"고 했고, 새정치연합 이종걸 원내대표는 "정부가 한·중 FTA 단기적 성과에만 집착한다면 비준안 처리도 원점에서 재검토돼야 한다"고 했다.
의회주의자로서 김 전 대통령은 여야에 서로 다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여당에는 '승자(勝者)의 포용'이 강조된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3당 합당 이후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민정계와 공화계가 적지 않았지만, 그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수(多數)만 강조하며 소수(少數)에 대한 포용에 인색한 여당에 대한 메시지다. 또 김 전 대통령은 치열한 투쟁 과정에서도 다수결과 민주적 원칙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면 승복했다. 1970년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한 김 전 대통령은 DJ 선거운동을 도왔다. '의원직 사퇴'를 입에 달고 사는 요즘 야당 정치인과 달리 YS는 1979년 의원직에서 제명될 때까지 국회라는 무기를 놓지 않았다. 1973년 야당 의원들이 등원 거부와 장외 투쟁을 주장하자 김 전 대통령은 "싸우더라도 국회 안에서 싸우며 유신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고 했다. 새정치연합 전병헌 최고위원은 "민주화 투쟁의 대선배였던 YS는 DJ와 함께 늘 의회를 소중히 하면서 투쟁의 장으로 활용했다"며 "그런 선배를 둔 야당이 지금 의회를 너무 소홀히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조깅 함께 했던 클린턴 "YS와의 협력 자랑스러워"
입력 : 2015.11.24 03:00
[김영삼 1927~2015] 애도 성명 보내
그는 22일(현지 시각) 조선일보에 보낸 성명에서 "한국 국민과 함께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한다"며 "김 전 대통령의 비전과 희생은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완전히 실현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또 "김 전 대통령과 함께 한·미 양국의 파트너십을 심화하고, 지역 안보와 협력을 증진시킨 게 자랑스럽다. 1993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보여준 김 전 대통령의 호의를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1993년 7월 한국을 방문해 김 전 대 통령과 조깅을 함께 했고, 조찬을 겸한 단독회동 뒤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쓴 휘호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선물로 받았었다. 백악관도 성명을 통해 "미국 국민을 대신해 한국 국민에게 가슴 깊은 위로를 보낸다"며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로의 전환이라는 가장 도전적인 시기에 한국 국민을 이끌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평화로운 정권교체의 선례를 남겼다"고 했다.
朴대통령 '7분 조문'
입력 : 2015.11.24 03:00 | 수정 : 2015.11.24 10:52
[김영삼 1927~2015]
-朴대통령, YS 빈소 弔問
귀국 후 8시간 만에 찾아
손명순 여사 손잡고 애도… 방명록은 작성 않고 떠나
검은색 바지 정장 차림의 박 대통령은 이날 오후 2시 장례식장 1층에 도착, 장례집행위원장인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의 안내를 받으며 3층 빈소로 이동했다. 박 대통령은 빈소에 들어서자마자 분향과 헌화에 이어 묵념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이어 곁에 있던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고 위로했다. 현철씨는 박 대통령에게 "대통령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고 박 대통령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박 대통령의 목소리가 낮아 "(국립서울현충원) 장지(葬地)를 잘 이렇게…"라고 하는 정도만 들렸다. 나중에 현철씨는 "대통령이 국가장으로 치러지는 장례를 꼼꼼하게 잘 챙기겠다는 위주의 말씀을 하셨다"고 전했다. 박 대통령은 빈소 내 다른 유족들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이어 박 대통령은 빈소 내 가족실로 이동해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손명순 여사를 만났다. 거동이 불편한 손 여사는 의자에 앉아 박 대통령을 맞았고 박 대통령은 허리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손 여사의 손을 감싸 잡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대화 내용이 주변에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애통해하는 손 여사를 위로했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박 대통령은 조문을 마치고 오후 2시 7분쯤 장례식장을 떠났다. 방명록은 작성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직접 조문을 한 것은 다섯 번이다. 고(故) 남덕우 전 총리(2013년 5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자 자신의 사촌 언니인 고 박영옥 여사(2015년 2월)의 빈소를 찾은 적이 있다.
또 작년 4월 경기도 안산의 '세월호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했고, 올 3월에는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 국장(國葬)에 참석했다.
YS의 '진실한 사람들' 김동영과 최형우
입력 : 2015.11.24 11:53 | 수정 : 2015.11.24 13:11
고 김동영 전 장관은 YS가 대통령이 되는 걸 보지 못하고 지난 1991년 8월 19일 숙환인 암(癌)으로 오랜 투병 끝에 5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당시 언론은 그를 ‘의리와 뚝심의 정치인’으로 애도했다.
그는 YS와 정치 노선을 함께하며 유신과 제5공화국 초기의 탄압과 회유에 굴하지 않았다. 지난 1984년 정치규제에서 풀린 이후 YS의 오른팔로 정치의 전면(前面)에서 활약했다.
특히 지난 1988년 11월 자신의 병이 말기암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내색하지 않고 YS를 도와 5공(共) 청산과 3당(黨) 통합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후에는 원내총무와 정무 제1장관을 맡아 YS의 여권 내 위상 강화에 힘썼다. 상도동계 한 인사는 “김 전 장관은 말기암 상태인데도 YS를 위해 여야 정치인들을 가리지 않고 만나며 폭탄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경남 거창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거창농고, 동국대를 졸업한 뒤 고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정치에 입문해 YS와 인연을 맺었다. 지난 1966년 국회 전문위원을 거쳐 1973년 9대 국회에 진출했다. 1979년 YS의 의원직 제명에 항의하며 10대 의원 사퇴서를 내기도 했다. 5·17 이후 정치규제를 당하자 지난 1981년 자신의 집에서 최형우 전 장관 등과 함께 민주산악회를 결성했고 1984년 민추협 결성에도 기여했다.
지난 1985년 2·12 총선에서 103석의 강력한 야당으로 떠오른 신한민주당의 원내총무를 맡아 직선제 개헌 투쟁을 벌여 훗날 6·29 선언을 이끌어 내는 데 힘을 보탰다.
한번 결심한 것은 무섭게 밀어붙이는 정치 스타일 덕분에 ‘불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있고 난 뒤에 정치가 있다”는 입버릇처럼 원만한 대인관계로 어느 정파에도 적(敵)이 없었다.
한편 최형우 전 장관은 지난 22일 뇌졸중 후유증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YS 상가에 조문을 왔다. YS의 영정 앞에 통곡하며 조화를 올리는 그의 모습이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최 전 장관은 4·19 민주혁명 당시 동국대 학생 대표 출신으로 6·3, 삼선개헌 반대 등에도 참여했다. 울산에서 8, 9, 10대 의원에 내리 세 번 당선됐다.
‘상도동 돌쇠’라는 별명답게 YS맨으로 5공 초기 민주산악회 부회장, 민추협 간사장 등을 맡으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이후 13, 14, 15대 의원에 당선돼 6선(選) 기록을 세웠다.
3당 합당 뒤에는 정무 제1장관, YS 대통령 당선 뒤에는 민자당 사무총장과 내무장관을 각각 지내는 등 화려한 정치 경력을 쌓았다.
그러던 최 전 장관은 YS 임기 마지막 해인 지난 1997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YS는 그의 병실을 찾아가 “나요 나. 빨리 일어나야지”라며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최 전 장관은 뇌수술을 받고 혼수 상태가 되는 중태에 빠졌다.
최 전 장관은 이후 불굴의 의지로 재활 치료에 들어가 건강을 상당 부분 회복하게 됐다. 그의 뇌졸중 발병은 과거 고문(拷問) 후유증이라고 가족들은 밝히고 있다.
최 전 장관은 그의 자서전에서 지난 1970년대 이른바 ‘기관원’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경험을 밝힌 바 있다.
기관원이 “최형우 이 새끼! 네 놈이 야당 의원 중에 가장 악질이지”이라며 겁을 준 뒤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기관원들은 나를 발가벗겨 놓고 구둣발로 마구 짓밟았다. 그런 다음 내 손을 모아 깎지를 끼게 한 다음 포승줄로 묶었다. 그 다음 내 얼굴에다 사정없이 물을 들이부었다. 죽지 않으려면 물을 먹어야 했다. 물을 먹인 다음 전기봉으로 몸을 지졌다. 정말 수치심으로 피가 거꾸로 쏟아 올랐다.”
최 전 장관은 가혹한 고문에도 “YS의 정치자금줄을 대라”는 기관원의 압박에 굴하지 않았다. “모른다”며 끝까지 버텼다. 1주일 만에 풀려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치료를 위해 독일에 갔을 때 현지 의사도 “둔탁한 무언가에 맞은 적이 있느냐”고 했다고 한다.
YS 상가에 온 한 정치권 인사는 “요즘 ‘진실한 사람’이라는 말이 정치권 유행어처럼 되고 있다. 김동영·최형우처럼 민주주의를 위해, 보스인 YS를 위해 목숨 걸고 나설 정도로 ‘정말 진실한 사람’이 과연 있느냐”고 말했다.
DJ때 황장엽 어려움 겪자 "우리 집에서 함께 살자"
입력 : 2015.11.24 03:00
[김영삼 1927~2015]
임기말 망명한 황장엽에 늘 미안함 표시했던 YS
황 전 비서가 사망(2010년 10월)하기 전까지 매주 그를 인터뷰했던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에 따르면, YS는 2010년 10월 황 전 비서 사망 당시 빈소를 찾았다. YS는 이 자리에서 김 대표 등에게 "내가 황 선생께 우리 집이 넓진 않지만 함께 살자고 여러 번 말했다. 황 선생께 늘 미안했다. 정권이 바뀌다 보니 황 선생이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YS는 또 김대중(DJ) 정부 말인 2003년 1월 서울 상도동 자택을 방문한 황 전 비서가 "지금도 미국 의회에 가서 북한 실정에 관해 증언하고 싶지만 당국이 못 가게 막고 있다"고 하자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온 사람인데 자유를 보장해 줘야지 정말 한심한 일"이라고 말했다. 황 전 비서가 한때 국정 원 등에 의해 대외활동을 제약당한 데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YS는 2004년 자유북한방송 명예위원장을 맡아 매주 대북 메시지를 보내는 등 북한 민주화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2005년 1월 1일 자유북한방송에 전한 신년 메시지에선 "우리 함께 힘을 모아 북한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북한 땅에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싸웁시다"라고 했다.
박민식 "YS 功 저평가, 한나라당도 비겁했다"
입력 : 2015.11.24 11:23
박 의원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역사적으로 보면 김 전 대통령은 새누리당의 가치를 온몸으로 실천한 분”이라며 “충분히 박수 받을 자격이 있는 분에게 사회 전반, 정치권에서 돌팔매질이 난무할 때 왜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우리 스스로 반성할 때”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과업은 정경유착 고리를 끊는 것이었으며 사회의 가장 큰 걸림돌은 부정부패였다”며 “하나회 척결, 부패 척결, 공직자 재산공개 등 전무후무한 일을 해낸 게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반대편에서는 IMF 환란의 주범으로 낙인 찍어 ‘한심한 대통령’이라고 극언하는 사람도 있었다”면서 “IMF 사태의 근본적이고 직접적 원인을 외면한 채 대통령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는 건 야박하고, 역사적으로도 왜곡”이라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또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해도 퇴임 후 평가가 혹독했고, 경우에 따라 침소봉대로 분칠되는데도 한나라당 사람들은 수수방관했다”며 “(1997년) 대선 정국을 전후해 YS를 희생양 삼는 데 이해관계가 일치해서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지적한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이어 “김 전 대통령과 같이 정치를 했던 우리 지도부의 많은 선배들은 지금 그분을 아쉬워하고, 이제와서 그 업적을 찬양하기 전에 왜 그렇게 눈치보면서 침묵했는지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박 의원은 그러면서 “적잖은 시행착오와 과오가 있었지만 김 전 대통령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고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TV조선 뉴스쇼 판] '용팔이' 김용남, "생전에 사죄하고 싶었는데" YS 영정 앞에 고개 숙여
입력 : 2015.11.24 21:50 | 수정 : 2015.11.24 21:58
김씨는 “생전에 직접 사죄하고 싶었지만 만나지 못했다. 정말 죄송하고 많이 후회한다”며 영정 앞에 고개를 숙였다.
‘용팔이 사건’은 1987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통일민주당 창당대회 기간 통일민주당 사무실 47곳 중 18곳이 조직폭력배 조직원들에 의해 불에 타고 잿더미가 된 사건이다. 창당대회 기간이 끝난 후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김씨와 이선준(당시 45세·신민당 청년국 제1부장)씨 등이 폭력배를 동원한 사실을 밝혀냈다. 김씨에게 창당 방해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이용구(55세·신민당 총무국 부국장)씨는 사건 이후 미국으로 도피했다.
☞이 기사와 관련된 TV조선 영상 보기
다음은 TV조선 보도 원문.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본과의 과거사 청산에 적극 나섰고, 특히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정부 차원의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조문객들이 전한 잘 알려지지 않은 김 전 대통령의 면모, 계속해서 강상구 기자입니다.
[리포트]
벳쇼 고로 일본 대사가 빈소를 떠나자마자 한무리의 할머니들이 소복을 입고 들어섰습니다.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들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위안부 할머니를 망향동산에 안장하도록 했고 위안부 실태조사, 생활안정법도 만들었다며,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던 생전의 유명한 발언을 회고했습니다.
양순임 /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장
"정말 천상에서 따끔히! 버르장머리 좀 고쳐주라! 부탁하고 싶습니다."
5.18 관련 단체도 빈소를 찾아 광주 민주화운동 특별법을 제정한 업적을 기렸습니다.
김후식 / 5.18부상자회 회장
"특별법을 마련해서 저희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셨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를 단죄해서 역사를 바로 세워주셨습니다."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폭력 사건, 이른 바 '용팔이 사건'의 주동자 김용남 씨도 빈소를 찾아 사죄했습니다.
김용남 / 용팔이 사건 주동자
"민주화를 위해서 참 이렇게 애쓴 분이셨는데, 참 그걸 저는 알지 못하고...정말 죄송스럽고, 정말 후회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생전에 직접 사죄하고 싶었지만 만나지 못했다며, 영정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TV조선 강상구입니다.
측근들이 기억하는 ‘YS의 인간미’
이재명기자 , 홍수영기자
입력 2015-11-24 03:00:00 수정 2015-11-24 03:50:03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내게 등돌린 사람도 한때 함께 고생” 회고록에 배신 사례 쓰지 말라 엄명
사고 터질 때마다 장관 경질… “나를 못자르니 수족 잘라 사과”
“왜 이렇게 자주 장관을 바꾸셨어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회고록 집필을 도운 김동일 씨가 회고록 자료를 정리하다가 YS에게 물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등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았던 김영삼 정부에선 장관의 평균 재임기간이 11.6개월로 1년이 채 안 됐다. YS는 이렇게 답변했다.
“큰일이 일어나면 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무조건 죄송한 거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내선 안 된다. 나를 자를 순 없으니 내가 믿고 의지한 수족을 잘라 국민에게 내 마음을 전하려 한 것이다.”
김 씨는 23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당시 YS와 나눈 대화를 전하며 “지도자로서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자세를 봤다”고 말했다. 김 씨는 당시 회고록 정리를 위해 많은 재야인사를 만났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는 YS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도 훗날 YS 비판에 앞장선 인사도 꽤 있었다. 이들의 행적을 회고록에 담자고 하자 YS는 곧바로 “쓰지 마라”라고 엄명했다. 그러면서 “내가 회고록을 쓰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남기려는 것이다. 그들도 나와 함께 고생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YS 재임 기간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새누리당 이진복 의원도 비슷한 일화를 전했다. 몇 년 전 YS가 부산지역 의원들과 만찬을 했을 때다. 한 의원이 1987년 대선 당시 YS가 부산 수영만에서 100만 명을 모아놓고 유세를 한 일화를 꺼내자 YS는 “주변 사람들이 고생 많이 했대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예전에 상도동 집에 가면 YS는 늘 ‘밥 묵고 가래이’ ‘고생 많재’라며 다독여줬다”며 “서슬 퍼런 시절 상도동계를 움직인 것은 YS의 인간미”라고 말했다.
부인 손명순 여사에 대한 YS의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일화도 많다. 퇴임 이후 YS 부부는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외환위기로 국가가 휘청거린 데다 아들 현철 씨는 재판 중이었다. YS는 우울해하는 손 여사를 위해 “같이 노래하자”며 장난스럽게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고 한다.
YS가 재임 기간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2003년경 일본 경제인이 YS에게 했다. 당시 YS는 일본 와세다대 특명교수로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YS를 수행한 임수택 씨는 “YS는 ‘1994년 북핵 위기로 한반도에 긴장감이 극대화됐을 때 전쟁을 막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국 정치사에 숱한 기록을 남긴 YS가 가장 애착을 느낀 것은 ‘26세 최연소 국회의원’이라고 한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33세에 당선된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당선 직후 YS를 만나 “선거 때 ‘너무 어리다’고 하기에 ‘김영삼 대통령은 26세에 국회의원을 했다. 나는 너무 늦었다’고 말하니 다들 수긍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YS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고 한다.
이재명 egija@donga.com ·홍수영 기자
YS 장례위원회에 반기문 사무총장 등 총 2222명 확정
뉴시스
입력 2015-11-24 14:56:00 수정 2015-11-24 15:35:54
첫 국가장으로 치르는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위원 규모가 2222명으로 확정됐다.
이는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장의위원(2375명) 규모보다 적고, 같은 해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1404명) 수에 비해서는 많다.
국가장의 집행 업무를 수행하는 행정자치부는 24일 이 같은 내용의 장례위원회 구성을 발표했다.
국가장법에 따라 설치된 장례위원회의 위원 수는 2222명이다.
정부 추천 인사 808명과 유족측이 추천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주협)' 창립멤버를 포함해 1414명이 합쳐진 숫자다.
장례위원회의 위원장은 황교안 국무총리가 맡는다.
부위원장은 정갑윤·이석현 국회 부의장과 함께 이정미 헌법재판소 수석재판관, 황찬현 감사원장, 홍준표 경남지사, 김봉조 민주동지회 회장 등 6인으로 정해졌다.
고문은 101명으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포함돼있다.
국가장법 시행령에 따르면 위원장은 국가장의 원활한 집행을 위해 필요한 공무원을 부위원장과 위원으로 임명하거나 위촉할 수 있다. 유족(遺族)의 추천을 받은 사람도 위원으로 위촉할 수 있다.
부위원장은 위원장을 보좌하고 위원장이 부득이한 사유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직무를 대행한다.
위원장은 또 국가장 집행에 관한 사항을 자문하기 위해 사회 각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을 고문으로 위촉할 수 있다.
다만 고문과 위원 수에는 법령상 제한이 없다.
집행위원장은 정종섭 행자부 장관이, 집행위원은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 한민구 국방부 장관,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강신명 경찰청장으로 구성됐다.
장례위원은 ▲입법부(원내대표, 상임위원장, 국회의원) 248명 ▲사법부 30명 ▲선거관리위원회 및 민주평통 29명 ▲행정부 장·차관(급) 126명 ▲대통령 소속 위원회 19명 ▲군 장성 8명 ▲지방자치단체장(시·도지사, 동작구청장, 거제시장) 18명 ▲국·공립 및 사립대학교 총장 196명 ▲경제계·언론계·방송계·종교계 등 각계대표 87명 ▲기타 1347명 등이다.
【서울=뉴시스】
김무성-문재인 ‘극진한 추모’ 뒤엔… PK민심 향한 신경전
강경석기자 , 한상준기자
입력 2015-11-24 03:00:00 수정 2015-11-24 03:49:27
“정치적인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다.”(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묵념하는 野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오른쪽에서 두 번째) 등이 23일 최고위원회의에 앞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유승희 전병헌 주승용 최고위원, 이 원내대표, 정청래 최고위원.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경남)중·고교 선배이시면서 (경남 거제) 동향 선배이고, 민주화 운동의 인연도 있다.”(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여야 대표는 22일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빈소에서 YS와의 인연을 강조하며 ‘조문 정치’를 이어 갔다. 그 이면에는 YS의 정치적 기반인 PK(부산·경남) 지역에서의 정치적 위상을 굳히거나 탈환하려는 포석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여야 대표 모두 ‘YS 인연’ 강조
김 대표는 1983년 자신의 사업을 정리하고 YS를 찾아갔다. YS가 결성하고 있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에 창립 멤버로 참여하며 정계에 발을 들였다. YS의 상도동계에 뿌리를 두고 밑바닥부터 정치를 배웠다. 김 대표는 1993년 YS의 문민정부가 출범한 뒤 대통령 민정·사정비서관을 지내며 정치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1994년 12월에는 당시 43세의 나이로 최연소 내무부 차관에 올랐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당선돼 국회에 입성한 뒤에도 틈날 때마다 YS를 찾아 정치적 조언을 구했다. YS 서거 후 “정치적 아들”이라며 매일 빈소를 지키고 있다.
YS와 문 대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부산에서 인연을 맺었다. 1988년 통합민주당 총재이던 YS는 집회 현장에서 수차례 마주친 문 대표에게 13대 총선 출마를 권유했다. 당시 문 대표는 거절했지만 그와 같은 사무실을 썼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YS로부터 같은 제안을 받고 정계에 입문했다. 문 대표가 “여러모로 고인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더 비통하다”고 밝힌 이유다. 문 대표는 지난해 6월 외부에 알리지 않고 상도동의 YS 자택에 문병을 했다고 한다.
문 대표는 전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YS의 빈소를 찾았다. 23일에는 독감 때문에 당 최고위원회의 등 모든 일정을 취소했지만 전국 지역위원회에 YS 조문 현수막을 부착하고, 전 당원에게 조문을 독려하는 특별 지시를 했다.
○ PK의 맹주, 수성이냐 도전이냐
두 대표 측 모두 YS 추모에 대해 “정치적인 의미는 없다”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개인적인 인연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YS의 공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만 말했다. 그러나 김 대표와 문 대표 모두 내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YS의 정치적 기반이던 PK 지역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 들어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대표는 이미 부산에서만 5선 의원을 지내며 PK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상황이다. 반면 문 대표는 2012년 부산 사상에서 처음 당선됐지만 최근 지역구를 내놓았다. 야당 최초의 지방 싱크탱크인 부산 오륙도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영남권 교두보 확보에 각별한 공을 들이고 있다. 야권 관계자는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인 두 대표 모두 지역 기반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PK를 둘러싼 여야 대표의 수성과 도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상준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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