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해방 다음날, 그들은 은행 달려갔다…조선의 일본인들 최후

Shawn Chase 2020. 8. 16. 16:56

[중앙일보] 입력 2020.08.16 16:00 수정 2020.08.16 16:30

 

1945년 8월 17일 부산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배 한 척이 되돌아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픽댓] 히스토리

이 배에는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부인 일행이 타고 있었죠. 일본으로 가던 배는 다대포항에서 남쪽으로 약 4.8km 떨어진 목도(木島) 인근에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원인은 과적. 조선에서 모은 귀중품을 최대한 가져가려다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죠. 결국 이들은 짐을 절반 정도 바다에 버린 뒤에야 겨우 부산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회사란 이름을 가장한 조선 총독부의 공식 수탈기관이었다, [ 사진가 권태균 제공 ]

민족운동가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회고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갑자기 찾아온 해방과 패전으로 지위가 바뀐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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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배의 상징인 경찰서, 신사 등 집중 공격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세상이 바뀌었다’고 체감한 것은 8ㆍ15 이튿날부터였습니다.  

한 일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1945년 8월 16일 남대문로에는 붉은기를 든 조선인 무리가 만세를 외치며 서울역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소련군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에 환영행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죠. 소문은 거짓으로 드러났지만, 조선인들이 일본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광복 당시 천안 지역 시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 사진제공 = 독립기념관 ]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1주일간 조선 전역에서 보고된 각종 사건은 913건. 조선총독부에는 조선인들이 경찰서, 지방행정기관, 신사를 습격했다는 보고가 속속 올라왔습니다. 경찰관과 교원이나 관청 공무원이 주로 공격을 당하곤 했습니다. 당황한 총독부는 8월 18일 각 기관에 걸어둔 일왕의 사진과 지역 신사의 위패를 불태우도록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8월 19일 총독부는 군대를 동원해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미군정이 들어선 9월부터는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실감하게 됩니다. 미군정은 9월 9일부터는 일장기 게양 금지, 9월 23~29일 일본인의 무기 회수, 10월 8일부터는 일본인 이동제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각자도생에 놓은 일본인
해방 직후 직감적으로 위협을 느낀 일본인들이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은행입니다. 서울 충무로 경성우편국에서 일한 이노우에 스미코는 “예금을 인출하려는 사람들이 몰려 밤이 깊어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갔다”고 회고했습니다. 지급준비금을 위협할 정도의 거액이 계속 빠져나가자 총독부는 17일 “예금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뺄 수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했지만, 총독 가족마저 재산을 챙겨 황급히 넘어가는 상황에서 별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습니다.
 

1920년대 명동 거리. 조선 총독부는 회사령으로 일본인 기업을 육성하면서 한국인들의 민족자본 형성을 억제하려다 많은 반발을 초래했다. [ 사진가 권태균 제공 ]

12월엔 일본 유력자들이 주식, 채권, 보험증서 등을 자전거 바퀴 튜브에 숨겨서 일본으로 밀항하려다 해안 경찰에 붙잡히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때 잡힌 사람 중엔 ‘조선의 수산왕’, 부산의 3대 부자로 알려진 가시이 겐타로도있었습니다. 그런 인사도 밀항선에 몸을 맡겨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죠.
 
일본인이 재산을 몰래 빼돌리는 데 혈안이 된 건 미군정에서 재산 반출을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미군정은 본토로 돌아가는 일본인이 1000엔 이상의 현금을 가질 수 없도록 했습니다. 소지품도 휴대가 가능한 보따리로 제한했죠. 그래서 일본인들은 부동산을 팔고 귀금속이나 비싼 문화재로 바꿔가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 경남 일대 바닷가엔 밀항선이 특수를 누렸습니다. 당국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항구 주변엔 ‘오사카 행’ ‘후쿠오카 행’이라고 적힌 깃발을 내건 임시사무소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대한해협에는 이들을 노리는 해적이 기승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조선어 배워 新조선에 협력하자”
해방 후 한 달 가량된 1945년 9월 12일. 서울 소공동 YMCA 청년회관에는 일본인 학생, 부인, 노인 등 남녀노소가 가득 모였습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조선어 학습이었습니다.
 
이날 가사야 야스타로 경성 YMCA 총주사는 “조국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으로 발생한 현 상황은 비록 마음이 아프지만 그저 망연자실하여 불안과 후회로 가득 찬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조선어를 배워 신조선에 새로이 협력해야 한다”고 조선어를 배우러 온 일본인들을 격려했습니다. 조선어 강좌는 이날부터 3개월 과정으로 매주 3번, 오후 4시부터 90분간 진행됐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성된 경성신사 [중앙포토]

패전 후 처지가 180도 바뀐 일본인들의 상황이 단적으로 드러나지요. 또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고자 한 일본인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충남 강경의 경찰서에서 근무한 나카무라 기미는 “(일본이)패전했다고 꼭 내지(일본)로 돌아가야 하느냐”고 말했고, 그는 왜 고향인 충청도 강경 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회고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조선의 일본인 사회는 귀환파와 잔류파로 나뉘어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입장 뒤바뀐 조선인과 일본인  
생활이 어려워진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이발소ㆍ목욕탕ㆍ음식점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성제대 교원 양성소에 다니던 도코 요시마사도 가족이 사는 평북 정주로 돌아와 평일엔 조선인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주말엔 공중목욕탕에서 일했습니다. 또 학교에서 해직된 일본인 교사는 얼마 전까지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북한 지역에선 소련군을 상대하는 접객 여성이 나타났는데 새하얀 분과 붉은 입술을 한 이들을 ‘로스케(ろすけ: 러시아를 낮춰 부르는 뜻으로 쓰인 일본어 단어) 마담’이라고 불렀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열린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 대회는 제26회 전국체육대회이기도 하다. [대한체육회]

“암시장은 성황을 이뤘다. 일본인에게 약탈한 물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사과 감 털게 조선 엿 육류 등이 쌓여있지만… 옷에 예쁜 장식을 한 소련 장교 부인과 조선인 부인 사이로 그야말로 상거지나 다름없는 몸뻬 차림의 일본 부인이 대두나 콩을 가꾸어가는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다.”
 
당시 함경북도 성진의 일본인 단체 간부가 남긴 기록입니다. 일본인 거주지에서 압수하거나 헐값에 사들인 물건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죠.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는 어김없이 처분하려는 세간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인 고물상은 더 좋은 물건을 값싸게 구매하려고 일본인 마을을 하루에도 몇 차례나 돌았고, 인근엔 도깨비 시장이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패전 직후 조선 전역에선 전례 없이 물자가 풍족해지기도 했습니다. 일왕의 항복 방송 후 전시물자로 비축한 것들이 한꺼번에 시중에 풀리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남대문 시장에도 옷감, 가죽제품, 구두, 쌀 등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합니다. 
 

국가기록원과 국립중앙도서관, 동북아역사재단이 13일 공개한 조선총독부의 '학교별 학도동원기준'. 당시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1년 수시 동원을 강제한 지침이다. [뉴스1]

북한 지역에선 일본 기술자 달래기도 
한편 당시 공업이 발달한 북한 지역은 38선 이남보다 상황이 복잡했습니다. 
 
소련군은 미군보다 일본인들을 폭력적으로 다뤘기 때문에 일본인의 유출이 대규모로 일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고급 기술을 가진 일본인 기술자들이 빠져나가면서 큰 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한 시멘트 공장은 전기 고장으로 2개월간 가동이 중단됐다가 일본인 기술자를 투입하자 3시간 만에 복구되는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소련군은 시설 복구를 위해 일본인 기술자들을 재고용하라고 김일성 세력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조선인은 고급 기술자로 양성하는 일이 드물었기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결국 1946년 8월 북한 지역에선 김일성 명의로 기술자 징용령을 발동했고, 일본인 기술자의 처우 개선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평양, 함흥, 청진, 흥남 등지에 일본인 초등학교가 새로 개설되고, 일본인 기술자 주거시설을 정비하는 등 분위기가 잠시 반전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일본인은 되돌아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됩니다. 1945년 11월엔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한 공로로 고속 승진한 일본인 경찰 관료가 서울 원남동 자택에서 살해되는 등 조선에 남은 일본인에 대한 보복은 이어졌고, 사회적 분위기도 냉랭했습니다. 
 
한편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본토인들로부터 차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대부분 빈털터리 신세로 오다 보니 일본 친척에게 얹혀살았는데, 이로 인한 갈등이 곳곳에서 벌어졌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또 이들은 일본에서 하류층으로 전락했고, 전염병 등 각종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이들 때문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돼 한국에서 온 일본인이 자살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뒤인 지난 1945년 9월 2일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가 도쿄항에서 정박중인 미 태평양 함대 소속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8ㆍ15 광복의 기쁨 속에서 조선에 남은 일본인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또 본국에 돌아간 뒤에는 많은 차별로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조선인들의 상황이기도 했죠. 많은 일본인이 이때서야 비로소 침략과 전쟁이 나쁜 것이라는 자각을 했고, 이에 대한 책임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잘못된 판단과 결정으로 지난 세기엔 동아시아의 많은 국가가 피해를 당하였고, 그 상처는 아직 온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광복 75주년을 맞아 비극적인 역사가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유성운·김태호 기자 pirate@joongang.ci.kr 

[출처: 중앙일보] 해방 다음날, 그들은 은행 달려갔다…조선의 일본인들 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