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20.02.12 14:29 수정 2020.02.12 18:01
안중근 의사와 최재형 선생.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최 선생은 1909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안 의사에게 권총을 마련해 주는 등 의거를 막후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중앙포토]
최재형 선생의 손자 최 발렌틴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82)과 문영숙 최재형 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지난해 3월 28일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최재형 선생 고택 앞에서 손을 꼽 잡고 있다. [사진 문영숙 이사장]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1860~1920) 선생의 손자(3남의 아들)이자 유족 대표로서 그동안 활발하게 선양 활동을 해온 최 발렌틴(82) 한국독립유공자후손협회 회장이 지난달 18일 독일에서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독립운동가 최재형기념사업회(이사장 문영숙)가 12일 밝혔다.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1879~1910) 의사가 한반도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할 때 사용한 권총을 제공하고 의거를 막후에서 기획했고 러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을 도와 현지에서 '페치카(벽난로) 최'로 존경받아왔다.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최재형의 손자
최 발렌틴 한국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
4월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 앞두고
1월 18일 독일서 경추골절 사고, 중태
연금으로 생계 이어와 병원비 태부족
최재형기념사업회, 급히 1만달러 후원
모스크바 날아가 병문안, 위로 예정
러시아 모스크바에 거주해온 최 발렌틴 회장은 딸이 사는 독일에 갔다가 스키장에서 사고를 당해 경추 1, 2번이 골절됐다고 한다. 최 회장은 독일 현지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았으나 현재까지 의식불명 상태로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다고 기념사업회가 전했다.
올해는 일본이 1920년 4월 연해주 우수리스크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을 학살한 4월 참변 100주년이자,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의 해다. 이런 뜻깊은 해에 최 선생의 유족대표가 큰 사고를 당해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특히 가난한 독립운동의 후예가 대체로 그러하듯 최 회장 가족도 막대한 수술비를 대지 못하고 있어 가족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할 때 사용한 브라우닝 권총과 같은 모델. 러시아 연해주에 세워진 '최재형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백성호 기자
문영숙 최재형 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집필한 '독립운동가 최재형'.
최 회장의 아들 최 표트르는 "연금으로 어렵게 생활해온 아버지의 치료비를 가족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눈앞이 캄캄하다"며 서울에 있는 최재형 기념사업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수술비와 입원비, 항공 이송비로 이미 5만 유로(약 6500만원) 이상이 나왔고, 앞으로 계속 발생할 재활치료비도 감당이 어렵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을 쓴 문영숙(작가) 이사장은 "지난해 최 회장은 대한민국 국적을 받았고 올해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 추모식 행사와 '제1회 최재형 상'을 후손 대표로 직접 시상하기로 했는데 불의의 사고를 당해 너무 슬프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에 최 회장과 많은 행사를 함께 했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최재형 선생의 옛 저택이 있던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갔을 때는 빗속을 뚫고 흙투성이가 된 채 최재형 선생의 집터를 같이 찾아 헤맸다. 비탈길에서 나의 손을 잡아주고 끌어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문 이사장은 "기념사업회는 십시일반 후원으로 어렵게 운영되는데 급히 1만 달러라도 모아 최 회장 가족에게 전달하기로 했다"며 "안병학 기념사업회 홍보대사(한나래인터내셔날 대표)의 도움으로 14일 모스크바로 함께 날아가 최 회장을 병문안하고 가족을 위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최 회장은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최재형 선생의 손자다. 1995년 한국독립유공자 후손협회를 설립할 때부터 회장을 맡아왔다. 이 협회에는 이범진·이동휘·김경천·허위·김규면 등 굴지의 독립운동가들의 후손 22명이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을 기리는 기념비 제막식이 2019년 8월 12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국가보훈처 정병천 과장, 오성환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안민석 국회문화체육관광위원장,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최재형 손자 최 발렌틴,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연합뉴스]
최 회장은 그동안 유족연금을 받아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모스크바 독립유공자 후손협회 일까지 도맡아왔다. 러시아 고려인연합회 신문기자와 카자흐스탄의 고려일보 모스크바 주재 기자로도 일하면서 조부인 최재형 선생을 세상에 알리는 큰 역할을 했다. ‘사진으로 본 러시아 항일 독립운동’ 전 3권을 출간했을 정도로 이번 사고 직전까지 고려인들의 항일 독립운동 역사를 재조명하는 활동에 매진해 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6월 러시아 하원 연설에서 "안중근·홍범도·최재형·이상설 선생 등 수많은 한국의 독립투사들이 이곳 러시아에 망명해 국권 회복을 도모했다"고 평가했다.
앞서 2017년 9월 문 대통령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재형·이상설·이위종·이동휘·김경천 등 독립유공자의 후손 등을 오찬에 초대했다. 당시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분들께 대한민국이 예의를 다해 보훈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고, 최 회장은 "고국에서 큰 관심과 배려를 해주시니 참 기쁘다"고 말했다.
한편 최재형 선생의 현손(玄孫·고손자)인 최 일리야(18)는 인천대가 장학생으로 초청해준 덕분에 지난해 9월부터 인천대 어학원에 입학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최재형 선생의 현손(4대손)인 최 일리야(18, 인천대 어학연수중)가 지난해 9월 서울 효창공원에 있는 안중근 의사 가묘 앞에 섰다. 최재형 선생의 도움으로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 의사는 이듬해 순국했으나 일제가 유해를 감췄다. "고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지키지 못해 초혼한 뒤 일단 가묘에 모셨다. 안 의사 가묘 옆은 삼의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 묘다.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단독]그가 건넨 총으로 이토 저격···최재형 손자 중태, 병원비 막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