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미니스커트·하이힐 차림으로 거리 누비던 ‘양색시’들의 정체는?

Shawn Chase 2020. 3. 16. 00:11


올댓아트 김지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0-03-02 14:18 입력시간 보기

■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한국근현대인물화>展, 2019년 12월 18일 ~ 2020년 3월 1일

김환기 ‘항아리와 여인들’ 1951, 캔버스에 유채, 54 x 120cm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 ‘항아리와 여인들’ 1951, 캔버스에 유채, 54 x 120cm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박수근 ‘길가에서’ 1954, 캔버스에 유채, 107.7x53cm|갤러리현대

박수근 ‘길가에서’ 1954, 캔버스에 유채, 107.7x53cm|갤러리현대

다양한 인간상을 그려낸 인물화는 저마다의 다른 사연을 담고 있다. 이는 보는 이의 시선에서도 달라지곤 하는데,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을 통해 그들의 감정을 상상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화의 매력은 카메라가 발명되고 보편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인물화란 장르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아가 인물화는 한 시대를 보여주는 사료가 되기도 한다. 작품에 재현된 인물의 얼굴, 의복과 생활양식 등을 통해 시대의 흐름과 사회상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는 3월 1일까지 서울 갤러리현대에서 진행되는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한국 근현대 인물화>展은 일제 강점기부터 2000년대 초까지의 시간과 그 속의 사람들을 압축해 보여주는 자리다. 소소한 일상, 가족들을 향한 사랑, 변하지 않은 우리 삶의 고충들은 세월을 거스르는 감동으로 읽힌다.화가 54명의 71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본관과 신관에서 동시에 진행되며, 각각 1부(1910년~1950년대), 2부(1950년~2000년)로 나뉘어 구성됐다.

다양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한국 근현대 인물화>展의 작품들을 추려봤다. 이 전시의 매력은 단언컨대,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고희동 ‘정자관을 쓴 자화상’(1915)”

고희동 ‘자화상’ 1915, 캔버스에 유채, 90.3 x 70cm |도쿄예술대학 소장

고희동 ‘자화상’ 1915, 캔버스에 유채, 90.3 x 70cm |도쿄예술대학 소장

‘정자관을 쓴 자화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의 남겨진 작품 3점 중 1점이라 희소가치가 무척 높다. 사실 작가는 작품의 명을 붙이지 않았다고 한다. 후대의 사람들이 각각 그림의 특징을 잡아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정자관을 쓴 자화상’, ‘부채를 든 자화상’이라고 불렀다.

이번 전시에는 고희동의 작품 외에도 그동안 한국에서 쉽게 만나지 못했던 도쿄예술대학 미술관 소장 작품들이 소개됐다. 김관호, 이종우, 오지호, 김용준(졸업연도 순)의 ‘자화상’이 연이어 전시돼 있는데,. 당시 도쿄예술대학은 자화상을 졸업 작품으로 제출해야 했는데, 이를 통해 근대적 의미의 ‘미술가’라는 정체성을 드러냈다. 이들이 새로이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접근했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김관호 ‘해질녘’(1916)”

김관호 ‘해질녘’ 1916, 캔버스에 유채, 127.5 x 127cm |도쿄예술대학 소장

김관호 ‘해질녘’ 1916, 캔버스에 유채, 127.5 x 127cm |도쿄예술대학 소장

두 여인이 뒤태를 드러낸 채 서 있다. 한 여인은 머리를 감고 또 다른 여인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낸다. 이 작품은 평양 출신의 김관호가 대동 강가에서 목욕하는 두 여인을 그린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누드화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당시 여인들은 그의 그림 속 모델들처럼 강가 목욕을 즐겼을까? 이민수 미술 칼럼니스트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작품은 실제의 풍경 위에 실내에서 스케치한 모델의 누드를 짜깁기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김관호는 서양의 누드화를 일본의 교육을 통해 한국식으로 풀어냈다. 그 진가는 1916년 도쿄 우에노 미술관에서 개최된 문부성 미술 전람회에서 발휘됐다. 일본 화가들의 작품을 누르고 특선에 오른 것. 일본강점기의 설움을 단칼에 베어버린 소식에 <매일신보>는 ‘조선 화가의 처음 얻는 영예’라고 보도했지만 당시 사회 정서상 누드 그림은 함께 실리지 못했다. 여인이 벌거벗은 그림 인고로 사진을 게재치 못함, 이 이유였다.

좀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김관호는 부호의 아들이었다. 고희동에 이어 도쿄예술대학에 입학한 그는 유화에 상당한 소질을 보였는데 재학 중 경복궁 내 총독부 박물관에서 개최된 ‘공진회’ 전람회를 통해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됐다. 이국적이면서도 뚜렷한 이목구비의 외모가 돋보이는 그의 ‘자화상’ 역시 이번 전시에 소개됐는데, 고가의 모피 의상을 입고 있어 그의 ‘배경’을 짐작게 한다.

“배운성 ‘가족도’ (1930~35)”

배운성 ‘가족도’ 캔버스에 유채, 139 x 200.5cm | 갤러리현대

배운성 ‘가족도’ 캔버스에 유채, 139 x 200.5cm | 갤러리현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이지만 사실 이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30~193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가족의 그림은 백인기 가족의 초상화다. 백인기는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자본가이자 서화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그림을 그린 이는 배운성이다. 그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보통학교를 관두고 백인기 집의 서생(남의 집에서 기숙하고 일을 해주면서 공부하는 학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총명한 그를 알아본 백인기는 자신의 아들인 백명곤이 유학을 떠날 때 그를 동행하게 됐다. 다소 방탕했던 생활을 일삼았던 아들이 배운성과 있으면 조금 더 바른길로 가지 않을까, 기대한 부모의 마음이 반영됐다.

그러나 유학 생활을 견디지 못한 백명곤은 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갔고, 배운성은 화가로 독자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우연히 알게 된 독일 화가의 권유로 한국인 최초 유럽 미술학교에도 입학했다. 이 작품은 그가 독일에서 유학한 뒤, 1930년대 파리로 이주하여 활동하던 중 백인기의 가족을 회상하며 제작했다고 한다.

그림에는 한옥 마당에서 아기를 안고 앉아있는 할머니를 중심으로 대가족이 등장한다. 총 17명의 인물이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부터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여인까지 인물들은 모두 다른 포즈, 표정을 취하고 있다. 어른들은 주로 흰옷을 입고 있는 반면, 아이들은 적색, 청색, 황색, 녹색 등 다채로운 색의 옷을 입었다.

배운성은 각 인물의 크기를 다르게 표현해 화면의 깊이를 부여했다. 또 그림 앞쪽에 자리한 개는 서구문물의 영향을 받은 근대기 상류층의 모습을 의미한다. 그림의 양식은 서양화를 취하고 있지만 소재나 기법은 동양적이다. 그의 그림이 이국적이면서도 신비로운 까닭이다. 참고로 그림 왼쪽에 가족 전체를 바라보듯 서 있는 이가 바로 배운성이다.

“이응노 ‘거리풍경-양색시’(1946)”

이응노 ‘거리풍경-양색시’ 1946, 한지에 수묵담채, 50 x 60cm |갤러리현대

이응노 ‘거리풍경-양색시’ 1946, 한지에 수묵담채, 50 x 60cm |갤러리현대

한지에 퍼진 색감이 70여 년이 지난 지금에 봐도 손색이 없다. 아무래도 몸매를 드러내는 상의에 미니스커트, 진한 화장에 하이힐을 신은 양색시미군 병사를 상대로 성매매를 하던 여자들을 일컫는 말에 가장 먼저 시선이 머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을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표정이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훔쳐보는 듯한 이들의 무리와 마치 종이 밖을 뚫고 나올 것 같은 수군거림이 느껴진다면 작가의 의도는 명확하게 전달된 셈이다.

이응노는 일본에서 사생을 통해 현실을 담는 기술을 익혔다.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주변의 풍경과 현실의 인물을 담는 작품을 주로 제작했는데, 현실이라는 소재와 수묵이라는 방법이 다소 이질적이면서도 흥미롭다. ‘거리 풍경- 양색시’는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성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글과 함께 담아낸 작품이다. 동시에 편견에 가득 찬 눈으로 양색시를 바라보는 무리의 사람들을 꼬집었다. 마치 한 편의 시사만화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우측 하단에 적힌 글귀는 다음과 같다.

“바라볼 때에 눈물이 앞을 가리워마지 않노라. 빨리 반성하야 새옷을 벗고 직장으로 직장으로. 제이국민의 현모가 되어주기를 바라노라”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1954)”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1954, 종이에 유채, 29.5 x 64.5cm |갤러리현대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1954, 종이에 유채, 29.5 x 64.5cm |갤러리현대

이중섭은 사물을 오랫동안 관찰하여 그리기로 유명했다. 이 작품은 바로 그 특유의 관찰력에 상상력이 더해진 그림이라 볼 수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자신의 가족을 모티브로 했다. 트레이드마크인 소도 등장한다. 인물들의 행동은 역동적이고 신이 나 보이지만 이 모습은 그가 바라는 이상형의 가족에 가깝다.

일본 분카 학원 미술과에 입학한 그는 재학 중 독립전과 자유전에 출품하며 신인으로 각광받았다. 일본인 여성과 야마모토와도 결혼한 후에는 원산에 머물며 미술교사로 일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당국 아래에서 그의 자유로운 창작활동은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는 6.25전쟁 이후 원산을 떠났다. 피난민으로 부산을 거쳐 제주도 서귀포에 정착하게 됐다.

그러나 종이가 없어 담뱃갑에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처럼 그는 가난했다. 먹고사는 것이 버거워진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고, 혼자 남게 된 이중섭은 홀로 남아 부산, 통영 등지를 전전했다. 일본에 머무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림뿐이었다. 서글프고 답답한 마음을 표현한 ‘길 떠나는 가족’도 그중 하나다. 안타깝게도 그는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정신이상과 영양실조였다.

“천경자 ‘탱고가 흐르는 황혼’ (1978)”

천경자 ‘탱고가 흐르는 황혼’ 1978, 종이에 채색, 46.5 x 42.5cm  |서울특별시

천경자 ‘탱고가 흐르는 황혼’ 1978, 종이에 채색, 46.5 x 42.5cm |서울특별시

흔치 않은 여성 작가이다. 일본 유학 중이던 천경자는 외 할아버지를 그린 ‘조부’와 외할머니를 그린 ‘노부’라는 작품으로 연이어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귀국 후 모교인 전남여고에서 미술교사로 일하며 학교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서 발표한 작품 ‘생태’가 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35마리의 뱀이 한데 엉켜있는 이 그림은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소재와 구도로 시선을 사로잡았고, 그녀는 덕분에 일약 스타작가가 됐다.

꽃과 여인을 주된 소재로 하여 ‘꽃과 여인의 화가’라고 불렸고, 한국화의 채색화 분야에서 독창적 화풍을 개척한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꿈과 정한(情恨)을 일관된 주제로 삼았다. 글재주도 뛰어나 다수의 수필집과 신문·잡지 기고 글을 남겼다.

‘탱고가 흐르는 황혼’ 역시 1995년 출간한 작가의 수필집과 동명인 작품이다. 보랏빛 셔츠를 입고 푸른 장미를 가슴에 꽂은 여인이 담배를 태우는 옆모습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독이 느껴진다. 또 틀어 올린 머리는 마치 뱀을 연상케 한다. 뱀은 그녀에게 가난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소재였다고 한다. 회고적 성격이 짙은 작품들을 제작하며 내면의 세계를 시각화한 그녀는 한 번의 이혼과 엇나간 사랑을 경험하며 관조적 화풍의 그림을 그려왔다. 참고로 이 작품은 2019년 서울옥션에서 8억 원에 낙찰됐다.

그러나 천경자는 1991년 대표작 ‘미인도’의 위작 논란이 불거지며 활동 중단을 선언한다. 그녀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미인도’가 위작이라고 주장했고,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화랑협회는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위작 논란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의 포스트를 참고.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논란, 다시 한번 촘촘히 되짚어 봤습니다.

“이종구 ‘아버지의 소’ (1986)”

이종구 <아버지와 소> 1986 부대 비닐에 유채,  96 x 120cm |갤러리현대

이종구 <아버지와 소> 1986 부대 비닐에 유채, 96 x 120cm |갤러리현대

현대에 이르러, 인물화는 생과 사를 오가며 마주한 실존의 문제, 폐허에서도 삶을 꾸려가는 치열한 풍경을 더불어 표현됐다. 특히 1980년대 민주화 이후 작가들은 달라진 현식 인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유형의 인물화를 제작했다.

민주화 운동과 함께 민중 미술 또한 하나의 장르가 됐는데 민중 화가 이종구는 쌀부대 종이에 아버지의 초상과 농민들의 모습을 그려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아버지의 소’ 역시 쌀부대에 유화로 채색한 작품이다. 그가 쌀부대를 고집한 이유는 이렇다.

“미술 재료인 캔버스나 고급 종이 대신 헌 쌀부대를 화폭으로 사용한 것은, 검게 그을린 노동하는 농부의 진솔한 초상을 화려한 재료에 함부로 그릴 엄두가 나지 않았거니와 농부의 삶과 유기적인 재료로써, 그리고 현대미술의 개념인 오브제가 가지는 상징성과 현실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이종구 <땅의 정신 땅의 얼굴>

이종구는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그림을 종종 그렸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겪고 산업화 시대에 살면서 그 몸에 체화된 전통적인 삶의 문화와 정신이 서구화와 개방으로 무너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여러 변혁기를 산 분”이 아버지라고 표현했다. 그의 아버지는 곧 우리 역사의 산증인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한국 근현대 인물화>
2019년 12월 18일 ~ 2020년 3월 1일
서울 갤러리현대
오전 10시 ~ 오후 6시
일반 5천원, 학생 3천원
유홍준, 최열, 목수현, 조은정, 박명자 자문

사진 갤러리현대

참고 |한국 미술산책 (이민수, 미술칼럼니스트)

네이버지식백과 ‘가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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