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경영

이타적 디자인의 시계 장인 이원 김형수 대표

Shawn Chase 2015. 10. 16. 17:38

2015년 10월호

 

 

기획장회정 기자I정은주(객원기자)I사진 제공이원(1644-5142, www.eone-time.kr)

 

 

브래들리 타임피스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계다. 시침과 분침 대신 작은 구슬 2개가 돌아가며 시간을 나타낸다. 사용자가 손끝으로 이 구슬을 만져 시간을 확인하는 구조다. 이 시계의 독보적 특징이자 시각장애인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된 큰 이유는 바로 사용자가 시간을 확인할 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사용자가 테이블 아래에 손목을 내려놓은 채 두 손가락으로 구슬을 만진다면, 그 누구도 그가 시간 확인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없다. 시계 이름은 미 해군 장교로 복무 중 폭파 사고로 실명한 뒤 패럴림픽 수영 종목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며 재기에 성공한 미국인 브래들리 스나이더의 이름을 땄다.

지금까지 브래들리 스나이더를 포함한 수많은 시각장애인을 만나며 김형수(35) 대표가 깨달은 점은 시각장애인들은 자신이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공통의 정서다. 기존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계는 대부분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제품군. 버튼을 누르면 시간을 소리로 들려준다. 그것은 곧 주변 사람들이 그가 시간을 확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비시각장애인들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사항이지만, 대부분의 시각장애인들은 그 점을 바랐다. 남들과 다르지 않은 제품을 쓰고 싶다는 것. 구별 혹은 차별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MIT 경영대학원 재학 시절 시각장애인이던 옆자리 친구가 종종 제 옆구리를 찔렀죠. ‘지금 몇 시야?’ 그는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었지만, 늘 제게 시간을 물었어요. 그의 시계는 ‘지금은 몇 시 몇 분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는데, 친구는 그 기능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자신이 시계를 보고 있다는걸 동네방네 알리는 것 같다면서요.”

김 대표는 3년 전 그 친구에게서 얻은 하나의 힌트를 구체화시켰다.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모토로 ‘Everyone’을 줄인 이원(Eone)이라는 이름의 회사를 만들었다. 2년여의 고민과 시행착오 끝에 만지는 시계인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탄생시켰고, 2013년 7월 한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전 세계에 소개했다. 본격적인 사업을 위해 필요했던 4만 달러는 단 6시간 만에 채워졌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전 세계 65개국에서 약 60만 달러에 가까운 선주문 매출을 받아 미국 언론의 큰 관심을 끌었다. 현재 생산은 OEM 방식으로 한국에 소재한 공장에서 이뤄지고 있다.

“디자인에는 특정 물건 혹은 서비스의 사용을 편리하게 해주는 기능적 요소가 있어야 해요. 또 독특해야 하죠. 그런데 요즘에는 미학적으로 아주 특별하고 남달라서 특정 계층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멋진 디자인이라고 여기는 것 같아요. 하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고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요소가 있는 디자인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디자인에 스토리를 입히고, 디자인을 통해 서로를 연결시키는 것이 이원이 추구하는 이상이고요.”

김 대표는 워치(Watch)와 타임피스(Timepiece) 모두 시계를 뜻한다고 설명했다(보통 공장에서 기계로 생산하거나 손목에 차는 시계를 워치라고, 장인이 수작업으로 공들여 만드는 시계를 타임피스라고 부른다). 브래들리는 워치 대신 타임피스를 선택했다. 볼 수 없는 사람도, 볼 수 있는 사람도 쓸 수 있는 시계이기 때문이라고. 또 디자인에 끌려 이 시계를 찬 비시각장애인은 시간을 만지면서 시각장애인의 삶에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다는 것. 이를 통해 서로의 경계가 무너질 수 있으며, 이러한 만지는 감각을 보다 더 많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가는 것이 바람이라고도 했다.

1 브래들리 타임피스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계다. 시계판에 달린 작은 2개의 구슬이 시계 분침과 시침 역할을 하며, 사용자는 구슬을 손으로 만져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시각장애인에게도 인기를 끌 만큼 매력적인 디자인이다. 2 김형수 대표와 브래들리 스나이더는 한 달에 한 번 만난다. 사소한 대화를 통해 시각장애인을 위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도 하고 그것을 구체화시키기도 한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낼 미래
김 대표는 ‘참 일관성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가 지원했던 미국의 한 회사 면접 자리에서 퇴짜를 맞으며 들었던 이야기라며 웃었다. 국내에서 고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심리학을 전공해 대학과 대학원을 마쳤다. 이후 신경과학으로 박사과정을 밟다가 군 복무를 위해 귀국했다. 첫 직장은 한 신문사 기획 팀이었고, 이후 한 재무컨설팅 회사에서도 근무했다. 그러다 다시 미국으로 가 MIT 경영대학원에 입학했다.

“과거의 저는 전공했던 공부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때그때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죠. 그런데 제3자 입장에서는 무얼 해도 끈기 없이 쉽게 포기하는 사람으로 보였나 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항상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는다고 볼 수도 있죠. 또 망설이지 않고 시도해보는 성격이 브래들리 타임피스의 탄생에 큰 도움이 된 건 분명합니다.”

이렇듯 재미있는 삶을 선택해 살아온 김 대표처럼 이원이 구상 중인 프로젝트들도 다채롭다. 브래들리 타임피스 이후 향후 1년간은 시계에 중점을 두려고 한다. 세계적인 시계 브랜드로 경쟁력을 얻으려면 적어도 3, 4개 이상의 새로운 디자인을 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진 이후에 이타적 디자인을 담은 차기작을 내놓고 싶다고 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담은 제품 다섯 가지를 2020년까지 출시하는 것이 현재의 계획.

김 대표의 이야기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요즘 같은 최첨단 시대에 장애인들을 위한 제품이 예상처럼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시계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아이템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브래들리 타임피스가 큰 인기를 끈 것도 이러한 상황을 설명해주는 증거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제품화시키고 싶은 것이 큰 목표 중 하나다.

“여러 시각장애인들과 모여 회의를 시작했어요. 그때 제가 받은 첫 질문은 점자를 읽을 줄 아는 시각장애인이 몇이나 될 것 같냐는 것이었죠. 10명 중 1, 2명만이 점자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한하고, 이원이 할 수 있은 일이 분명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당시 그가 놀랐던 점 중 하나는 시각장애인들이 제품의 색깔이나 디자인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원이 가장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다. 그것은 바로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들도 비시각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예쁜 디자인과 멋진 색상을 원한다.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시각장애인들의 생활과 관심사를 이해하는 일이었어요. 특정 고객을 목표로 하는 제품을 디자인하려면 그들의 생활, 문화, 가치관을 잘 알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아직까지도 브래들리 스나이더씨와 매달 만나서 의견을 주고받고 있어요. 실제로 브래들리 블랙은 그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모델이기도 해요.”

지금까지 브래들리 타임피스에 대한 반응은 조금씩 다르다. 시각장애인의 사회 참여도가 높은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매우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이 멋을 내기 위해 찰 수 있는 시계라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고. 그러나 시각장애인의 사회적 참여가 상대적으로 적은 국가에서는 아직도 가격 책정에 대한 이견이 많다고 했다. 앞으로 개선해야 할 사항임은 분명하다.

“기능성이 좋은 것은 물론이고 디자인 또한 사랑받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 겁니다. ‘장애인을 위한 제품은 디자인이 별로다’라는 편견을 깨고 싶어요. 비장애인이 반해서 구입할 만큼, 그런 빛나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저와 이원의 바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편함을 제품으로 돕고 싶은 마음, 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하지만 최대한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마음. 그 마음을 가득 담아 만들 보물과도 같은 제품들. 김 대표와 이원 그리고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뤄낼 이타적 디자인이 만들 새로운 세상을 응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