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치

文대통령이 살려낸 '김원봉' 논란..."근데 김원봉이 누구지?"

Shawn Chase 2019. 6. 8. 21:37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입력 2019.06.08 10:00


[스마트톡] 전문기자가 설명해주는 논란의 주인공 김원봉
독립 무장투쟁에는 기여, 김구와는 대척점
"일본 경찰에 뺨맞고 월북, 김일성의 남침에 반대해 숙청"은 확인안돼



문재인 대통령이 6일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김원봉(1898~1958)’을 소환해냈다. ‘김원봉 재평가’는 진보 진영에서 간헐적으로 제기해온 아젠다 중 하나였다. 대통령은 이날 마음을 먹은 듯, 김원봉의 ‘의미’를 나열했다. "우리 사회를 보수와 진보,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며 "김원봉의 광복군 합류가 독립운동 역량의 결집 계기였으며 국군 창설의 뿌리와 한·미동맹의 토대로 이어졌다"고 평가한 것이다. 진보에서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데 반해, 보수진영에서는 "시점과 논리 모두 잘못됐다"고 강력반발하고 있다.

영화 ‘밀정’ ‘암살’등을 통해 1920년대 약산 김원봉은 다소의 대중적 지명도를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전, 이후의 행적은 대중 매체를 통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때문에 진보 진영에서 제기하는 각종 ‘설(設)’은 검증없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제에 부역한 형사로부터 뺨을 맞은 김원봉이 분을 못이기고 월북했다" "김원봉은 김일성의 남침 노선에 반대하다 숙청됐다" 같은 이야기들이다.

김기철 조선일보 문화부 학술전문기자에게 ‘영화 바깥 김원봉’을 물어봤다.
다음은 일부 내용.

Q. 김원봉,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A. 김원봉은 21세에 의열단을 만들어 경찰습격·일본 고위직 암살 등의 형태로 독립운동을 한 시대의 풍운아였다. 독1948년 남북협상차
북한을 방문했을 때 월북을 해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다 1958년 숙청당했다.

Q.일본이 김구보다 김원봉에게 더 높은 현상금을 걸었다던데 업적이 더 크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의미인가
A. 김원봉이 창단한 의열단은 1920년대 독립운동 당시 일본에 무장투장을 한 단체다. 당시 국내외 신문에도 많이 알려져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투사 중 한 명이 됐다. 특히 일본인들에게는 김원봉이 커다란 위협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Q.장준하가 기록한 김원봉은?
A.독립운동가 고 장준하 선생은 저서 ‘돌베개’에서 김원봉이 일본군을 탈영해 광복군에 가담하려는 조선인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술과 미인계를 동원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김원봉의 분열주의를 지적한 것이다.

Q 김원봉이 북한에서 숙청 당한 이유가 남침을 반대해서라는데.
A. 김일성이 연안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김원봉이 포함됐다는 설부터 시작해 남침 반대로 숙청이 됐다는 설 등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김일성이 북한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김원봉을 장애물로 인식해 숙청했다는 것이다.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했다는 말은 자료로 확인된바 없다.

Q 문 대통령이 국군의 뿌리라고 말하는 배경은 무엇인가, 어느 부분이 문제가 되는건가?
A.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용대가 1930년대 후반 광복군에 통합이 돼 광복군의 한 원류가 됐다는 것은 사실이다. 광복군이 해방 후 국군을 창설하는데에 주요한 요소를 담당했다는 것을 본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월북 후 북한 내각의 국가검열상·노동상 등 고위직을 지내면서 6·25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국군의 뿌리’가 됐다는 발언은 국민 감정상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Q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김원봉을 이야기 하는건가요?
A. 문재인 대통령이 김원봉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영화 ‘암살’을 본 뒤다. SNS에 "김원봉 같은 분이 빨리 서훈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남길 정도였다. 영화 암살이 얼마나 고증이 정확히 됐는지는 모르지만 김원봉의 1948년 이후 행적은 묘사하지 않고 앞부분 행적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춰 미화한 부분이 있다.

Q 김원봉을 인정했을때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이 발언이 왜 문제입니까.
A. 1945년 이전까지는 인정할 부분이 있다. 정부의 방침도 ‘1945년 이전까지 독립에 기여를 헀으면 인정하자’ 주의로 가고 있다. 그러나 1945년 이후 국가에서 주는 훈장은 ‘건국훈장’이다. 건국이라 함은 1948년 이후 정부 수립때 대한민국 건국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어야 하는 전제가 있다. 그 이전에 아무리 독립운동에 기여를 했다 하더라도 북한 건국에 기여하거나 참여한 사람들은 서훈에서 배제시킨다. 만약 김원봉이 서훈되면 북한 건국과 6·25전쟁 발발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사람에게 서훈을 주는 첫 사례가 될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지난 3월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제2관에서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국립여성사전시관 특별기획전 서울전'이 개막했다. 사진은 의열단원 박차정(왼쪽)과 의열단장 김원봉의 결혼사진./연합뉴스
지난 3월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제2관에서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국립여성사전시관 특별기획전 서울전'이 개막했다. 사진은 의열단원 박차정(왼쪽)과 의열단장 김원봉의 결혼사진./연합뉴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07/2019060702472.html

[단독]김원봉, 6·25때 北장관 맡아 군수 지원… '南 점령지 통제' 지휘도

입력 2019.06.08 01:31 | 수정 2019.06.08 01:40

[김원봉 논란] 1948년 월북후 反대한민국 행적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언급한 김원봉(1898~1958)이 자발적으로 월북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미국 기밀문서가 7일 발견됐다. 여권과 학계 일각에선 김원봉의 월북이 해방 후 '친일파 경찰'에 체포돼 심문받는 수모 등을 겪어 불가피했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를 뒤집는 얘기다. 김원봉은 6·25전쟁 기간 북한 국가검열상, 노동상을 지냈다. 검찰총장, 노동부 장관에 해당하는 직위다. 김일성 정권의 '전쟁 지도부'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김원봉을 '국군의 뿌리'이자 애국으로 연결시켰다.

◇美 문서 "김원봉, 스스로 '좌파'로 인식"

6·25 당시 미 극동군과 제8군을 주축으로 편성됐던 '주한 유엔 유격군'은 전쟁 기간 빨치산 관련 첩보 보고서를 작성해 본국 국방부에 전달했다. 국회도서관이 소장 중인 300여쪽의 이 보고서엔 '김원봉' 관련 항목이 포함돼 있다.

1953년 3월 19일 자 보고서는 김원봉의 월북 경위에 대해 '스스로를 좌파(leftist)로 인식했고, 삼촌(uncle·실제론 인척)인 김두봉(북한 초대 국가수반)과의 관계 때문에 서울을 떠나 1946년(실제론 1948년) 월북했다'고 기록돼 있다.

1기 北내각서 장관직 오른 김원봉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내각 기념사진. 둘째 줄 왼쪽에서 둘째가 김원봉(국가검열상)이다. 앞줄 왼쪽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1기 北내각서 장관직 오른 김원봉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내각 기념사진. 둘째 줄 왼쪽에서 둘째가 김원봉(국가검열상)이다. 앞줄 왼쪽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국립중앙도서관
이 보고서는 김원봉의 광복군 경력을 언급하며 "중국 공산당 지도자 저우언라이의 설득에 넘어간 김원봉이 중국 남동부의 국민당군(Nationalists)을 지원하는 대신, 중국 북부의 중공군 공산주의자(Communists)를 지원했다"는 부분도 들어 있다. 당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의 국민당 정권과 협력해 항일 전쟁을 하던 때였다. 보고서에 적시된 사실들의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김원봉은 국민당 군(軍)과 많은 작전을 수행했다"고 했다.

◇"김원봉, 6·25 남침 인력·무기 동원"

김원봉의 행적을 기록한 美 첩보 보고서.
김원봉의 행적을 기록한 美 첩보 보고서. /국회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방부 등에 따르면, 월북 이후 김원봉은 1948년 조선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를 통해 9월 9일 초대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지금의 우리로 치면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이 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당시 그는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홍명희 등에 이어 7번째 내각 멤버로 적시됐다. 김원봉은 같은 해 11월 미군 주둔을 반대하는 성명을 홍명희 등과 함께 발표했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공화국 남반부 해방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선거 중앙선거지도부'를 구성했는데, 9명의 지도부 중 첫 번째로 김원봉의 이름을 올렸다. 6·25전쟁 초반 북한이 점령한 대한민국 영토에서 우리 정부의 권력 기관을 철폐하고 북한 통치 체제를 이식하는 소위 '안정화 작업'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1951년 5월 김일성은 '공화국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를 맡은 김원봉에게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국내 일각에선 "김원봉이 6·25 전쟁을 반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52년 3월 김원봉은 북한 정권이 수여한 '노력훈장'의 첫 번째 수상자에 올랐다. 당시 노동신문은 "조국의 통일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미제의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정권기관 및 당 단체 지도일꾼들에게 공화국 훈장을 다음과 같이 수여한다"고 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공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은 것이다.

그해 5월에는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노동부 장관)으로 직책이 바뀌었다. 전시(戰時) 노동상은 노동력의 전시 동원과 무 기 생산 등에 관여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6·25전쟁 후 김원봉은 1954년 전국열성자대회에 참가하고, 1955년 헝가리 해방 10주년 기념축전 대표단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전문가들은 "스스로 월북해 6·25 공훈으로 김일성 훈장까지 받은 인물을 우리 대통령이 6·25 순국 영령을 기리는 현충일에 '국군의 뿌리'로 거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김구 "臨政을 눈엣가시로 여긴 사람", 장준하 "판에 박힌 공산분자"


입력 2019.06.08 03:00

[김원봉 논란] 임정 주역들이 본 김원봉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1200만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2015년 개봉)에서 의열단장 김원봉 역을 맡은 배우 조승우는 미소 띤 얼굴로 인사말을 던진다. 김원봉은 친일파 암살을 이끈 이 스타 배우 연기 덕분에 '영웅'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 대표 시절이던 2015년 이 영화를 보고 "최고급 독립 유공자 훈장을 달아 드리고 술 한잔 바치고 싶다"고 했을 정도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08/201906080005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