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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훈기의 스페셜야구] 류현진의 구종은 도대체 몇 가지일까?

Shawn Chase 2019. 6. 7. 00:20

애리조나 원정서 7이닝 무실점 호투로 시즌 9승째 순항

MLB 통계 사이트 중 하나인 팬그래프스닷컴(fangraphs.com)은 각 투수의 구종도 분류해놓고 있습니다.

류현진(32•LA 다저스)을 찾아보면 다른 어떤 투수보다 많은 구종을 구사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포심(32.1%), 체인지업(24.5%), 커터(21.1%), 싱커(투심, 11.9%), 커브(10%) 그리고 슬라이더(0.3%)까지 총 6가지 구종을 구사합니다.(5일 애리조나전 이전까지의 올 시즌 종합 기록입니다.)

참고로 류현진의 동료 클레이턴 커쇼는 4가지 구종을 던집니다. 포심(40.2%), 슬라이더(41.7%), 커브(17.2%), 체인지업(0.9%)을 던집니다.


5일 애리조나 원정에서 7이닝 무실점으로 시즌 9승째를 거둔 류현진. 쾌속 행진이 6월에도 이어집니다. <사진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구종이 많다고 꼭 뛰어난 투수는 아닙니다.

무기가 많다는 뜻이긴 하지만, 그 무기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느냐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두 투수의 기록을 보면 차이가 나는 부분은 각 구종의 구사 비율입니다. 커쇼는 포심과 슬라이더가 주종이고, 체인지업은 사실 살짝 보여주는 정도입니다. 커브가 제3의 피치입니다. 2개의 주력 구종과 3번째 구종, 그리고 곁들이는 4번 구종, 이런 비율이 선발 투수에게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류현진은 슬라이더를 제외한 나머지 5가지 구종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아주 고르게 분포돼 있습니다. 물론, 포심과 체인지업이 많지만 30%대 초반과 20%대 중반이고, 커터도 20%가 넘으며 투심과 커브도 10% 이상을 구사합니다. 5개의 구종을 이렇게 상대적으로 고르게 던지는 투수는 정말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류현진의 구종은 위의 기록대로 6가지일까요?


각 구종은 나름대로의 특징이 확실히 있고, 그래서 구사하는 방식도 패턴이 있습니다.

포심 패스트볼은 힘으로 윽박지르는 구종이고, 회전이 좋을 경우 떠오르는 느낌을 보인다고 해서 라이징 패스트볼이라고 칭송받기도 합니다. 우투수의 투심 패스트볼은 오른손 타자의 몸쪽으로 살짝 움직이고, 우투수의 컷패스트볼은 왼손 타자의 몸쪽으로 살짝 움직입니다. 커브는 상대적으로 느리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슬라이더는 횡과 종으로 움직이며 커터의 사촌쯤 됩니다. 그리고 체인지업은 바깥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러니까 좌타자의 땅볼 유도 때는 우투수가 투심을, 우타자의 헛스윙 유도 때는 좌투수가 체인지업을, 타이밍을 빼앗을 때는 느린 커브를, 좌타자를 윽박지를 때는 우투수가 커터를 구사하는 등 일종의 패턴과 어느 정도 공식이 있습니다.

류현진이 추신수(36•텍사스 레인저스)를 처음 상대 했을 때 느닷없이 체인지업을 던진 것을 기억하는 팬들이 있을 겁니다. 이건 그야말로 공식을 벗어난, 선배 추신수가 아끼는 후배 류현진을 장난스럽게 질타한 사건(?)이었습니다. ‘왼손 타자에게 왼손 투수가 체인지업을 던지는 건 반칙이다’라고. 어쩌면 그 순간이 류현진의 사고의 전환이 된 대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구종을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구사해도 무방하다는. 단! 제구력에 자신이 있을 경우에만 통하는 방식이지만요.


류현진은 1회말 2사 1,3루 위기에서 워커를 상대로 각각 다른 구속과 위치에 5개의 체인지업을 꽂으며 투수 땅볼로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1,2,3,5,7번이 체인지업입니다. ⓒMLB.com


5일 시즌 12번째 선발 등판인 애리조나 원정 1회말 2사 주자 1,3루의 위기에서 크리스찬 워커와의 대결을 보겠습니다.

올 시즌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루키 우타자 워커는 전날도 홈런을 쳤고, 최근 6경기 4할2푼9리(21타수 9안타) 3홈런의 6타점의 맹타를 휘두르며 신인왕을 겨냥하는 타자.

류현진은 워커에게 초구 가운데서 살짝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헛스윙을 끌어냈습니다. 2구째는 더 멀리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다시 헛스윙. 그리고 3구째, 이번에는 외곽으로 멀리 빠지는 체인지업을 던졌지만 워커가 참아냈습니다. 구속은 127.8km, 126.4km, 124.5km로 약간씩 달랐습니다. 모두 체인지업이었지만 공이 들어간 위치도, 그리고 구속도 차이가 났습니다. 이건 분류상 모두 같은 구종이긴 하지만 타자에게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갔을 제각각의 공입니다.

워커가 버티면서 풀카운트까지 승부를 끌고 가자 류현진은 7구째 바깥쪽으로 조금 덜 떨어지는 126.6km의 체인지업을 또 던졌습니다. 이 타석에서만 5개째 체인지업, 설마 하던 워커가 아차 싶어 어정쩡하게 낸 방망이에 공이 맞아 류현진 앞으로 굴러가는 땅볼이 되고 말았습니다. 힘들게 시작한 1회말이 그렇게 끝났습니다.


사실 삼자범퇴로 끝날 이닝이었는데, 1루수 프리즈와 유격수 시거의 실책이 연이어 나오면서 주자 1,3루의 큰 위기에 몰린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서 류현진은 5개의 체인지업을, 5개의 다른 지점에, 5가지 다른 구속으로 던지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실책을 했던 동료들은 가슴을 쓸어내렸고, 1회초 벨린저의 2타점 3루타로 앞선 상승세의 분위기를 다저스는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날 류현진은 7이닝 동안 104개의 공을 던졌는데 체인지업을 무려 40개나 던졌습니다.

올 시즌 평균 24.5%가 아니라 38.5%의 아주 높은 비율이었습니다. 애리조나 타자들이 연구했던 것과는 물론 차이가 있는 구종배합이었습니다. 커터는 16개밖에 던지지 않았고, 포심도 27개로 26%로 평소보다 낮았습니다. 결국 이날 초반 자신의 감을 믿고 체인지업을 주종으로 던진 날이었는데. 이날 무려 17개의 땅볼 아웃을 잡아낸 가운데 13개가 체인지업이었습니다. 워낙 뛰어난 체인지업을 지난 투수지만 오늘은 그 구종이 춤을 춘 날이었습니다. 특히 이날 4번 타자로 나선 유일한 좌타자 데이빗 페랄타를 상대로 한 3번의 대결에서도 류현진은 체인지업을 적극적으로 구사했습니다.

모두 5개의 체인지업을 페랄타에게 던졌는데, 4회말 두 번째 대결과 7회말 세 번째 대결에서는 모두 체인지업을 결정구로 던져 땅볼 아웃을 끌어냈습니다. 상대의 가장 강한 좌타자에게 체인지업을, 그것도 4회에는 가운데, 7회에는 오히려 멀게 떨어뜨리는 틀을 깬 자유로운 제구로 땅볼 아웃을 잡아내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류현진의 또 한 가지 강점은 패스트볼 구종의 구속 변화입니다.

일반적으로 포심-투심-커터 순으로 구속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류현진은 이날도 보여주었듯 때론 148km 투심을 던지고, 또 142km 포심을 던지기도 하며, 커터가 138km에서 143km까지 변화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커브 역시 110km 이하에서 118km까지 그때그때 다릅니다. 이 정도면 구종이 6가지가 절대 아닙니다. 아마 타자의 느낌으로는 한 스무 가지 공을 던지는 괴물로 느껴질 것입니다.


공수에서 류현진의 최고 도우미인 벨린저는 이날도 선제 2타점에 수비 어시스트 등 맹활약했습니다.  <사진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야구가 이렇게 쉬우면 안 되는데 류현진은 그저 느긋하게 즐기면서 메이저리그의 타자들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느낌을 줍니다.

아, 애리조나가 NL 서부조 4위에 떨어진 약팀이라서 좀 쉬울 수도 있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애리조나 타선은 NL 15개 팀 중에 좌투수 상대 타율 1위(.297), 홈런 1위(35개), 장타수 1위(91개), OPS 1위(.881)로 ‘왼손 투수 킬러’인 팀입니다.


이 팀을 상대로 피안타 단 3개만 내주며 동료들의 3개에 걸친 실책에도 단 1점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1회 실책 2개의 위기를 넘긴 후 3회말에는 선두 타자 투수 클락이 친 빗맞은 내야 안타를 처리하다가 1루에 악송구를 했지만 뒤를 받친 우익수 벨린저가 2루로 뛰던 클락을 잡아내며 위기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벨린저의 빅리그 최다인 8번째 외야 어시스트의 순간. 다저스는 현재 리그 최고의 투수와 최고의 타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7회말에는 1사 후 워커에게 안타를 맞았지만 바가스를 짜 맞춘 병살타구로 유도했는데 유격수 시거가 악송구하며 1,3루가 됐습니다. 그러나 다음 타자 아메드에게 다시 유격수 땅볼을 끌어내 기어코 6-4-3 병살로 이닝을 마쳤습니다. 또 체인지업이 결정구였습니다. 야구가 이렇게 쉽다니!


이날은 삼진이 2개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류현진은 1회말 잇단 실책으로 공을 25개나 던지고 나자 ‘오늘은 삼진은 됐고, 빠르게 타자들을 처리하자’고 마음 먹은 지도 모릅니다. 야구에서 말이 안 되는 상상일 수 있지만 요즘 류현진은 자신만의 ‘야구 신의 존’에 들어가 있는 느낌입니다. 1회 25개의 공을 던진 바로 다음 이닝을 류현진은 7개의 공으로 끝냈습니다.

7이닝 피안타 3개에 무실점으로 애리조나 타선을 막은 류현진은 시즌 평균자책점을 1.35로 더 끌어내렸습니다. 시즌 9승째를 수확하며 볼넷(5개)과 승수의 차이를 4개로 벌렸습니다.

‘5월의 투수’로 선정된 코리안 몬스터는 6월에도 그 위용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P.S. '트루 블루 LA'에 따르면   류현진은 최근 110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2실점 이하 1볼넷 이하'를 12경기 연속 기록한 최초의 투수입니다. 10경기 연속 2실점 이하 1볼넷 이하 투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 기사는 minkiza.com, ESPN.com, MLB.com, baseballreference.com, fangraphs baseball, baseballsavant.mlb.com 기록 등을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