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 유행했던 `회곽묘`
나무관을 석회로 둘러싸 굳혀
무덤 도굴 방지 목적이었지만
생석회 굳으면서 높은 열 발생
미생물 분해되며 부패방지효과
조선후기 나무관 위에 흙쌓는
토광묘 확산되며 미라 사라져
썩지 않고 건조돼 원래 상태에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 있는 시체를 일컫는 `미라(mirra)`는 사실 포르투갈어다. 이 말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영어로는 `머미(The Mummy)`. 둘 다 고대 이집트 등에서 미라를 만들 때 방부제로 썼던 몰약(myrrh·mummia)에서 유래한다. 미라는 1932년 유니버설스튜디오의 영화 `미라(The Mummy)`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공포영화와 소설의 단골 소재로 각광을 받았다.
미라 하면 이집트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영혼불멸 사상을 믿었다. 그들은 시신에 혼이 깃들어 있어 이를 잘 보존해야 죽은 사람이 사후 영원한 삶을 산다고 여겨 미라를 제작했다. 이집트인들은 부패가 쉬운 뇌와 내부 장기를 모두 꺼낸 뒤 따로 보관하고 몸은 천연 탄산소다를 덮어 40일간 말렸다. 그리고 몸속에 톱밥 등을 넣은 후 아마포로 감아 미라를 완성했다.
미라는 사후 미생물 등에 의한 부패가 억제될 때 만들어진다. 이집트처럼 인공적 미라가 있지만 건조하거나 차갑거나 공기가 차단된 환경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미라도 있다.
건조 지역인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 보존 상태가 매우 우수한 미라가 집단적으로 출토돼 이목을 모았다. 2006년부터 타클라마칸 사막의 소하묘지(기원전 2000~1400년 조성)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온 중국 신장문물고고연구소가 2013년 10월 한국 경주에서 그간의 성과를 발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역 미라는 놀랍게도 매장 당시의 펠트모자, 모직망토, 가죽장화 등 복장이 온전한 상태였다. 특히 고구려 조우관(鳥羽冠)을 연상시키는 깃털을 모자나 장화에 꽂고 있는 미라도 있었다. 5300년 전 살해된 알프스 `아이스맨`과 500년 전 희생물로 바쳐진 페루의 `얼음소녀`는 혹한이 보존의 비결이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2000년 이후에만 △양주 소년 미라(5세 전후·출토 시기 2001년) △파주 임산부 미라(23세·2002년) △일산 흑미라(64세·2003년) △안산 봉미라(51세·2003년) △대전 학봉장군 부부 미라(42세·2004년) △장성 미라(2006년) △강릉 미라(61세·2007년) △나주 미라(40대 중반·2009년) △하동 임산부 미라(2009년) △문경 미라(2010년) △오산 미라 2구(30대 초반, 10대 후반·2010년) 등 10곳 이상에서 발굴됐다.
미라는 장기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식습관, 질병, 자연환경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사자료가 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울대, 고려대, 단국대 의과대학 연구팀이 각각 치아분석, 부검, 현미경 관찰, 내시경 검사, X선·컴퓨터단층촬영(CT)·자기공명영상(MRI) 등 영상의학적 검사를 실시해 미라의 사망 연도와 당시 연령, 사망 원인은 물론 생활양식과 질환까지 밝혀냈다.
해평 윤씨 집안의 양주 소년 미라는 대장에서 간흡충(민물고기를 날로 먹었을 때 감염)의 알과 간조직에서 간염바이러스 유전자가 검출됐지만 이로 인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파평 윤씨 집안의 며느리로 판단되는 파주 임산부 미라는 키가 153.5㎝ 정도이며 분만 도중 자궁 파열로 인한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었다. 흑미라는 유난히 검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며 CT에서 흉부의 금속 파편이 확인돼 타살 가능성이 제기되며, 봉미라는 버선에 `봉`자가 쓰여 있었다.
학봉장군 부부 미라의 경우 여산 송씨 족보 등을 참고해 학봉장군은 1420년대에 출생해 42세쯤 사망했고 부인은 50대 초반인 1468년에 사망한 것으로 분석됐다. 학봉장군은 키 167.7㎝에 턱수염과 콧수염이 발달했다. 식도와 위 등에서 각혈을 지혈하는 애기부들 꽃가루가 다량 검출된 것을 미뤄볼 때 학봉장군이 생전에 중증 폐질환을 앓았으며 사망 원인은 기도폐색으로 추측됐다. 부부의 위와 장에서 육류와 채소류가 골고루 검출돼 균형 잡힌 식생활을 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강릉 미라의 주인공은 강릉 최씨 가문의 최경선(1561~1622년)으로 왼쪽 아래턱뼈 외상으로 인한 출혈로 사망했다. 나주 미라는 인조 때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지낸 류지경의 어머니다. 질에서 태반이 나와 있고 탈장이 돼 있으며 혀를 깨문 상태로 죽었다. 오산 미라는 한 남편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인의 것으로 생각된다. 학봉장군 미라가 15세기 것으로 가장 빠르고 나머지는 모두 16세기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특정 시기에 미라가 집중되는 이유는 뭘까. 조선 전기에서 임진왜란 전후 사대부가에서는 회곽묘(灰槨墓)가 유행한다. 이는 나무관 전체를 횟가루로 둘러싸 돌처럼 단단하게 굳힌 무덤이다. 회의 두께는 최대 35㎝에 이르렀던 것으로 조사된다. 도굴은커녕 물조차 스며들 수 없는 구조다. 실록에 세종대왕은 장인 심온이 죽었을 때 관곽과 석회를 내렸다고 적혀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실험에서 토광묘에 묻힌 실험용 쥐는 10주 후 부패가 심하게 진행되는 데 반해 회곽묘의 쥐는 형태가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나타났다.
회곽묘 제작에 사용된 생석회는 굳기 시작하면 높은 열을 발생시킨다. 실험에서는 관 내부 온도가 100도 이상으로 급격히 상승했다. 이 과정에서 미생물은 대부분 죽는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 후기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직접 넣거나 나무관에 시체를 넣어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리는 토광묘가 확산되면서 미라도 함께 자취를 감춘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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