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 유행했던 `회곽묘`
나무관을 석회로 둘러싸 굳혀
무덤 도굴 방지 목적이었지만
생석회 굳으면서 높은 열 발생
미생물 분해되며 부패방지효과
조선후기 나무관 위에 흙쌓는
토광묘 확산되며 미라 사라져
![2001년 11월 15일 경기 양주군 해평 윤씨 선산에서 이장 작업을 하던 중 발견된 남자 어린이 미라. 촉촉한 피부에 손발톱은 물론 머리카락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주목받은 미라다. 치의학검사로 추정된 미라의 나이는 5.5세였으며 기관지 안의 출혈을 감안할 때 두창 또는 두창의 합병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통적으로 어린이 사망 시에는 묘지를 쓰지 않는데 드물게 회곽묘에 매장돼 미라를 남겼다. [사진 제공 =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https://file.mk.co.kr/meet/neds/2019/05/image_readtop_2019_299915_15572700663738666.png)
![사진설명](https://img.mk.co.kr/main/2015/mk_new/ic_arrow_top.gif)
썩지 않고 건조돼 원래 상태에 가까운 모습으로 남아 있는 시체를 일컫는 `미라(mirra)`는 사실 포르투갈어다. 이 말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영어로는 `머미(The Mummy)`. 둘 다 고대 이집트 등에서 미라를 만들 때 방부제로 썼던 몰약(myrrh·mummia)에서 유래한다. 미라는 1932년 유니버설스튜디오의 영화 `미라(The Mummy)`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공포영화와 소설의 단골 소재로 각광을 받았다.
미라 하면 이집트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널리 알려진 대로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영혼불멸 사상을 믿었다. 그들은 시신에 혼이 깃들어 있어 이를 잘 보존해야 죽은 사람이 사후 영원한 삶을 산다고 여겨 미라를 제작했다. 이집트인들은 부패가 쉬운 뇌와 내부 장기를 모두 꺼낸 뒤 따로 보관하고 몸은 천연 탄산소다를 덮어 40일간 말렸다. 그리고 몸속에 톱밥 등을 넣은 후 아마포로 감아 미라를 완성했다.
미라는 사후 미생물 등에 의한 부패가 억제될 때 만들어진다. 이집트처럼 인공적 미라가 있지만 건조하거나 차갑거나 공기가 차단된 환경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미라도 있다.
건조 지역인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서 보존 상태가 매우 우수한 미라가 집단적으로 출토돼 이목을 모았다. 2006년부터 타클라마칸 사막의 소하묘지(기원전 2000~1400년 조성)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온 중국 신장문물고고연구소가 2013년 10월 한국 경주에서 그간의 성과를 발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역 미라는 놀랍게도 매장 당시의 펠트모자, 모직망토, 가죽장화 등 복장이 온전한 상태였다. 특히 고구려 조우관(鳥羽冠)을 연상시키는 깃털을 모자나 장화에 꽂고 있는 미라도 있었다. 5300년 전 살해된 알프스 `아이스맨`과 500년 전 희생물로 바쳐진 페루의 `얼음소녀`는 혹한이 보존의 비결이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2000년 이후에만 △양주 소년 미라(5세 전후·출토 시기 2001년) △파주 임산부 미라(23세·2002년) △일산 흑미라(64세·2003년) △안산 봉미라(51세·2003년) △대전 학봉장군 부부 미라(42세·2004년) △장성 미라(2006년) △강릉 미라(61세·2007년) △나주 미라(40대 중반·2009년) △하동 임산부 미라(2009년) △문경 미라(2010년) △오산 미라 2구(30대 초반, 10대 후반·2010년) 등 10곳 이상에서 발굴됐다.
미라는 장기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식습관, 질병, 자연환경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사자료가 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울대, 고려대, 단국대 의과대학 연구팀이 각각 치아분석, 부검, 현미경 관찰, 내시경 검사, X선·컴퓨터단층촬영(CT)·자기공명영상(MRI) 등 영상의학적 검사를 실시해 미라의 사망 연도와 당시 연령, 사망 원인은 물론 생활양식과 질환까지 밝혀냈다.
![복원한 회곽묘 모형. [사진 제공 = 국립문화재연구소]](https://file.mk.co.kr/meet/neds/2019/05/image_readmed_2019_299915_15572700673738667.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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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 윤씨 집안의 양주 소년 미라는 대장에서 간흡충(민물고기를 날로 먹었을 때 감염)의 알과 간조직에서 간염바이러스 유전자가 검출됐지만 이로 인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파평 윤씨 집안의 며느리로 판단되는 파주 임산부 미라는 키가 153.5㎝ 정도이며 분만 도중 자궁 파열로 인한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었다. 흑미라는 유난히 검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며 CT에서 흉부의 금속 파편이 확인돼 타살 가능성이 제기되며, 봉미라는 버선에 `봉`자가 쓰여 있었다.
학봉장군 부부 미라의 경우 여산 송씨 족보 등을 참고해 학봉장군은 1420년대에 출생해 42세쯤 사망했고 부인은 50대 초반인 1468년에 사망한 것으로 분석됐다. 학봉장군은 키 167.7㎝에 턱수염과 콧수염이 발달했다. 식도와 위 등에서 각혈을 지혈하는 애기부들 꽃가루가 다량 검출된 것을 미뤄볼 때 학봉장군이 생전에 중증 폐질환을 앓았으며 사망 원인은 기도폐색으로 추측됐다. 부부의 위와 장에서 육류와 채소류가 골고루 검출돼 균형 잡힌 식생활을 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강릉 미라의 주인공은 강릉 최씨 가문의 최경선(1561~1622년)으로 왼쪽 아래턱뼈 외상으로 인한 출혈로 사망했다. 나주 미라는 인조 때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지낸 류지경의 어머니다. 질에서 태반이 나와 있고 탈장이 돼 있으며 혀를 깨문 상태로 죽었다. 오산 미라는 한 남편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인의 것으로 생각된다. 학봉장군 미라가 15세기 것으로 가장 빠르고 나머지는 모두 16세기인 것으로 보인다.
![](https://file.mk.co.kr/meet/neds/2019/05/image_readbot_2019_299915_15572700663738665.jpg)
이처럼 특정 시기에 미라가 집중되는 이유는 뭘까. 조선 전기에서 임진왜란 전후 사대부가에서는 회곽묘(灰槨墓)가 유행한다. 이는 나무관 전체를 횟가루로 둘러싸 돌처럼 단단하게 굳힌 무덤이다. 회의 두께는 최대 35㎝에 이르렀던 것으로 조사된다. 도굴은커녕 물조차 스며들 수 없는 구조다. 실록에 세종대왕은 장인 심온이 죽었을 때 관곽과 석회를 내렸다고 적혀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실험에서 토광묘에 묻힌 실험용 쥐는 10주 후 부패가 심하게 진행되는 데 반해 회곽묘의 쥐는 형태가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나타났다.
회곽묘 제작에 사용된 생석회는 굳기 시작하면 높은 열을 발생시킨다. 실험에서는 관 내부 온도가 100도 이상으로 급격히 상승했다. 이 과정에서 미생물은 대부분 죽는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 후기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직접 넣거나 나무관에 시체를 넣어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리는 토광묘가 확산되면서 미라도 함께 자취를 감춘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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