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안 의사, 러 언론 “당당하고 의연했다”…묻힌 장소도 언급

Shawn Chase 2019. 5. 28. 18:51

이상호 선임기자 shlee@kyunghyang.com


입력 : 2019.05.28 15:06


안 의사, 러 언론 “당당하고 의연했다”…묻힌 장소도 언급


“죽음이 두렵지 않다.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의 이성과 심장은 너희들에 의해 병들었다. 죽으면서 나는 기쁘다. 나는 조국 해방의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일본에 체포돼 첫 심문에서 한 진술을 러시아의 한 일간신문이 그해 11월 2일과 4일자로 보도한 내용이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28일 설립 50주년 및 공공기록물법 제정 20주년을 맞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하바로프스키 등의 지역신문이 보도한 안중근 의사 관련 기사 24건을 수집, 공개했다.

특히 이들 신문기사 내용 중에는 안 의사가 처형 후 묻힌 장소에 대한 내용도 짧게 언급돼 있어 주목받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기록물은 국가기록원이 지난 2015년 독립운동과 우리 동포 관련 기록물이 다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극동지역을 대상으로 기획·수집하던 중 발굴된 것으로 안 의사 의거일 다음 날인 1909년 10월 27일부터 1910년 4월 21일까지 안의사 관련 보도이다. 안 의사의 서거일은 3월 26일이다. 

그동안 안 의사와 관련 러시아 신문기사가 단편적으로 소개된 적은 있으나, 러시아 극동지역 여러 신문의 관련 기사를 망라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우수리스까야 아끄라이나지(紙)<신문기사 6 참고>’ 1910년 4월 21일자는 아사히신문 특파원의 말을 인용해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직후 교도소의 예배당으로 옮겨졌다가, 지역의 기독교 묘지에 매장된 것으로 보도했다.

국가기록원은 당시 보도는 중국 뤼순감옥 인근 예배당 묘지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안 의사가 묻힌 장소에 대해서는 다른 기록도 이미 나와있어 비교분석 등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부는 2008년 중국정부의 협조를 얻어 당시 뤼순감옥소 소장 딸의 증언과 사진을 토대로 감옥 뒤쪽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발굴작업을 했지만 실패했다. 일본의 문서에 기록된 감옥내 묘터에 대해서는 발굴작업이 아직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이들 신문에는 의연했던 안중근 의사의 모습과 의거 준비, 체포과정, 하얼빈 의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인식 등이 구체적으로 담겨있어 사료적 가치도 높다는게 국가기록원의 설명이다. 이소연 국가기록원장은 “안중근 의사 의거 110주년을 맞아 독립정신을 실천했던 안 의사의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국민과 함께 하고자 공개하게 됐다”고 밝혔다.


◇신문기사1: 달리니 보스톡, 1909년 10월 15일(10월 28일) 


안 의사, 러 언론 “당당하고 의연했다”…묻힌 장소도 언급


이토 공작 암살 

하얼빈, 10월 13일(10월 26일) 아침 9시에 최전선 열병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브체브이와 러시아 지도자들이 이토 공작과 함께 기차 칸에서 내리는 순간, 내국인들과 외국 영사들이 있는 쪽 마지막 등쪽, 브라우닝 권총으로부터 몇 발의 총알이 발사되었고, 이토 공작은 치명적 총상을 입었고, 남만주철도개발대표 다나카는 발에 작은 상처를, 하얼빈 일본총영사 카와카미는 중상이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며, 황궁 개인비서대신 모리는 경상을 입었다. 조선인으로 밝혀진 체포되었고, 심문에 응했으며, 자신의 조국을 위하여 공작을 살해하기 위하여 특별히 도착하였으며 공작이 조선에 있는 동안 자신의 친지들을 몇명 사형에 처했다고 하였다. 이번 사건을 분명히 사전에 계획한 것이었다.

어제 차이쟈고우 역에서 러시아경찰은 브라우닝 권총을 소지한 3명의 조선인을 체포하였으나 위험을 사전에 경고하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날, 총영사 카와카미가 철도청에 요청하기를 모든 일본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외모상으로 범인을 일본인과 구분하기는 절대 불가능하였다. 공작을 수행한 모든 러시아 시민들도 똑같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공작과 중상을 입은 일본인들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던 재무장관은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오늘 공작의 시신은 재무장관과 철도청 대표의 조의 화환을 관 위에 얹고 남쪽으로 향했다. 모든 거리에는 애도가 이어졌다. 북경주재 러시아 대사 코로스토베츠는 직접 공작의 시신을 관첸츠이까지 운구하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묵젠과 달리니에서는 모든 러시아 외교관들이 시신을 맞이하였다. 재무장관은 동경주재 러시아 대사를 통하여 일본 정부에 비통한 심정을 전하였다. 

하얼빈. 3발의 총알을 맞고 약 20분 후 공작은 사망하였다. 시신은 11시 40분에 남쪽을 향하였다. 관첸츠이까지 국경수비대 장교들의 애도와 경호를 받으며 옮겨졌으며 러시아 대사 코로스토베츠, 철도청 대표와 대표자들에 의해서 보내졌다. 시신이 열차를 통해 보내진 직후 재무장관 코코브체브이는 러시아 철도병원을 방문하여 부상당한 카와카미를 위로하였고, 이후 일본영사관을 방문하여 동시에 방문한 하얼빈 수뇌부와 함께 애도의 뜻을 전하였다. 어제 러시아 차이쟈고우 철도역에서 체포된 3명의 조선인들은 이 역에 암살을 목적으로 체류하였다고 밝혀졌다. 

차이쟈고우 역에서 체포된 조선인들은 어제가 오늘 동일 역에서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공작의 시신이 실린 특급열차가 되돌아 가는 것을 보는 과정이었다. 작은 역에 용의자가 세 명이나 나타난 것을 수상히 여긴 지역 헌병대가 체포하게 되었다고 한다.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그들 중 2명은 억류중이라고 한다. 세 번째 용의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한다. 억류되고 체포된 자들은 자신들이 이토의 암살을 모의한 무리에 속해있다고 인정하였다. 하얼빈에 파견된 헌병대는 살인-세번째 용의자도 차이쟈고우 역에 있었다고 한다. 하얼빈에서의 심문 중에 억류자들은 자신들의 암살 가담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권총에 장전된 총알이 이토의 암살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인정하였다.

◇신문기사2: 쁘리 아무리예, 1909년 10월 20일(11월 2일) 


안 의사, 러 언론 “당당하고 의연했다”…묻힌 장소도 언급


안 의사, 러 언론 “당당하고 의연했다”…묻힌 장소도 언급


사회단신 

차이자고우 역 조선 빨치산 연행 정황 

10월 11일(10월 24일) 정오, 하얼빈에서 남쪽으로 가는 우편열차 정거장에서, 2등칸으로부터 3명의 외국인이 내렸는데, 이들은 처음부터 일본인 <X, Z>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후작을 암살한 조선의 국민들로서 인친안과 그의 동료 치도-오센과 첸-주기였다. 젊은이들 중 한명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산-차헤 역까지 거리가 먼지를 헌병대 하사 세미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대답을 듣고는 조선은은 자신의 동료에게 정보를 전달하였고, 관첸츠즈이-하얼빈 간 기차 시간과 노선에 대하여 아주 자세하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들은 식당에 들렀다. 조용한 역에 외국인들이 특별한 여행장비들 없이 도착한 것은 이상하게 간주되었으며, 도착 목적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추측을 가능케 했다. 의혹은 이들 여행객들이 역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매우 주의깊게 관찰하는 모습에서 증폭되었다: 헌병대가 그들에게 누구를 기다리냐고 물었을 때 그들 중 한명이 대답하였다: <나는 형과 어머니, 누나 등 친척을 만날 것이다>. 이런 설명은 의심의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만으로 체포할 명분이 없기 때문에 헌병대 하사관은 그들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두명의 신분증에는 에니세이 시장이 발급한 비자증이 있었으며, 세 번째 사람의 신분증에는 쁘리모리예 지역 비자증명서가 있었다.

다음날인 10월 12일(10월 25일) 아침부터, 조선인들은 매우 근심스러워보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무언가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대화를 나누었고, 불안함에 대해 토로했다. 분명히, 그들을 흥분시킨 것은 하얼빈에 있는 그들에게 조선인 김박사 이름으로 보내진 전보때문이었다: - <도착했는지 여부를 전보로 알려주시오; 차이쟈고우 역에서 기다리고 있소>; 여기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내일 아침에 하얼빈에 도착합니다>. 

몇마디 나누고, 동료들은 안과 작별하였다. 그들의 작별은 매우 감명을 주었으며,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안은 동료들에게 큰절을 하였으며, 동료들도 그에게 큰절을 하였다. 그들의 얼굴은 슬픔에 가득하였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안은 4호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갔다.

조선인들의 수수께끼 같은 행동은 역 지도부의 의심을 사게 되었고, 그들의 차이차고우 역 체류가 이토 후작의 여정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남아있는 조선인들에 대한 무언의 감시를 해야만 했다. 여기에 볼코다보프 대위의 명령에 따라 야간 순찰도 강화하였다. 다음날 아침, 즉, 10월 13일(10월 26일)에 이토 후작이 타고가는 기차는 6시 10분에 출발하여야만 했다. 역 식당 조그만 방에 머무르는 조선인들을 기차가 통과하는 시간에 밖에 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조선인들은 일찍 일어나서 나가려고 서둘렀으나 방문이 잠겨있었다. 이토 후작의 기차가 지나쳤음을 알고, 조선인들은 실의에 빠졌다. 곧 역으로 이토 후작이 암살되었으며 그의 시신이 되돌아오는 기차 편으로 올거라는 급신이 전해졌다. 

이 소식을 접수하고 하사관 세민은 4명의 군인을 데리고 조선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외국인들의 방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소리가 들렸다: - <움직이지 마라. 당신들을 체포한다>. 여기서 젊은이들은 체포되었다. 조선인들에 대한 수색에서 한명에게서는 여분의 탄창과 장전된 브라우닝 권총이; 다른 조선인에게서는 23발의 예비 총알과 <스미스 베손> 사의 장전된 리볼버가 발견되었다. 체포된 조선인들의 짐에서 나온 소지품 중에는 국제적 파괴 세력이 갖고 있는 <엑스프레스> 폭탄도 발견되었다. 잠시 후 체포된 조선인들은 당직실로 옮겨졌다. 방문 목적을 묻는 질문에 조선인 중 한명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는 후작을 암살하러 왔다>. 억류자들에게 이토가 조선인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치도-오센은 분명히 이토를 암살한 사람은 우리 동료일거라고 하였다.

이토의 죽음을 조선인들은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몇 번이나 진짜로 이토가 암살되었는지를 물었고, 연속적으로 그 사실이 확인되자 참을 수 없는 흥분상태에 빠졌다. <일본인들에게는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한다. 그들은 우리 조국을 빼앗고 국유재산을 강탈했으며 우리 황제에게 금전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알리기를, 자신들은 자신의 장군의 명령을 받고 따르며 26명의 대원이 있고, 그 본거지는 만주라고 하였다. 잠시 후 조선인들에 대한 체포와 하얼빈으로의 이송에 대한 공식적인 명령이 떨어졌다. 

일본 총영사관 심문관 앞에서의 첫 번째 진술. 일본 총영사관에서 안은 주장하기를 자신은 조선에서 징벌적 행위를 한 이토를 복수하기 위해 선발된 29명 중 한명이라고 하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은 진술하였다- 당신들의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의 이성과 심장은 조국에서 그들에 의해 병을 얻었다...죽으면서, 나는 기쁘다...나는 조국 해방을 위해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 일본 정부측은 5명으로 구성된 이토 암살을 위한 또다른 조직원들이 명령에 따라 증기선을 타고 조선으로 귀국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극동의 많은 지지자들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하였다. 안에게서 발견된 자료들에 따르면 이번 암살의 주모자는 조선에 있으며, 이토의 암살은 봉기를 위한 시그널 역할을 해야만 한 것이었다. 

하얼빈의 외교가에서는 이토의 임무가 오쿠마 백작에게 이양되었고, 수일 내에 페테르부르크로 떠날 것이라고 알려졌다. 

하얼빈에 있는 일본인 거주지에서는 이토 후작의 암살과 관련하여 <X. Z>라는 단어를 인용하여 자신의 총영사 카와카미를 비난하고 있다. 그의 안이함과 업무에서의 방종함을 지탄하고 있는 데, 그것은 당일 기차역 플랫홈에 일본 경찰력을 이용하여 삼엄한 경비를 펼치지 않은 것에 대한 것이다. 더구나 의심스러운 조선인에 대한 보고를 이미 받은 상태라는 것이다.

10월 16일(10월 29일) 쿠안첸츠이에서 하얼빈으로 이토 암살과 관련된 모든 범인들을 일본으로 압송할 특수부대가 도착하였다. 이토 후작 암살과 관련하여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첫 번째 고위공직자인 재무장관은 암살자가 목표를 정하고 총알을 발사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신문기사3: 보스토치나야 자랴, 1909년 10월 22일(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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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뉴스 

이토 공작의 암살에 관하여 

일본 영사관에서 진행된 체포된 조선인들에 대한 심문에서 10명의 조선인이 자신들은 이토 후작의 암살에 가담했다고 진술하였다. 암살자 안은 심문에서 “이것은 우리 조국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며 아직 살아있는 것이 기쁘며, 자신의 유골에 자유가 비출 것이다”라고 하였다. 안은 파리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 고위공직자에게 총알을 발사하고 이토를 암살한 조선인은 일본 영사관에서 행해진 심문에서 카와카미와 후작에 대한 발사는 흥분상태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 하얼빈에서 조선인들에게 지정된 장소까지의 이동은 이미 하얼빈에 와 있는 10여명의 일본 헌병대와 장교의 지휘 아래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체포된 자들은 손과 발에 족쇄를 채운 채 이동할 것이다. 체포된 조선인들은 하얼빈에서 다이렌으로 이송될 것이다. 범죄자들은 고등 재판부에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일본 외무성은 하얼빈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을 통해 러시아 재무장관에게 후작 암살 조사와 범죄자 체포를 위해 도와준 것을 감사하는 영어로 된 전보를 보냈다. 영사관에 도착하여 이토 후작의 암살자는 자신의 정치적 행위 목적에 대하여 기술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암살자는 책상에 앉아서 중국 문자로 장황한 서술을 하였는데 이것은 본 사건과 관련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판단컨대 암살자는 지식인이고 교육을 잘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신문기사4: 쁘리 아무리예, 1909년 10월 24일(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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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후작의 암살과 관련하여 

10월 18일(10월 31일) 하얼빈 튜렘 감옥에서 일본 총영사관으로 조선인들을 이송되었고, 이들에 대한 심문이 하루 종일 마자쿠치 시 포르트-아르투르스키 법원의 검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10월 19일(11월 1일) 10시에 러시아 장교의 지휘 아래, 특수 이송 부대원들에 의해 감옥용 사륜차에 태워서 조선인들은 기차역에 이송되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죄수용 열차칸에 태우는 것은 이미 지명된 일본인들에 의해 이행되었으며; 주변에 구경꾼들은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9명의 조선인이 이송되었다.기차역의 모든 체포자들은 발에 족쇄를 차고 있었고(감옥에서 사용된 족쇄들), 안은 예외적으로 손과 발에 모두 족쇄를 차고 있었다. 열차칸에는 마지막으로 안이 올라탔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였으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히 무관심을 보였다. 족쇄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채워졌다. 

열차에 태운 다음, 조선인들에 족쇄는 모두 풀어졌다. 모든 조선인들 주변에 한명씩의 일본 헌병이 서 있었다. 호송되는 조선인들은 십자로 손을 묶었고, 밧줄의 끝은 헌병들에게 넘겨졌다. 열차에는 13명의 러시아 국경수비대 군인으로 구성된 경호대들이 배치되었는데, 콴첸츠이까지 이송을 돕게 된다. 일본 경호대는 11명의 병사와 1명의 장교로 구성되었다. 

11시 25분에 열차는 플랫홈을 떠났다. <무사히> 체포자들을 호송하라는 전보 명령이 떨어졌다. 의심이 가는 모든 조선인들은 기차역의 정거장마다 억류하라는 명령도 떨어졌다. 10월 14일(10월 27일)부터 타이렌, 무크데나, 니코우 등에서 발행되는 일본 신문들은 이토가 암살되었다는 사실을 보도하였다. 

◇신문기사5: 쁘리아무리예, 1910년 2월 14일(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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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지역 사회단신 

(“쁘리아무리예”를 위한 특별 번역) 

2월 14일(2월 27일) 이토 공의 암살자, 안에 대한 사형이 선고되었다. 선고에 앞서 그에게 할 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안은 약 1시간에 걸쳐 흥분하여 말하기를 모든 조선사람들이 이토를 혐오하고 조선 민족의 원수인 그를 나쁜 짓을 하는 무대에서 하루빨리 몰아내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안과 3명의 동조자들에 대한 선고가 이루어진 이후에 금고에 처해졌고, 선고에 대하여 5일간의 공소기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모두가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았다. 암살자는 극도로 안정되어 보였다. 그는 평상시처럼 먹고 잠을 잤으며, 자신의 참여에 대하여 처음부터 마음을 굳게 먹고 참여한 것으로 보여졌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가족에 누를 끼치지 말고, 가치있게 죽음을 맞으라는 부탁과 함께 마지막 헤어짐의 인사말을 그에게 보냈다. 소문에 의하면, 안은 자신에게 세례를 준 프랑스 신부에게 자신을 방문에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The Japan Weekly Mail> 

◇신문기사6: 우수리스까야 아끄라이나, 1910년 4월 8일(4월 21일)


안 의사, 러 언론 “당당하고 의연했다”…묻힌 장소도 언급


안 의사, 러 언론 “당당하고 의연했다”…묻힌 장소도 언급


안 의사, 러 언론 “당당하고 의연했다”…묻힌 장소도 언급


해외 소식 : 일본 

아사히 신문의 특파원에 따르면 예정된 시간에 안은 사형장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는 하얀색의 명주로 된 조선 전통 한복을 입고 있었으며, 이것은 일부러 그의 사촌 형에 의하여 보내진 것이다.

안은 약간 창백하였으나 자신의 운명에 완전히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사형장에는 검사, 교도소장, 통역 그리고 정부 관계자가 있었다. 

교도소장은 사형에 관한 명령서를 읽고 안에게 자신의 친지나 친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안은 특별히 할 말은 없고,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들은 극동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해 왔다고 말하였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기도를 하도록 허락받고, 안은 조용히 기도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의 목에 매듭이 묶여졌고, 사형이 집행되었다. 15분 후 그의 몸은 의사에 의해 검시되었고, 관에 넣어져 튜렘의 작은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암살에 가담한 3명의 동료들에게는 안과 이별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들 중 한명은 이 의식 중에 미친듯이 행동하였다. 그 후 관은 지역 기독교 묘지로 옮겨졌다. 안 자신은 하얼빈에 안장되길 원하였고, 친척들은 그의 시신을 조선으로 가져가기를 원하였으나 허가를 받지는 못하였다. 



중국신문(The China Gazette) 

               

일본 신문들은 포르트-아르투르 법원을 비난하였는데, 왜 안을 무기징역 시키지 않고 사형을 시켰는가의 문제였다. 이들 신문에 따르면 조선에서 반 일본 혁명가들은 안을 영웅시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수천 장의 안을 닮은 초상화를 담은 서간문들을 인쇄하였으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조선의 충실한 국민>. 일본 경찰들은 매우 열성적으로 이 서간문의 배포를 막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신문들은 안을 사형시키지 않고 징역에 처했다면 이러한 서간문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번역: 국가기록원제공]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281506001&code=940100#csidx32218e7c26ee8f89bf37813ff40b8b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