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1920년 12월, 상하이로 건너간 이승만… 김구를 처음 만나다

Shawn Chase 2019. 4. 3. 20:10

조선일보

  • 상하이=이한수 기자

  • 입력 2019.04.03 03:01

    [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3]
    임시정부 재정 어려워 분열하던 상황… 이동휘 떠나고 김규식도 사퇴
    김구, 이승만이 상하이 머문 6개월 내내 지지 밝히며 임시정부 수호 강조


    상하이 남경서로(南京西路)는 지하철 3개 노선이 모이는 교통 중심이다. 도심 인민광장에서 2호선을 타고 서쪽으로 한 정거장, 초창기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회해중로(옛 하비로)에서 13호선으로 북쪽 한 정거장이다. 100년 전 임시정부는 이곳에 있던 올림픽대극장에서 매년 3·1절 기념식을 열었다. 그 자리인 남경서로 762호엔 지금 6층짜리 건물이 들어섰다. 1층에 커피숍 스타벅스가 있었다.

    이승만은 1921년 3월 1일 이 자리에서 열린 '독립선언 2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상하이에 부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석한 3·1절 행사였다. 이승만은 1920년 6월 12일 워싱턴을 떠났다. 임시정부 인사들이 대통령의 현지 부임을 요청하고 있었다. 중간 기착지 하와이에서 기회를 엿보다 11월 16일 상하이 직행 화물선에 몰래 탔다. 일제가 30만달러 현상금을 걸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12월 5일 푸둥에 도착해 1921년 5월 29일까지 상하이에 머물렀다.

    이미지 크게보기
    ①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 신년 축하식을 마치고 기념 촬영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자리를 함께했다. 가운데 점선이 이승만, 왼쪽 아래 점선이 김구. ②1920년 12월 28일 열린 이승만 대통령 환영회. 단상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장붕. ③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1921년 1월 1일 자. 이승만 대통령 환영 특집으로 꾸몄다. ④3·1절 기념식이 열렸던 상하이 올림픽대극장(현 남경서로 762호)은 1층에 스타벅스가 입점한 6층 건물로 바뀌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이한수 기자


    이승만은 상하이 도착 후 일주일 지난 12월 13일 임시정부 인사들을 처음 접견했다. 경무국장이던 김구도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만은 "당파 간 알력을 그치고 단결할 것"을 강조했다. 첫 공식 행사는 24일 열린 임시육군무관학교 졸업식. 생도 24명이 임관했다. 이승만은 "철혈주의(鐵血主義)를 품고 기회를 기대하기 바란다"고 훈시했다. 나흘 후인 28일 오후 7시 대통령 환영회가 교민단 사무소에서 열렸다. 대형 태극기와 만국기로 장식한 장내에는 금색 글씨로 '환영 대통령 리승만 박사'라고 쓴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이승만은 "머지않아 기회가 옵니다. 한 사람이라도 불합(不合)하면 우리 사업에 해가 있는 것입니다. 작정하고 동원령을 내릴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연설했다.

    김구는 대통령 이승만이 참석한 행사의 경호를 담당했다. 현재 전하는 환영회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사진에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손정도·이동녕·이시영·이동휘·안창호·박은식·신규식 등 임정 요인들이 함께했다. 두 사람이 독립운동 기간 한자리에 있는 사진은 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 신년 기념사진이 유일하다. 이승만은 이동휘·안창호 등과 함께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고, 김구는 왼쪽 아래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사진을 찍은 전체 인원은 59명이다. 당시 임시정부의 규모를 보여준다.

    이승만은 단합을 강조했지만 임시정부는 분열을 거듭했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어려운 재정 문제를 이승만이 해결할 것으로 기대했다가 그렇지 못하자 크게 실망했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러시아 레닌 정부에서 자금을 확보하고 소비에트식 위원회를 주장하면서 임시정부를 떠났다. 박은식·김창숙·원세훈 등은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해 통일적 정부를 다시 조직하자고 주장했다. 신채호·박용만 등은 4월 17일 베이징에서 군사통일주비위를 결성하고 임시정부 타도를 당면 목표로 내세웠다.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상하이에 건너온 김규식도 4월 18일 사퇴했다. 5월에는 통합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했던 안창호마저 떠났다.

    김구는 이 기간 내내 이승만을 지지하고 임시정부를 지킬 것을 강조했다. 정부 재조직을 주장하는 박은식을 불러 "분별없는 짓"이라고 힐난했다. 항의하러 온 박은식의 아들을 구타하기도 했다. 김구는 윤기섭·조완구·황중현 등과 함께 이승만 중심의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후원 모임 20명 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협성회로 이름한 이 단체는 3월 23일 '임시정부 절대 옹호'를 기치로 발족했다.

    김구와 이승만의 만남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김구는 서른여섯 살 때인 1912년 투옥 시절 '감옥 선배' 이승만을 흠모했다고 고백한다. '서대문 감옥에는 역대의 진귀한 보물이 있다. 지난날 이승만 박사가 자기 동지들과 투옥되었을 때에 서양인 친구들과 연락하여 옥중에 도서실을 설치하고 우리나라와 외국의 진귀한 서적을 구입하여 5~6년 동안 (중략) 강연했다. 그 가운데 이 박사의 수택(手澤·손때)과 누흔(淚痕·눈물 자국)이 얼룩진 책자를 볼 때 배알치 못한 이 박사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無限)의 느낌이 있었다.'('백범일지')

    이승만은 김구를 처음 본 이후부터 신뢰했다. 4월 29일 새 내각 인선에서 이승만은 김구를 교통차장으로 승진·임명하는 구상을 밝혔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 한 연설에서는 "경무국장 김구씨는 조용히 앉아 경찰 사무를 잘 보는 동시에 선전까지 잘한다"고 평가했다. 7권짜리 대작 '이승만과 김구'를 쓴 손세일씨는 "이승만은 경무국장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김구에 대해 신뢰감을 느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독립운동 기간 내내 지속됐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03/201904030002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