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학

[재미있는 과학] 산소 없어도, 영하 272도에도 생존하는 1㎜ 생명체

Shawn Chase 2019. 3. 27. 17:05


입력 : 2019.02.14 03:00

[남극 호수 아래서 발견된 초소형 동물 '물곰']
플랑크톤 잡아먹고 사는 '완보동물'… 강한 방사선과 150도 고열에도 견뎌
우주의 환경도 얼음 호수처럼 척박… 물곰같은 생명체 있을 수 있어요

지난달 18일 남극 대륙의 얼음 아래 있는 호수에서 처음으로 생명체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내용이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렸습니다. 미국 네브래스카대학 연구팀이 남극점에서 900㎞ 떨어진 메르세르(Mercer) 호수에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벌레인 '물곰'(water bear·Hypsibius dujardini)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1㎞ 두께 얼음이 위로 얼어 있어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던 곳인데, 이곳에서 생명체가 살았던 흔적을 발견한 거죠.

지구 최강의 생물은 뭘까요? 지구의 지배자 인류, 백악기부터 2억년 넘게 살아온 바퀴벌레 등이 떠오르나요? 그런데 극한 상황을 얼마나 잘 견디는지만 따진다면 남극에서 발견된 이 물곰이 '지구 최강' 칭호를 가져갈 거랍니다.

물곰은 완보동물의 일종입니다. 완보동물은 곤충, 거미, 갑각류가 포함된 절지동물과 가깝습니다. 물곰은 다리가 8개이고 플랑크톤을 잡아먹는데 생김새가 곰과 닮았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곰벌레라고도 합니다.

[재미있는 과학] 산소 없어도, 영하 272도에도 생존하는 1㎜ 생명체
▲ /그래픽=안병현
수퍼히어로 영화 '앤트맨' 시리즈를 봤다면 작아진 주인공을 잡아먹으려고 덤비는 물곰이 기억날 겁니다. 이 녀석은 극한 환경에서 잘 견디기로 유명합니다. 몸길이가 고작 1㎜ 정도인데 산소가 전혀 없는 진공 상태에서도, 영하 272도의 낮은 기온도, 150도의 고열에도 버팁니다. 수십 년 동안 음식과 물이 없어도 살 수 있고, 30년 동안 냉동됐다가도 따뜻해지면 깨어나 번식하는 재주도 있습니다. 동물 대부분이 10~20그레이(Gy) 정도의 방사선을 흡수하면 목숨을 잃는데 물곰은 5700그레이의 방사선도 견딥니다. 흉부 CT를 찍을 때 흡수하는 방사선량이 약 0.01그레이입니다. 인간은 7그레이 방사선에 노출되면 단번에 목숨을 잃습니다. '앤트맨'은 가상의 수퍼히어로지만 영화에 잠시 나오는 물곰은 생명력만 따지면 현실에 존재하는 수퍼히어로인 거죠. 높은 산봉우리, 심해는 물론 활화산 근처에서도 발견된다고 합니다.

인간이 살 수 있는 온도나 기압의 범위를 생각해보면 얼마나 극한 환경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막에 살든, 극지에 살든, 대체로 10~30도 정도의 온도 범위 안에서 살아갑니다. 0.7기압 정도로 공기가 옅어지는 해발 3000m만 되어도 호흡에 곤란을 겪으며 고산병 증세를 호소하죠.

생명체 물곰을 남극 호수에서 확인했다는 것은 우주의 극한 환경에서도 어떤 조건이 맞으면 생명체가 발견될 수 있다는 기대를 하게 만듭니다.

물곰 자체는 1만년 전, 혹은 10만년 전에 호수로 흘러들어 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광합성이 불가능해 플랑크톤이나 박테리아가 번식할 수 없는 호수에서 물곰이 무엇을 먹고 살았을지가 학자들의 관심사입니다. 또 이 호수 물에는 질소와 산소가 보통 바닷물보다 50배 더 녹아 있습니다. 이 춥고 어둡고 압력이 높고 끈적끈적한 남극의 호수에 살 수 있는 생명체의 존재와 생존의 비밀은 큰 관심거리인 거죠.

남극 얼음 밑 호수는 지구 밖 생명체를 탐색하려는 시도들이 목표로 삼는 곳과 조건이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는 얼음이 두껍게 덮여 있습니다. 남극처럼 그 아래에 액체 호수나 바다가 있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지요. 물이 있고, 운석이나 혜성이 날라 오는 유기물질이 있다면 이곳에서도 생명체가 탄생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인류는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에게는 극한 조건이지만,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곳을 찾고 있습니다. 남극의 호수들은 그 예행연습을 위한 최적의 장소가 되는 것이죠.

남극 얼음 밑 호수에서 1㎜도 안 되는 벌레 시체를 발견한 것이 뉴스가 되는 이유입니다. 미지의 외계 생명체를 찾아나서는 작업은 남극 호수 탐사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얻은 지식을 응용해 우주에서 생명을 찾고, 또 인간이 우주를 탐험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쌓을 수 있다고 과학계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남극대륙에는 40개국에서 세운 40개의 연구 기지와 150개의 연구 보조 기지가 세워져 있습니다. 40개국 약 4000명의 연구진이 오늘도 그 비밀을 탐구하고 있어요.


[얼음 아래 숨어있는 남극 호수]

남극 대륙이 눈과 얼음으로 가득하다는 건 상식입니다. 남극 대륙을 덮은 얼음층의 두께는 평균 2000m나 됩니다. 어떻게 그 얼음층 아래에 호수가 있을까요?

러시아 지리학자 표트르 크로폿킨(1842~1921)이 두꺼운 얼음층 아래에 호수가 있다는 주장을 처음 했습니다. 그는 엄청난 두께의 얼음이 누르는 압력 때문에 호수가 있을 거라고 예측했어요. 물은 1기압일 때 0도에서 얼지만, 압력이 높아지면 이보다 낮은 온도에서도 액체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물이 액체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온도는 영하 21.9도입니다. 2100기압의 압력이 작용할 때죠. 이런 압력과 지구 내부에서 올라오는 열을 감안하면 얼음층 아래에 물이 녹아 있을 수 있다고 본 겁니다.

1996년 러시아 보스토크 기지 지표면으로부터 3.7㎞ 아래에 있는 '보스토크 호수'가 처음으로 발견됩니다. 이 호수 면적(약 1만6000㎢)은 강원도 정도입니다. 이후 지금까지 호수 400여 곳이 확인됐습니다. 물곰이 발견된 메르세르 호수도 그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