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거리며 달리는 기차 안.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게 지루해질 때쯤 도쿄대 의대부속병원 의사 우지 다쓰오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상대방은 올림푸스 카메라 기술자 스기우라 무쓰오(杉浦睦夫). 한 살 차이였던 둘은 말이 금세 통했다. 30세의 혈기 넘치던 청년 의사 우지는 “카메라로 사람의 배 속을 볼 순 없느냐”고 물었다. 너무 늦게 위암을 발견해 제대로 된 치료 한번 해보지 못하는 환자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31세의 스기우라는 무릎을 쳤다. 두 사람은 그 길로 사람 몸속을 촬영할 수 있는 위 카메라 개발에 뛰어들었다. 1949년의 우연한 이 만남은 50년 세계 최초 위 카메라 개발로 이어졌다. 세계 위 내시경 점유율 70% 신화를 일군 일본 광학기업 올림푸스 의료기기 사업의 시작이었다.
사사 히로유키 사장이 직접 써서 건넨 좌우명. 에도시대 유학자의 글귀로 한 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워도 자신의 신념을 믿으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취업난 겪는 한국 젊은이에게
월급·직위로 가치 정해지지 않아
그것에 집착하면 재미없는 인생
1989년 미국 뉴욕의 한 병원.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온 젊은 부부가 연신 의사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복도를 서성이던 사사 히로유키는 눈물을 훔쳤다. “이 일을 하게 돼 정말 다행이다.”
서른네 살 사사의 눈시울이 붉어진 사연은 이랬다. 올림푸스에 입사한 지 7년 되던 해 뉴욕으로 파견을 갔다. 새 내시경을 만드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한 의사가 그에게 소아용 내시경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당시만 해도 어른용 내시경밖에 없던 터라 신생아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개복 수술을 해야 했다. 신생아에게도 맞는 소아용 시제품을 들고 병원을 찾은 그는 환자들의 반응이 궁금해 병원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마침 수술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 진단을 받은 젊은 부부가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사사 사장은 이날의 경험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는다.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올림푸스에서 직장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에게 이 경험은 ‘왜 일하는가’에 대한 답이자, 인생의 신념이 됐다.
“100명의 신입사원이 들어온다고 치자. 이 중 부장이 되는 건 10명이다. 그런다고 그 10명이 모두 만족하는 삶을 사나. 월급이나 직위로 나의 가치가 정해지나. 그렇지 않다. 이런 것에 너무 집착하면 인생의 즐거움, 무엇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결과적으로 재미없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사사 사장은 취업난에 허덕이는 한국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며 이야기를 더해갔다.
“생각을 자립시켜라. 가치관이 올바로 서야 행복할 수 있다. 회사는 나의 가치관을 달성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월급쟁이 직장인으로 시작해 사장 자리까지 올라간 ‘성공신화’를 만든 그였지만 화두는 인간으로서의 완결성이었다.
사사 사장은 자신의 좌우명을 친필로 적어 건넸다. 에도시대 유학자 사토 잇사이(佐藤一?)의 글귀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등불 하나 들고 걸어가자. 주어진 환경을 원망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딱 하나의 등불을 믿고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은 글이었다.
이 길이 과연 옳은 길일까 흔들릴 때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설 때마다 그는 자신의 좌우명을 들여다봤다. 나락 직전의 올림푸스를 맡게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CEO 부임 1년 뒤 신년 인사를 겸해 그는 이 글과 함께 담아뒀던 자신의 생각을 직원들에게 전했다.
“‘우리는 반드시 부활에 성공한다. 지금보다 더 사회에 필요한 회사가 될 것이다’라는 강한 신념으로 함께 걸어가보자. 이 신념이 올림푸스의 ‘등불’이다.”
4년이 흐른 지금 올림푸스는 완벽하게 부활했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김현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