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Why] 트럼프 멘토의 한 手

Shawn Chase 2018. 9. 8. 18:44
    조선일보                         


입력 2018.05.12 03:01

[김은중 기자의 쇼타임]
1970년~80년대 미국 보수 부활에 지적 토대를 제공한, 에드윈 퓰너 헤리티지재단 설립자

한국 보수 재건하고 싶나? 젊은 유권자에 '사다리'를 줘라
헤리티지재단 5층엔 정주영룸, 꼭대기층엔 이병철룸

지난달 24일 서울에서 만난 에드윈 퓰너 헤리티지재단 설립자는 “보수 가치를 만방에 전파하는 내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라며 크게 웃었다. 미국 보수의 살아 있는 전설은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1년에 15만 마일(24만1400㎞)을 비행한다. 한국 보수를 향해 그는 “정치적 부침은 일시적이지만 가치는 영원하다”며 “젊은 세대에게 보수가 추구하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알리라”고 조언했다.
지난달 24일 서울에서 만난 에드윈 퓰너 헤리티지재단 설립자는 “보수 가치를 만방에 전파하는 내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라며 크게 웃었다. 미국 보수의 살아 있는 전설은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1년에 15만 마일(24만1400㎞)을 비행한다. 한국 보수를 향해 그는 “정치적 부침은 일시적이지만 가치는 영원하다”며 “젊은 세대에게 보수가 추구하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알리라”고 조언했다. / 이태경 기자

보수 우파가 '죽었다'. 보수는 '싸가지' 없어도 유능하다는 말도 이젠 옛날얘기가 돼버린 걸까. 보수 정권의 두 전직 대통령은 감옥에 가 있다. 우파 정당이라는 제1야당은 어젠다를 제시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설상가상으로 그 당 원내대표는 괴한의 주먹 테러까지 당했다. 화두를 던지고 이슈를 물고 늘어지는 우파 시민단체도 찾아보기 힘들다. 거리엔 '아스팔트 우파'를 자처하는 이들만 난립한다. 10년, 20년 뒤를 내다보고 인재를 키우는 변변한 공부 모임조차 우파 진영에선 드물다. 바야흐로 우파 지리멸렬의 시대. "보수여도 보수라 말하기 부끄럽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미국 보수도 비슷한 시절이 있었다. 1964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선 배리 골드워터(38.5%)는 민주당 후보 린든 존슨(61.1%)에 참패했다. 당시 보수는 대공황의 주범(主犯)이요 이념 공세만 앞세우는 구악(舊惡)으로 치부됐다. 70년대 들어선 워터게이트가 터져 닉슨이 물러났고, 보수의 도덕성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런 암흑기에도 재기를 위한 보수 시민사회의 지난한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지식인들은 책과 잡지를 만들어 보수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힘썼고, 대학생들은 자발적으로 공부 모임을 조직해 보수의 내일을 토론했다. 이런 흐름을 타고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아메리칸 드림의 복원'을 내건 그는 8년여 임기 동안 보수주의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레이거노믹스로 회자되는 미국 보수의 전성기는 이렇게 열렸다.

에드윈 퓰너(77) 헤리티지재단 설립자는 당시 미국 보수가 부활하는 데 지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다. 그는 감세와 작은 정부 등으로 대변되는 우파 싱크탱크의 선봉장이었다. 의회 보좌관으로 일하다 맥주 재벌 쿠어스의 기부금 25만달러를 종잣돈 삼아 1973년 재단을 세웠다. 1977년부터 2013년까지 36년 동안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보수의 가치를 정책으로 구현하는 데 힘썼고, 보수 집권에도 수차례 일조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 인사'로 선정했고, 뉴욕타임스(NYT)는 그를 '보수주의라는 거대한 도시의 판테온(신전)'이라고 표현했다. 지난달 24일 아산정책연구원이 주최한 아산플래넘 참석차 방한한 그를 만나 한국 보수의 돌파구를 모색했다.

"밀레니얼 세대에 기회와 사다리를 어필하라"

워싱턴에는 정부라는 하나의 산업이 있다. 아이디어라는 원재료를 가지고 법과 규칙을 생산한다. 싱크탱크 숫자만 수천 개에 달하는 워싱턴에서 헤리티지재단은 트럼프 행정부에 원재료를 제공한 유일무이한 곳이다. 퓰너 박사는 인수위원회 고문을 맡아 정지(整地) 작업을 주도했다. 워싱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막역하게 조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트럼프 집권 이후 공화당은 법인세 인하와 불법이민자 규제, 대북 제재를 통한 비핵화 구현 등 주요 정책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가고 있다. 대다수는 헤리티지 소속 연구원들이 오랫동안 주장해오던 것들이다.

―헤리티지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대학과 기업, 연구소에서 정책 입안자를 상대로 하루가 멀다 하고 방대한 양의 보고서를 쏟아낸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두꺼운 보고서를 읽을 시간이 없다. 애써 공들여 작성한 책들이 그냥 버려졌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아이디어가 이론에 그치지 않고 실제 정책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어느 보고서든 간결하고, 10쪽이 넘으면 안 된다는 게 우리가 내린 결론이다. 국회의원들이 이동하면서 차 안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했다. 입법 과정에서 반드시 참고해야 할 사항을 팩트 위주로 간결하게 정리했고, 말미엔 우리의 제언을 한 줄로 요약해 담았다. 이런 10쪽짜리 리포트들이 캐피틀 힐(의회)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헤리티지가 발간하는 보고서는 그 정확성으로 정평이 나 있다. 좌우 진영을 가리지 않는다. 워싱턴포스트(WP)의 진보 성향 칼럼니스트 빌 라스베리는 "(요구 사항이 담겨 있는) 마지막 장은 찢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지만, 보고서가 담고 있는 팩트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다"고 했다.

―어젠다를 제시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앵무새같이 같은 주장을 무작정 반복하는 건 하수(下手)다. 의제마다 적확한 '타깃 오디언스(target audience)'를 설정하는 게 우리의 강점이다.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더 많은 이들에게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는 건 쉬워졌다. 하지만 철학이 없으면 스팸이나 광고 전단과 다를 게 없다. 매일 오전 8시 30분이면 이사장 주재하에 40여 명의 직원이 모여 회의를 한다.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메시지를 전달하느냐'가 제일(第一)의 화두다. 정책 입안자들이 어떤 이슈에 골몰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진정성 있는 인간 관계를 구축하려 한다."

―헤리티지 최고의 자랑을 하나 꼽는다면.

"미국 전역에 있는 퍼져 있는 60만명의 소액 후원자다. 1년에 적게는 10달러에서 많게는 수천, 수만달러를 기부한다. 우리의 8100만달러 예산(2016년 기준) 중 기업 후원금은 4%에 불과했다. 기업 자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보수의 목소리를."

―그 '보수'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재단 1층 로비에 '개인의 자유와 기회, 번영과 시민사회가 있는 미국을 건설한다'고 적혀 있다. 자유는 인간이 태어나 스스로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기회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유동성(mobility)이다. 내가 노력하면 미래에는 더욱 잘살 수 있게 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사다리는 사회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다. 이 둘이 잘 어우러지면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게 번영이다. 이런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싸운다."

―헤리티지가 설립될 당시 미국 보수는 참 어려웠다.

"70년대 워싱턴은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민주당이 백악관,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고 있을 때다. 진보 진영엔 브루킹스 같은 강력한 싱크탱크가 즐비했다. 브루킹스가 주한미군 철수에 관한 보고서를 내면, 며칠 뒤 지미 카터 대통령이 그대로 발표하는 식이었다. 보수 싱크탱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월남전쟁의 후유증과 소련과의 체제 경쟁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보수의 이념으로 미국을 다시 세우고자 했다. 극장을 개조한 허름한 사무실에서 직원 13명으로 시작했다."

헤리티지의 전성기는 레이건 행정부 때부터였다. 연방정부 축소, 반(反)규제와 감세를 골자로 하는 1000쪽짜리 정책 보고서 '리더십 지침(Mandate for Leadership)'은 레이건 정부의 교과서로 통했다. 공화당은 헤리티지와 협업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고 이슈를 선점하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1994년 공화당의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이 작은 정부를 전면에 내세웠던 '미국과의 계약(Contract with America)'도 재단이 틀을 짰다. 공화당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장악했다.

―헤리티지는 레이건 대통령 때 꽃을 피웠다.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 후 첫 내각 회의에서 우리 보고서를 참모들에게 돌렸다. 첫 4년 임기가 끝날 때쯤 헤리티지가 제안한 2000개의 정책 제안 중 무려 60%가 정부 정책으로 채택되어 실행 중이었다."

―지금 한국의 보수는 빈사 상태다.

"정치적 사이클상 부침(浮沈)은 있을 수 있다. 흐름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온다. 중요하고 오래가는 건 이념과 아이디어다. 보수의 요체는 '기회'다. 젊은 유권자들에게 자유시장경제와 기업의 자유를 신봉하는 보수가 청년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들려 한다는 점을 어필하라. 한국의 재벌 시스템을 40년 넘게 보고 공부했다. 경제를 개방하고 더 투명하게 운용해야 한다. 중소·벤처기업에까지 활력이 돌면, 한국 경제에도 새로운 기회들이 올 것이다. 그 가장 큰 수혜자는 젊은 세대가 된다. 여기에 더해 보수 시민사회가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자발적인 조직들이 모여야 한다. 부수적인 사안들 때문에 분열해서는 안 된다."

―전 세계적으로 저성장 추세다. 파이를 키워 사다리를 만든다는 우파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미국을 보라! 법인세를 파격적으로 내린 트럼프의 세제개혁 이후 경제에 활력이 돌고 있다. 기업들이 공장을 세우고 일자리를 만든다. 이건 단순한 낙수효과(trickle down) 수준을 넘는다. 새로운 기회들을 창출하고 있다. 다우지수가 사상 처음 2만5000을 넘었고, 이제 3만을 바라본다. 규제로 점철된 현 정체상태(status quo)에 물음을 던져라. 여전히 방법은 많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린다·에드윈 퓰너(사진 왼쪽부터) 부부의 즐거운 한때. 퓰너 박사는 “항상 ‘사람을 믿으라’던 레이건 덕분에 나는 긍정주의자가 됐다”고 말한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린다·에드윈 퓰너(사진 왼쪽부터) 부부의 즐거운 한때. 퓰너 박사는 “항상 ‘사람을 믿으라’던 레이건 덕분에 나는 긍정주의자가 됐다”고 말한다. / 헤리티지재단

워싱턴 제일의 지한파

퓰너 박사는 워싱턴 정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지한파(知韓派)다. 한국만 130여 차례 방문했다. 2002년엔 한국 정부로부터 수교훈장 광화장도 받았다.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 등 전직 대통령들과 교유했고 이건희, 정몽준, 김승연 등 재계 거물들과도 막역한 사이다. 올해 설립 10년을 맞는 아산정책연구원 등 국내 여러 싱크탱크의 설립 과정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정주영펠로우'란 직함도 가지고 있다. 재단 사무실 5층엔 정주영룸이, 꼭대기 층엔 이병철룸이 있다.

―아시아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70년대 워싱턴 싱크탱크들은 저마다 강점을 보이는 분야가 있었는데 아시아를 연구하는 곳은 없었다. 블루오션이라 생각했다. 무역량의 증가로 아시아가 유럽 못지않은 미국의 중요한 파트너가 될 것이라 예상했으니까. 1982년 아시아연구센터를 만들고 연구를 시작했다."

―첫 한국 방문을 기억하나.

"1971년 처음 왔을 때 서울에 투숙할 만한 곳은 조선호텔이 유일했다. 야간 통행금지는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여기 밖으로 보이는 남산과 한강변 풍경을 보라. 지난 40여 년 동안 정말 많이 변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한국인들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전직 대통령들과 인연이 깊다.

"80년대 초반 DJ가 메릴랜드에 망명해 있을 때 그를 내 사무실로 초대해 토론하는 걸 즐겼다. 그를 붙잡고 자유시장경제와 작은 정부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했다. 내가 DJ를 설득하려고 참 많이 노력했는데, DJ도 이에 뒤질세라 맞받아쳤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DJ는 영어 실력을 키우려 나를 그렇게 많이 찾아온 것 같기도 하다(웃음). 당시 한국 정보 당국에서 DJ를 어떻게 하려는 이런저런 시도가 있던 걸로 안다. 백악관에 내 절친인 리처드 앨런이 안보보좌관으로 있었다. 그가 청와대로 전화해 '김대중을 건들면 재미없을 것'이라고 경고를 날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특히 각별했나 보다.

"1998년 DJ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다. 마이클 잭슨도 서울에 있었는데, DJ가 나에게 부탁을 해왔다. '제발 잭슨이 평양에만 가지 않게 해달라'고. 호텔로 마이클을 불러 메시지를 전달했다. 결국 마이클은 평양에 가지 않았다. DJ가 당선인 시절엔 그와 동교동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우릴 본 기자 한 명이 대통령에게 '왜 저런 보수주의자와 어울리는 거냐'고 소리를 질렀다. DJ는 '워싱턴에서 내 친구는 에드 케네디부터 에드 퓰너까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고 재치 있게 넘겼다(웃음)."

―진보 정부의 대통령들과 궁합이 좋은 편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가 서울에서 주최한 행사에 직접 찾아와 연설을 했다. 그는 '나를 좌파로 모는 건 오해'라고 했다. 그가 에이브러햄 링컨의 추종자라고 들어서 꽤 괜찮은 링컨 그림을 하나 선물했다."

―삼성가(家)와는 3대를 이은 인연이다.

"헤리티지는 1985년부터 고(故) 이병철 창업자를 기리는 '이병철 콘퍼런스'를 매년 진행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언젠가 '아들이 헤리티지에서 일하며 워싱턴을 배울 기회를 달라'고 요청해온 적이 있다. 내가 흔쾌히 받아들이자 이 회장이 두 팔을 벌려 나를 포옹했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그가 눈물을 다 흘리더라."

"트럼프, 美·北 대화 기대 강해"

퓰너 박사는 '아메리카 퍼스트'를 표방하는 트럼프 외교정책의 설계자이자 열렬한 후원자다. 그는 "트럼프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대북 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여러 차례 주변에 말해왔다.

―'판문점 선언' 감상평은.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레이건 대통령은 '믿되 검증하라(trust but verify)'라고 했지만 이젠 '검증, 또 검증'해야 한다. 남북 지도자 모두 비핵화라는 제1의 목표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북측의 성실한 비핵화 조치 이행과 물샐틈없는 한·미·일 삼각공조도 계속 필요하다."

―미·북 정상회담이 임박했다.

"두 지도자의 캐릭터를 생각하면 결코 쉽진 않을 거다. 트럼프는 만족스럽지 않은 협상 결과를 얻자고 회담에 나오는 사람이 아니다. 즉각 실행 가능한 솔루션을 목표로 협상을 할 거다. 구체적인 결과를 도출하겠다는 본인 의지와 기대가 강한 것으로 안다. 그는 최고의 협상가다. 지켜보자."

퓰너 박사는 시카고 근교의 한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금융 엘리트의 산실 와튼스쿨에서 MBA를 받았다. 부동산 회사를 운영하는 부친은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길 원했지만, 아들은 '꽃길'을 뿌리치고 싱크탱크업(業)에 도전했다. 인터뷰 말미에 그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미국 헌법 전문(全文)이 적혀 있는 핸드북을 펼쳐 보였다. 그는 "언론의 자유와 법치 등 보수가 지켜야 할 가치가 이 안에 다 들어 있다"고 했다. 설립자부터 말단 인턴까지 300여 명에 가까운 헤리티지재단 직원들이 모두 이런 신념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퓰너 박사는 "보수주의 가치를 만방에 전파하는 이 일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 같다"고 했다.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1년에 15만 마일을 비행한다. 미국 보수의 저력과 활력이 여기 있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11/20180511017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