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근 지식문화부장
입력 : 2015.10.03 04:00 | 수정 : 2015.10.03 07:40
“어이 오랜만이네, 너희 북클럽은 요즘 뭐 읽고 있어?”
길에서 만난 친구에게 나는 서슴없이 이런 인사말로 안부를 묻는다. 먼저 책읽기 모임 가입한 데가 있는지 여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당연히 어디 한 군데쯤은 속해 있을 테니까.
사실 요즘은 돌아보면 그렇다. 살고 있는 지역의 도서관이나 서점, 카페, 아니면 누구의 집 거실 같은 곳에서도 여럿이 모여 박경리의 ‘토지’ 같은 책을 두고 함께 이야기하는 풍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비단 서울의 '교양층'만 그런 게 아니다. 부산, 광주, 제주는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멀리 백령도에도 자생적인 책읽기 모임이 활발하다...
죄송하다. 이상의 글은 모두 표절이다. 뉴욕타임스 2014년 3월 22일자 기고문의 몇 단락을 따서 한국 상황으로 바꿔봤다. 물론 원문은 미국 작가가 소개한 그 나라의 실제 상황이고, 위의 글은 우리도 이럴 순 없을까 하며 떠올려본 순전한 내 상상이다.
소개한 뉴욕타임스 기고문의 필자는 최근 미국내 북클럽 열기가 대단하다고 썼다. 거기에 기름을 부은 주역으로, 조금은 뜻밖에도 인터넷 혁명을 꼽았다. 사이버공간 소셜네트워크를 발판으로 갖가지 책읽기 모임도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얘기다. book club이라는 검색어로 구글링만 해봐도 실감할 수 있다. 마크 저커버그도 올초 새해 결심으로 페이스북에서 북클럽을 시작하지 않았나.
5년 전만 해도 이럴 줄 몰랐다. 그때는 밀려드는 디지털혁명의 기세가 전통적인 아날로그 책 문화쯤은 종잇장처럼 날려버릴 것 같았다. 물론 지금도 속단은 이르다. 요즘 같은 기술 변화 속도 앞에서 누가 5년 앞을 장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최소한, 2015년이면 전자책이 종이책을 따라잡을 거라던 예상은 분명 빗나갔다. 변화의 전위인 미국에서조차 전자책은 전체 도서판매의 20% 선에서 주춤대고 있다. 적어도 책에 관한 한 음악, 영화와는 달리 디지털 태풍에 대한 내구력이 예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진단이 많다.
추세는 국내도 비슷하다. 올해 한국출판연구소가 낸 ‘2014년 전자책 독서실태 조사’를 보면 그렇다. ‘5년 후 자신의 독서방식’에 대해 “전자책 독서 비중은 늘겠지만 여전히 종이책 위주 독서를 할 것”이라고 답한 사람이 과반(54.7%)에 이른다. 심지어 디지털 세대인 초중고생도 다수가 ‘종이책 위주’(50.2%)로 예상한다.
이런 상황을 두고 여러 진단이 나온다. 전자책 단말기의 미비를 꼽기도 하고, 콘텐츠 부족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책과 독서의 남다른 특성에 주목하는 이들이 많다. 이른바 물성(物性)과 사회성이다. 책은 고도의 정신적 대상이지만 감각적인 물건이기도 하다. 또한 읽고 쓰는 활동은 고독한 일인 동시에 대화와 소통을 전제로 한다. 이런 아날로그성을 충족시키는 것이 종이책이고 서점이고 북클럽 활동이라는 것이다.
e북 진격의 거인 아마존 앞에서 떨었던 출판사나 오프라인 서점들은 이제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미국 대형 출판사들은 종이책의 물류 개선에 재투자하기 시작했고, 독립 서점들은 2007년 저점을 찍은 후 2009년부터 올해까지 매장 수가 35% 늘었다.
국내에도 비슷한 조짐이 보인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은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연말쯤 새 단장을 마치면 1백명 정도가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서 체험의 공간이 생길 거라고 한다.
개성있는 동네 책방들도 속속 움트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서점(서적, 신문 및 잡지류 소매업) 수는 2011년 4987개에서 2014년(잠정집계) 5015개로 늘었다. 아직 수치상으로는 증가세가 미미하다.
반면 같은 기간 커피점(찻집 포함 비알콜음료점)은 3만6249개에서 5만5681개로 늘었다. 무려 54% 증가다. 언제부턴가 치킨집보다 많아진 동네 커피점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어느 한 곳쯤은 서점이거나 북카페였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신선한 원두뿐만 아니라 양질의 도서까지 추천하고 뽑아주는 ‘북바리스타’가 동네에 한 명쯤 있으면 얼마나 멋질까.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동의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격년으로 내는 전국 독서실태 조사를 보면 매번 그렇다. 독서의 주요 변수가 환경이라는 사실도 반복해서 확인된다. 청소년의 경우는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책 읽어주기가, 성인은 독서모임의 유무가 독서량을 결정짓는 주요인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국내 성인들의 독서 모임/프로그램 참여율은 2013년 현재 3.4%다. 2011년(1.3%)에 비하면 그나마 늘고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더 늘어야 한다.
동물원 옆 미술관이라고 했던가. 동네 치킨집 인근에도 서점이나 북카페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그곳에서 함께 책 읽고 얘기하는 북클럽들이 속속 생겨났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오며가며 이웃에게 이런 인사를 건네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선생님, 요즘은 무슨 책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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