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천 조선비즈 논설주간
입력 : 2017.06.17 08:00
[WEEKLY BIZ Lounge] (2) 김일섭 한국FPSB 회장
재무설계사 양성·인증기관인 한국FPSB의 김일섭 회장은 한국 회계산업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한국형 경영'의 전도사다. 삼일회계법인 시절부터 25년 이상 한국형 경영의 정립을 사명으로 삼아왔다. 지난 2012년 말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총장으로 취임한 뒤 곧바로 'K-WAY 한국형경영 3.0 CEO 과정'을 개설하기도 했다. 이 과정의 주요 강연을 묶어 '이제 한국형 경영이다'는 책을 최근 펴냈다. 한국FPSB 회장실에서 김 회장을 만나 한국형 경영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 ▲ 김일섭 회장은 “그동안 한국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서양의 경영 이론과 경영 모델을 바로 수입해 억지로 적용해 왔지만, 한국인 특성에 맞는 새로운 경영 모델을 완성시켜야 우리 강점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이진한 기자
―한국형 경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1991년 삼일회계법인 창립 20주년 기념 사업으로 회계감사·세무 관련 책과 함께 컨설팅 부문에서 '한국 기업의 성공 조건'이란 책을 냈다. 한국의 대표적 제조기업들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살펴보고 계속적인 성공을 위해 할 일은 무엇인가를 분석했다. 당시 이 책 출간을 총괄하고 대표 집필한 데 이어 1995년엔 이원복 교수와 함께 '세계로 가는 우리 경영'이라는 책을 속편으로 내면서 한국형 경영 모델을 계속 살펴보게 됐다."
― 한국형 경영의 요체가 뭔가.
"시대에 따라 다르다. 외환 위기 이전엔 창업자·오너가 전권을 갖고 상명하복식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한국형 경영 1.0'이다. 이 방식이 한계를 드러낸 뒤 선진 기업 지배 구조가 도입되고 오너와 전문 경영인이 조화를 이룬 새로운 모델로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이 글로벌 최고 경쟁력을 확보했다. '한국형 경영 2.0'이다. 이제는 한국 기업들이 '빠른 추종자'에서 '창조적 선도자'로 올라서고,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 새로운 한국형 경영 모델이 나와야 할 시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경영에는 한편에는 이론이나 과학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사람과 관련된 세계가 있다. 이론과 과학은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다 똑같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김용운 교수가 말하는 '민족의 고유한 원형(原型)'이나 칼 융의 '집단 무의식'이 작용하는 부분이 있다. 나라마다 고유한 문화와 전통, 가치관에 따른 차이가 나타난다. 이런 사람의 요소에 맞춰 한국인의 DNA에 가장 적합한 경영 방식이 한국형 경영이다."
"흥과 기를 살려주는 한국식 경영"
―경영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인의 DNA에 어떤 장점이 있나.
"한국 사람은 흥이 있다. 흥이 나면 신바람 나게 일하고 기적을 만들어낸다. 평등주의가 매우 강해 기를 살려주는 게 중요하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소유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억눌린 삶을 살아왔는데 이를 풀어주면 기가 살고 신바람이 나고 열심히 뛴다.
평상시에는 분열·대립하다가도 공유할 수 있는 가치 있는 목표가 생기면 똘똘 뭉치는 게 한국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외환 위기 때의 금 모으기 운동이나 태안 기름 유출 사건, 월드컵 응원 등이 이를 보여준다. 촛불 시위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가치 있는 목표가 있을 때 강한 결집력이 나타난다."
―어떻게 해야 이런 장점을 살릴 수 있을까.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리더를 만났을 때 기적을 만드는 힘이 생긴다. 한국인은 공동 목표가 있을 때 잘 뭉친다. 그래서 최고경영자(CEO)들에게 강의할 때 다들 옳다고 믿는 목표를 하나 분명하게 세워놓고 그 방향으로 밀고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리더의 사(思)·언(言)·행(行)이 일치해야 한다. 리더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신뢰를 받을 수 있다. 그래야 리더가 제시하는 목표에 모두가 따르게 된다."
김 회장은 리더의 덕목과 관련해 크게 세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 인재를 알아보는 것이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밑에 유능한 신하와 장수들이 많았던 것은 무엇보다 리더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둘째, 공동의 가치 있는 목표를 제시하고, 구성원들을 결집시키는 능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 즉 정직성과 도덕성이 중요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기술에 대한 통찰력이다. 과거와는 달리 4차 산업혁명이 몰고올 변화에 대비하려면 기술에 대한 통찰과 이해, 즉 '뉴 하드 스킬(new hard skill)'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한국 기업, 사이버 영토 쟁탈전서 밀려"
― 한국인의 특성에서 단점, 약점은 뭔가.
평등주의가 강하다 보니 통합이 잘 안 되고 갈등이 심한 것도 문제다. 갈등 비용을 줄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서구식으로 갈등 원인을 분석해서 각각을 치유하는 방식은 잘 통하지 않는다. 한국에선 보자기로 감싸듯 갈등을 덮어서 해결해야 한다. 쪼개는 방식으로는 절대 해결하지 못한다. 한국 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두 가지 상징 중 하나가 비빔밥이고 다른 하나가 보자기다."
―지금까지 한국형 경영으로 성과를 냈지만 이제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에선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페이스북 등 온라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IT 서비스 업체들이 시가총액 1~5위에 올라 있다. 중국에서도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샤오미 등 역사가 일천한 IT 기업들이 세계적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지금까지는 오프라인 세계가 중요했지만 이제는 전쟁터가 사이버 세계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한국은 이 부분이 매우 취약하다. 시가총액 10대 기업 중 네이버만 사이버 세계에 속해 있다. 삼성은 사이버 세계에 접근할 수단을 가지고 있는 정도다. 시가총액 20대 기업을 봐도 13개 회사가 5대 그룹 계열사이고, 네이버를 제외하면 모두 전통 산업에 속해 있다. 사이버 영토 쟁탈전에서 밀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한국 경제가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든 것 아닌가 위기감이 든다."
해외 인재 수입하고 신세대에게 자유 줘야
―위기 원인과 처방은 뭔가.
"한국인의 특징 중 하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잘 믿지 않는 것이다. 종교도 한국에 오면 기복신앙이 된다. 내세를 위해 기도하는 게 아니라 현세에 복을 내려달라고 기도한다. 경제·경영 중심 무대가 사이버 세계로 넘어가고 있는데 한국 기성세대는 이 부분이 매우 약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비즈니스를 하고 성과를 내는 것을 잘 못한다.
해결책은 해외 인재를 수입하고, 사이버 세계에 익숙한 신세대를 키워 이들이 활동할 공간을 내주는 것이다. 경제 영역을 반으로 나눠 구세대와 신세대가 절반씩 맡는 것 같은 역할 분담이 있어야 한다."
―신세대가 활동할 공간을 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보다 파격적으로 규제를 풀어야 한다. 경제자유구역이나 규제프리존뿐만 아니라 아예 일정 지역을 정해서 국외 지역, 역외 지역을 만드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지금 한국법으로는 도저히 안 되기 때문에 한국 내 홍콩도 만들고 한국 내 실리콘밸리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역외 지역에서 젊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공기를 맛보며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규제를 풀어서 기업과 개인의 자유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김일섭(70) 한국FPSB 회장
-서울대 경영학과 학·석·박사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회장
-삼일회계법인 대표이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총장
-한국회계기준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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