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Shawn Chase 2015. 9. 30. 14:28

전병근 기자

 

입력 : 2015.09.30 09:00 | 수정 : 2015.09.30 10:41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

사도세자(思悼世子) 이야기는 요즘말로 ‘국민 비극’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극으로 드라마로 제작됐다. 영화로도 일찌감치 1956년에 선을 보였다. 반 세기 만인 지금 또 한번 ‘사도’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돼 화제에 오르내린다. 이번엔 ‘왕의 남자’로 호평받은 이준익 감독의 솜씨다.

개봉 후 첫 주말,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정병설 교수의 ‘권력과 인간’(2012년 출간)이다. 사도의 죽음을 보는 시각, 주요 얼개가 비슷했다. 문득 정 교수에게 영화 리뷰를 한번 맡겨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125분. 짧지 않은 영화가 어느새 끝을 맺고 엔딩 크레딧(영화 제작진을 포함해 기여자들 소개 자막)이 올라갔다. 훑어 내려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참고 문헌으로 정 교수 책이 떴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한중록이라는 1차 사료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중용 이외에 사도의 죽음에 관한 연구서로는 유일하게 거명됐다.

정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영화 제작 관여 여부부터 물었다. 뜻밖에도 그는 말을 아꼈다. “지금 그 문제로 영화 제작진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라며 “결론이 나는 대로 다시 통화하자”고 했다. 1주일쯤 지났다. 그는 “일이 다행스럽게도 해피엔딩으로 잘 끝났다”고 했다. 한 주 전과 달리 밝은 목소리였다. 인터뷰는 그 다음 날 이뤄졌다.

문답 내용에 ‘해피 엔딩’으로 끝난 지난 일의 과정까지 굳이 포함시킨 데는 이유가 있다. 최근 관심이 고조된 콘텐츠 창작의 저작권 문제와 그와 관련된 우리 문화와 관행에 대해 한 번쯤 짚고 넘어가자는 뜻에서다.

-영화 ‘사도’ 자막에 참고문헌으로 ‘권력과 인간’이 올라가더군요. 이번 영화에 어떤 식으로 참여하셨습니까?

작년 4월쯤 영화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사도를 가지고 작품을 만든다면서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제가 시나리오를 봐주면 되지 않겠나 했는데, 직접 학교까지 찾아왔어요. 보내준 시나리오를 읽고 만나서 이야기도 했습니다. 시나리오를 보니까 기본적인 시각이 제 연구 결과를 반영한 것이더군요. 처음에 그 부분을 이야기했어요.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제작진과 만날 때는 어떤 역할로 만난 거지요?

사도를 다룬 ‘권력과 인간’을 쓴 저자이니까 도움을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사실 이전에 이준익 감독이 ‘왕의 남자’를 찍을 때 저작권과 관련해서 좋지 않은 이야길 들은 게 있는 상태였어요.

‘왕의 남자’가 나오기 전에 극작가 김태웅씨가 ‘이(爾)’라는 희곡을 발표했는데 영화 제작진이 그 원작을 샀죠. 하지만 사실 ‘이’라는 희곡 자체가 제 대학 동기인 사진실(史眞實, 지난 8월 별세) 교수가 수업 시간에 과제로 내서 제출이 됐던 거였고, 그 아이디어는 사실상 사 교수에게서 나온 것이었어요.

법적으로 따지기는 어려운데, 어쨌든 원 아이디어가 김태웅씨한테 갔고, 그게 다시 이준익 감독한테로 가서 영화가 만들어진 거거든요. 그런 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서 사 교수가 안타까워했죠. 그래서 사도 제작진에게 제가 그 얘기를 먼저 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들이 한번 사실 관계를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이준익 감독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자신들도 저작권 때문에 애를 먹은 적이 있어서 아주 존중하는 입장이라고 하더군요. ‘왕의 남자’ 때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소송을 낸 적 있는데 “영화사에서 고등학생까지 소를 거냐”면서 오히려 여론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면서 저작권 보호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작진과 만나게 된 거죠. 서로 의기투합해서 많은 걸 얘기했고 제 자료도 더 주고 했어요. 저는 학계의 연구 성과가 영화계에 반영돼서 우리 문화의 수준이 올라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후 저는 작년 7월 미국으로 안식년을 갔다 왔어요. 영화는 아마 10월쯤 완성된 것 같아요. 하지만 얼마 전 시사회 때 가서 보니까 참고 문헌 중 하나로 처리됐더군요. 제 기대와는 달랐던 거죠.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영화의 내용은 제 연구 성과를 상당히 많이 옮긴 것이었어요. 그런데도 그저 참고 문헌으로 소개한 것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령 작년에 국내 개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경우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보면 ‘슈테판 츠바이크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히거든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원안에 대한 존중을 기대했는데 아쉬웠죠.

그래서 이의를 제기했어요. 다행히 그쪽에서도 이해를 하더군요. 상의 끝에 우리 학교에 일정액을 기부하는 것으로 보상에 갈음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추후 흥행 성적에 따라 추가 출연하기로 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학계와 영화계가 좋은 모습을 보여준 셈이 됐습니다. 지금은 저로서도 영화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학생들이 장학금 혜택을 더 받게 되겠죠.

-처음부터 관계 설정을 분명히 하지 않은 탓도 있겠군요.

그때는 저도 중간에 다른 이야기를 들은 것도 있고 해서, 아무리 좋은 관계여도 저작권 문제는 분명히 하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저작권료까지 언급했지만, 그쪽에서 열악한 제작 환경을 들어 사정하길래, 제가 돈 문제는 양보하겠다, 대신 예우는 해달라고 했죠. 하지만 마지막에 나온 결과가 제 생각과는 달랐던 거죠.

-국내외에 이런 사례가 많을 텐데 어떤 기준이나 관행이 서 있는지 궁금하군요.

국내에서는 아마 이번 같은 경우가 처음일 것 같아요. 이른바 정통 사극이라는 것들은 상당 부분 사료에 기초해서 극을 만드는 거거든요. 하지만 사료의 경우에는 원 저작자가 없잖아요. 널리 통용되는 사료, 이번 영화 같으면 한중록이나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같은 곳에 나오는 내용이라면 특정인의 것을 가져다 썼다고 하기가 어렵죠.

하지만 널리 알려지기 전에, 어떤 특정인이 처음 보고한 저작에 근거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이번 영화의 경우 제가 보니까 제 책에서만 왔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30곳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부분에 대해 저작권을 어떻게 인정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것도 결국에는 다른 연구자들이 제대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사료에서 온 거니까.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개별 사실은 이미 알려진 것들이라도 구성 과정에서 창작의 가치가 새로 발생할 수도 있겠지요.

거기에 나오는 사료를 우리도 직접 봤다, 이렇게 주장을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죠. 그래도 저는 저작권 문제가 불투명하게 넘어가기보다, 이번 경우에 필요하면 소송도 가서 따져도 보고 선례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처음에는 있었어요.

물론 그렇게 법정까지 가는 것보다는 원만하게 타결되는 것이 가장 좋죠. 어쨌든 앞으로는 영화계에서도 다른 자료를 이용할 때 좀 더 조심하고, 가급적 선의를 갖고 다른 사람의 노력을 존중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이 책에서 어느 만큼 가져갈 테니까 어느 정도의 대가를 지불하겠습니다. 이렇게 먼저 제의를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영화계보다 사정이 더 어려운 출판계도 웬만하면 그렇게 하는데, 영화사도 미리 투자를 받고 일을 진행할 때에는 조금이라도 원 창작자의 몫을 떼서 존중하는 관행을 만들어가면 좋겠어요.

지금은 영화 제작진이 제가 기여한 부분을 정당하게 평가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기금도 내놓기로 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창작자가 대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이다 보면 밀리거나 묻히는 경우가 많지요. 그 과정에서 창작 의욕도 꺾이고...

심지어 유명인사도 그래요. 제가 한중록 완역서를 2010년에 냈는데 그후에 혜경궁을 다룬 연극이 나왔어요. 거기서 혜경궁 홍씨 기록인 한중록에 기초했다고는 했지만, 한중록만 해도 이본(異本)이 20종이 넘어요. 한중록이라고 하면 다 같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같은 책이 아닙니다. 전문가가 보면 어느 한중록인지 다 알아요. 제 책을 가지고 썼다고 해서 나쁠 게 없을 텐데, 제가 돈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아무데도 밝히지를 않았어요.

정작 그 연극의 해설에서는 다른 책을 인용해 놨어요. 그러면서 공연을 진행한 국립극장에서는 제게 강연을 청했어요. 국립극장은 그 사정도 모르고 불렀겠죠. 결국 저는 제 공은 제대로 인정 못 받고 가서 강연만 해주고 왔습니다. 우리나라는 저작권이 왜 이런가 싶더군요.

물론 엄청난 표절 수준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당사자들이 잘 압니다. 분명한 타인의 공은 인정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걸 서로 존중해주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그런 것도 어물쩡 넘어가면서 무슨 좋은 창작물을 만들겠습니까. 그런 창작자의 결과물은 믿을 수도 없어요.

-그걸 인정하면 그에 따른 저작권 비용이 추가될 거라는 걱정 때문인가 보지요?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아요. 아무리 돈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결국 남의 것 따왔다고 하면 계약도 해야 하고 나중에 소송이 따를 수도 있을까봐 그러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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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명 작가의 표절 논란도 있었고, 국내에도 판단의 기준과 범위에 대해 경각심이 고조된 상황입니다. 이번 사례도 앞으로 건설적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생각해볼 여지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저도 이번 일 처리 과정에서 수소문을 하면서 좀 더 알게 됐지만, 그동안 창작자들이 느껴온 불만이랄까, 낭패감 같은 것들이 적지 않더군요. 인터넷에 보면 그런 사람들끼리 연대도 좀 하자는 목소리도 있어요. 하지만 정작 법정까지 가는 과정에서 승산은 높지 않고 상처만 커지는 것 같더군요.

-영화의 자막도 ‘참고 문헌’ 수준에서 바꾸기로 했습니까? 그래야 일반 관객들도 알 텐데요.

그래서 저희(정 교수와 책을 낸 출판사)가 처음 요구한 건 엔딩 크레딧을 바꾸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영화사 대표 말로는 그게 더 어렵다고 해요. 영화가 개봉되고 배포가 된 상황에서 다시 바꾸려면 심의도 새로 받아야 하고, 디지털 복제방지 해제 같은 문제도 있고 해서 난색을 표하더군요.

결국 절충해서 매듭을 지었습니다. 무작정 상대에게만 엄격하게 요구하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지요. 나도 그렇게 철저히 다 못하는 때가 있으니까요. 우리가 흔히 책 쓰고 뒤에다 ‘저작권에 이의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는 구절을 넣곤 하잖아요. 그것도 따지면 다 편법인데.

서로가 노력해서 조금씩 수준을 높여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번에 결과적으로 좋은 선례를 만든 셈이고, 어쨌든 학계 성과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영화는 그 수익 일부를 학계에 환원하기로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을 때 참고가 됐으면 합니다.

-처음부터 완성된 시나리오를 보셨던가요?

시나리오를 봐주고 이상한 부분들을 지적했죠. 저는 사극이 역사와 꼭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게 자주 나옵니다.

가령 궁궐 장면에서 옛날 관료들 계급장 역할을 하는 게 두 개가 있어요. 하나는 관자고, 하나는 관대입니다. 옛날 최고 계급인 임금이나 세자는 민옥관자를 했어요. 하지만 요즘 사극에서는 대부분 아주 큰 금관자를 많이 써요. 이건 하급이 쓰는 것인데도 보기가 좋으니까.

그런 것들을 지적하면서, “금관자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원래 민옥관자다. 알아서 하라.” 이런 식으로 조언을 하죠. 그래도 사극이 곧 역사는 아니니까, 나중에 보면 자기네들 상상이 들어간 게 꽤 많아요.

예를 들어 이번 영화의 3정승 자살 사건이 그래요. 1760년 정초에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이 한 달 사이에 다 죽어버리죠. 사료에 나오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유는 정확히 몰라요. 노인들이니까 세 명이 동시에 죽을 수도 있죠. 하지만 전염병이 돌았으면 모를까 가능성이 낮아요. 사료에 전염병이 돌았다는 기록은 없어요.

영화에서는 영조가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발하도록 명령하니까 그들 입장에서 차마 실행을 못하고 목을 매서 죽는 것으로 그려놨잖아요. 그건 사료에 근거가 없는 해석이죠. 아마 제작진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그런 부분들이 결합된 결과라고 봐야겠죠.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사실과 상상을 말씀하셔서 말인데, 영화 도입부에 사도가 영조 거처까지 육박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그것이 화를 자초한 사건임을 알리잖아요. 그건 기록에 나오나요?

그 정도로 상세히 나오지는 않습니다. 한중록에 보면 사도가 칼을 들고 수구를 통해 나갔다가 돌아왔다는 기록밖에 없거든요. 더 이상 자세한 기록은 없어요. 여러 기록을 통해 당시 정황을 재구성해보면, 그날 저녁에 비가 왔어요. 승정원 일기에 그날 우(雨)라고 적혀있어요.

거기에다, 옛날에는 사극을 보면 임금이나 세자가 궐밖으로 미행을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몰래 비서 한 두어 명 데리고 민가에 가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겠죠. 하지만 다른 기록을 보면 적어도 50명, 많으면 100명을 수행을 하고 간 걸로 돼있어요.

그러면 어느 정도 그날 밤 그림이 그려지는 거죠. 비오는 밤에 사도가 광증이 오른 나머지 1급 무관들을 거느리고 칼을 뽑고 갔으리라는 것은 몇 가지 사료를 보면 추정이 되는 거죠. 그런 장면을 재구성해보면 가슴이 뛴다, 그런 이야기를 제가 여러 군데에서 했는데, 아마 영화 제작진에게도 했을 거예요.

수구를 통해 갔다면, 옛날에는 창경궁의 수구가 바로 청계천으로 통하게 되어있었어요. 거기서 쭉 따라가면 경희궁으로 가거든요. 실제로 어디까지 간 건지는 몰라도 아마 세상에 알려지도록 간 건 맞겠죠. 영화에서는 경희궁, 심지어 영조 바로 옆까지 간 걸로 돼있죠. 그건 영화 제작자들이 상상을 가미한 부분이죠.

-영화가 나온 후 보신 소감은 어땠습니까?

사실은 제가 사극을 잘 못 봐요. 요즘은 아예 팩션 사극이라는 장르까지 나왔지만, 사극에 하도 엉터리가 많아서. 얼마 전에 개봉한 ‘암살’도 일종의 역사물이라고 하는데, 사실 액션물이지 역사물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예요. 가령 거기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김구 선생이 “어이, 약산 김원봉이” 이렇게 부르는데 문제가 있는 표현입니다.

‘약산’이라는 호는 윗사람한테 부를 때 쓰는 건데, ‘약산 김원봉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그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른 걸로 다 연결돼 있으니까 엉성하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관객 천만을 돌파하잖아요.

처음에 ‘사도’ 제작진이 제게 의견을 구했을 때 저는 “흥행에 구애 받지 않고, 완성도 높은 인간을 제대로 그려낸 작품이 한번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저는 우리나라에서 사도세자야말로 사료가 가장 풍부한 사극의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사료를 바탕으로 해서 인간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상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은 한중록이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면을 그토록 풍부하게 드러낸 기록이 조선시대 어디에도 없어요. 우리 역사 전 시기를 걸쳐 봐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 제작진에게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된 인간을 그려냈으면 좋겠다, 책도 50년 가는 책을 만들 듯이, 50년 가는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습니다.

그분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실제 영화 제작 과정에서는 이런저런 제약 조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들을 다 감안하면 저는 이번 영화의 경우 아주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저로서도 불만이 없지는 않습니다. 뒷부분에 굳이 소지섭이 정조로 등장하는 장면은 좀 이상했던 것 같아요. 감독이나 팬들한테는 죄송한 얘기지만 제 눈에는 군더더기 같더군요.

-사료에는 없는 장면이죠?

허구일 뿐 아니라 좀 지루하게 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마지막에 영조가 후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저로서는 안타까운 부분이었습니다. 영조라는 인간은 철저하게 영조라는 인간으로 가야 제대로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도가 죽어가는 장면에서 영조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내잖아요.

영조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아들에 대한 사랑, 연민, 후회 같은 것을 내비치는데, 제가 아는 영조의 본래 모습과는 다른 부분이니까요.

책에도 썼지만, 영조는 사도가 숨질 무렵 환궁을 하면서 개선가를 울려요. 개선가라는 것은 역적을 토벌했을 때 울리는 겁니다. 적어도 기록상에는 영조가 사도의 죽음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영조의 후회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거나,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 믿는 거지, 사료에는 그런 사실이 없어요.

사도세자가 죽고 몇 달이 지난 후 영조가 쓴 글을 봐도 후회는 없고 분노만 있어요. 그런데도 어떤 분들은 분노로 쓴 글을 후회로 읽으려고 합니다. 한문을 부분적으로만 따서 오독을 해가면서요.

어쨌든 마지막 영조의 캐릭터를 더 영조답게 분명히 보여줬어야 인간을 더 깊이 있게 그리는 것이 됐을 텐데, 영조를 후퇴시킨 감이 있습니다.

-책 제목처럼 ‘권력과 인간’에 초점을 맞추기를 바라셨나 보죠?

저는 사실 인간에 더 집중을 했으면 했어요. 권력이라는 것도 권력자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고.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사도세자 앞에는 늘 ‘비운의’라는 수식어가 따릅니다. 엄한 아버지의 강압이나 고도의 당쟁에 억울하게 희생된 인물이라는 시각이지요. 선생님은 ‘권력과 인간’에서 이런 해석에 반대하면서 ‘사도는 죽을 만했고, 영조는 죽일 만했다’는 점을 부각시켰지요?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그전의 해석과 제 견해가 다른 것은 승정원일기를 봤느냐 여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종전의 논의는 사도의 아내인 혜경궁이 쓴 한중록과 아들 정조가 쓴 사도세자의 전기인 현륭원행장(顯隆園行狀)에 나오는 둘 사이의 모순을 두고 나왔어요.

후자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훌륭했는데 나쁜 신하들 때문에, 노론(노론은 그 다음에 나오지만)의 모함에 빠져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거지요. 하지만 한중록에 보면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등한히 하고 아버지를 두려워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사고를 쳤어요. 그러다 결국 아버지를 광증으로 해하려고 하다가 죽은 것으로 나와요.

두 가지 대립된 그림을 조정할 만한 사료가 없었어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그러니까 영조실록을 잘 보면 그걸 조정할 수도 있는데, 안타깝게도 역사학자들이 사료를 신중하게 안 읽었어요. 실록에 보면 나오거든요. 사도세자가 내관들을 베어 죽이고 영조가 그걸 갚아줬다든가, 사도세자가 병이 있다는 것도 적시하고 있어요.

승정원일기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사도세자와 관련된 핵심 사안들은 정조가 즉위한 1776년에 다 지워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가 워낙 방대하니까, 중간중간에 보면 사도세자가 어떤 인간인지,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떤지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와요.

승정원은 왕의 비서실인데, 거기서 날마다 적은 방대한 기록을 보면 사도세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상(像)이 분명해지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상은 아버지한테 엄청나게 구박받고 두려워했고 사고도 많이 치고 벌벌 떨었던 인물이예요

바로 혜경궁이 그린 상과도 일치해요. 오히려 한중록이 전모의 일부만 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건 사관의 문제가 아니라 사료의 문제예요. 왜 사료를 안 보고 다른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당쟁희생설에 근거한 것으로 대중적으로 주목받은 책이 이덕일씨의 ‘사도세자의 고백’이었지요. 이걸 두고 공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사실 당쟁 희생설은 이덕일씨가 먼저 제기한 게 아니고 한국외대 이은순 교수가 1960년대부터 주장을 했어요. 일종의 가설로. 하지만 근거가 약하니까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는 식이었어요. 여기에다 이덕일씨는 이야기를 더 갖다 붙였죠.

저는 애초에 이덕일씨 책을 한중록 관련서 중의 하나로 읽다가 소설 같아서 버렸어요. 근거가 제대로 안 나와있어서 내가 인용할 만한 책은 못 되는구나 싶었던 거지요. 제 책을 내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이덕일은 어쨌는데…” 그러더군요.

그래서 그 책을 다시 사서 봤어요. 그때는 제가 공부가 어느 정도 된 상태였는데, 이 책에 엉터리가 한두 곳이 아닌 거예요. 주변 학자들도 정식으로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하더군요.

사실 제가 나선 게 아니라 등을 떠밀린 셈이예요. 고민을 하다가, 나도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보니까, 역사학계도 상당수 그 설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예요. 전국역사교사모임 같은 곳에서 나온 책들도 대개 그래요. 그래서 한번 문제삼아야겠다 싶었던 거지요.

-우리가 아는 ‘비운의 사도세자’상(像)은 1960년대에 처음 나온 건가요?

당쟁모함설 이전에 광증으로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운의 주인공으로 각인될 만하지요. 영화로 사도세자가 처음 만들어진 게 1956년일 거예요. 우리 무속에서도 가장 많이 섬기는 신이 사도세자일 겁니다. 세자로 나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실만으로도 이미 비운의 사도세자인 거죠.

거기에 하나가 더 붙은 거죠. 훌륭한 성품으로 태어나서 아주 좋은 성군이 될 수도 있었는데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식으로. 1960년대 한국당쟁사를 쓰신 고려대 철학과 성낙훈 교수님의 책도 그런 시각이었는데, 사료보다는 소문에 많이 의존한 책이에요. 시대적 한계였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승정원일기 같은 자료를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승정원일기의 사료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다음에는 지금 해석을 바꾸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는 얼마나 믿을 만한가요? 신뢰도에 대한 평가는 끝났습니까?

아니죠, 그런 기록들 역시 계속 주의해서 읽어야죠. 학자들 중에는 실록을 좀 과장하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 사관들이 아주 그냥 직필로 쓴 것처럼 말하지요. 물론 그런 때도 있었을지 몰라도, 대부분은 그렇게 적용되기는 어렵지 않았나 싶어요.

기본적으로 실록은 왕이 죽고 나면 그 다음 왕대에 실록청을 세우고 편수관들을 임명해서 씁니다. 선왕대의 시정기라든지 여러 사료들을 가지고 편찬을 해요. 편찬이 끝나면 사고에 보내 보관합니다. 공식적으로는 임금이고 신하고 아무도 못 보지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못 봐요. 순전히 기록으로 보관하는 거죠.

-가령 고종이 세종실록을 참고하고 싶어도 보지 못하나요?

못 보죠. 대신 그런 기록 열람서 역할을 하는 게 승정원일기에요.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에서 계속 기록하고 보관하는 건데, 누구나 보는 건 아니지만 대관이나 관련 신하들은 참조할 수 있었어요. 실록도 비공식으로는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실록들을 보면 ‘개수(改修)실록’ 이런 것들이 많잖아요. ‘숙종실록보궐정오’ 같은 것도 있고.

실록을 편찬해서 보관했는데,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개수를 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할까요. 보관된 실록을 거의 격년에 한 번씩 밖에 꺼내 말리는 작업(포쇄)을 할 때, 포쇄관이 파견됩니다.

그때 “신이 우연히 봤사옵건데 무슨무슨 조항이 잘못된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사옵니다” 이런 식으로 상소를 올리고 개수 작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당시 임금도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었다는 거죠. 우리가 공식적인 것은 물론 비공식적인 루트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영조실록의 경우, 사도세자 관련 부분은 상당 부분 빠져 있습니다.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실록을 편찬할 때 편수관을 임명하고 이런 걸 다 조정했어요. 요즘은 실록청의궤라고 해서 실록이 편찬된 과정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 보면, 정조가 특정 시기는 빼라고 해요. 그러니 완전한 자료라고는 볼 수 없죠. 왕의 입김이 작용한 자료죠.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라도 최선을 다해서 직필하려는, 완곡하게라도 사실을 제대로 기록해나가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임금의 시선을 피해 에둘러 적은 게 많아요. 특히 왕실 관련 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번역본을 보면 무슨 소리인지 몰라요. 뒤주도 ‘일물’이라고 부르잖아요. 정황을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돼있습니다. 이게 실록의 성격입니다.

승정원일기는 그날그날 써놓은 것들로, 거의 1차 사료에 가깝기 때문에, 해당 부분을 다 찾아서 없애지 않는 한 줄거리가 달라질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겠죠

-요약하면, 궁궐의 일을 기록한 1차 사료가 승정원일기이고, 승정원일기를 포함해 여러 사초를 집대성한 것이 실록이군요.

그렇죠. 승정원일기가 1차 자료죠. 워낙 방대하고 기록도 ‘해서체’가 아닌 행초서에 가깝기 때문에 그 동안 옮기는 과정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이용을 잘 못했죠. 아직 번역이 다는 되지 않았지만 최근에 현대 활자체로 옮기고 구두점도 붙여주고 해서 훨씬 쉽게 찾아 읽을 수 있게 됐어요.

-다 데이터베이스화했습니까?

원문 자체는 다 돼 있습니다. 이제는 눈만 고생하면 다 찾아 읽을 수는 있는데, 번역은 아직 멀었습니다. 승정원일기 외에도 한중록뿐만 아니라 혜경궁의 반대파, 예컨데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나 아버지인 김한구 같은 인물의 집안 문집들도 다 공간이 돼있고, 권력에서 밀려난 제 3자의 기록도 볼 수 있어요. 이런 걸 다 망라해서 전체 그림을 그려볼 수 가 있습니다.

사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근대 초기에도 학자들 이런 사료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형편이 못 됐어요. 삼국유사만 해도 초기에는 일본 학자들이나 보고 있었습니다. 책을 소장하지 못했으니까. 중간에 듣는 소문하고, 한두 가지 자료만 있으면 글을 쓰고 그랬거든요.

옛날 분들이 한문 실력은 훨씬 낫겠죠. 하지만 사료 접근에 있어서는 지금 우리가 오히려 1차 자료를 폭넓게 활용해 궁중 현실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거죠.

-선생님은 고전문학을 전공한 국문학자인데 어떻게 사도세자를 연구하게 되셨지요?

한중록 때문이죠. 한중록의 경우, 가람 이병기 선생이 처음 발표했을 때 위당 선생 같은 분은 진위조차 의심했어요. 혜경궁 이름으로 썼지만 여자가 왕실의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히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던 거죠.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하지만 이제 실록이 다 공개되면서, 고종 실록을 보니까 한중만록도 나오고 관련 기록으로도 사실 관계가 확인이 되는 겁니다. 여러가지 사료들로 검증이 되고 하니까, 이제는 문헌 자체의 진위성이 의심받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아요.

국문학계에서는 한중록을 국문학의 중요 고전으로 높이 평가해왔어요. 사실 관계를 떠나 한글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봤는데, 역사학계에서는 사실 관계 자체가 맞지 않는다며 사료적 가치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어왔지요. 1960년대 이은순 선생을 비롯해 그후로도 비판적인 견해가 주류였어요.

예컨대 1795년 정조가 혜경궁에게 “다음 갑자년 1804년이 되면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난 상왕이 되어 화성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는데, 이걸 ‘갑자년 구상’이라고 불러요. 이것마저 역사학계에서는 부정했어요. 한중록에만 나오고 다른 어디에도 안 보이니까 꾸며냈을 거라고 보고, 한중록을 믿기 어려운 책이라는 근거로 들었어요.

하지만 다른 사료들이 공개되면서 한중록에서밖에 없던 사실이 확인되면서 오히려 역으로 한중록이 고유한 사실을 담은 것으로 인정받게 됐어요. 최근에는 역사학계에서도 몇몇 분들이 한중록의 사료 가치를 달리 평가하는 것 같아요.

얼마 전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역사학자들과 토론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제가 발표를 한 후 적어도 사도세자가 광증을 가졌던 걸 부정하긴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 합의에는 도달했어요. 사료가 있으니까 부정할 수 없게 된 거지요.

-사도세자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중록이 중요 텍스트여서 공부를 시작했고, 그 내용이 사도였다는 얘기군요.

그렇죠. 우리 고전문학계 최고의 고전인데 제대로 온전한 주석이 안 돼있다고 생각을 한 거죠.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이건 출간이 된 책도 아니고 일반 독자를 위해 쓴 책도 아니에요.

크게 나누면 3부인데, 대상 독자가 달라요. 두 개 부는 손자인 순조에게 주려고 쓴 글입니다. 일종의 편지하고 비슷해요. 그래서 큰 맥락을 공유하지 못한 사람, 문화를 공유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1960년대에 김동욱 선생 같은 분이 좋은 번역서를 냈지만 빠진 구석이 굉장히 많았어요.

이제는 다른 관련 사료들이 많으니까 전모를 되살려낼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한번 도전해보자 결심을 했고, 정말 풍부한 사료 데이터베이스의 도움을 받아 거의 완전하게 복원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학생들과 같이 독회도 하면서 아주 공을 들여서 만들었습니다. 애를 많이 먹긴 했지만 아주 좋은 경험이고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선배 학자들보다 더 똑똑해서도 아니고 순전히 오늘날 사료 접근이 용이해진 덕분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사도의 죽음에 관한 한 관련 자료는 다 섭렵하신 셈이겠네요?

스무 종에 이르는 한중록 이본들을 다 봤고, 알려진 연구들은 다 봤습니다.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그렇게 볼 때 영조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자기 일에 열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히 깐깐하고 잘하려고 했어요. 실제로 잘한 부분도 많고.

-좋은 임금이었습니까?

좋은 임금이고자 했죠. 상대적으로는 좋은 왕에 속했다고 할 수 있어요. 일종의 장악력도 뛰어났고요. 그런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왕정에 한해서입니다.

그러나 감정적인 부분에서는 사람을 대할 때 혼란스럽고 미숙했던 것 같아요. ‘분노의 제왕’이라고 하지요. 화내는 부분이 워낙 많으니까. 신하들이 제발 화 좀 그만 내라고 할 정도였지요.

예컨대 ‘명기집략’이라는 명나라 역사책에 조선 임금에 대한 부분이 좀 왜곡이 됐다고 해서 그 책을 수입한 사람, 소지한 사람, 판매한 사람을 다 잡아 죽이거든요. 엄청나게 가혹한 거죠. 그 사건 때문에 연암 박지원이 과거 시험을 단념했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죠.

사도세자와의 관계에서도 자기 감정을 못 다스린 것 같아요. 그 배경을 알고 있었던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거기에 영조라는 인간의 성격이 잘 나오지요. 인간 내면을 그렇게 깊이 그린 책은 세계에도 드물 거예요.

정신분석학이 나오기도 전인데, 영조가 어릴 때 겪었던 심적 고통, 트라우마를 묘사합니다. 왕자로 태어나 왕(세자)이 되지 못했을 때 느낀 자기 운명에 대한 불안감, 자신을 조롱한 사람에 대한 모멸감, 이런 것이 전 생애를 지배한 것 같아요.

궁녀의 천한 몸종의 아들이라는 태생 컴플렉스도 결부되었던 거죠. 그런 것 때문에 얕보이지 않으려고 더 잘하려고 했던 왕 같은데. 그 바람에 분노조절장애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공적인 영역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좋은 임금이지만, 사적인 영역, 감정의 영역으로 가면 정말 대하기 싫은, 나 같아도 모시기 힘든 임금이었던 거죠. ‘삼성가의 사도세자’라고 할 수 있는 이맹희씨 자서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한중록과 너무 닮아서.

요즘도 비슷하게 파악될 수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로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겠죠.

-영조는 세자에게 공부를 그렇게나 강조하던데 자신은 공부를 많이 했나요?

많이 했지요. 책도 많이 썼고. 사실 영조는 뒤늦게 왕세제로 책봉되는 스무 살 전까지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왕자였어요. 그래서 임금이 된다는 생각을 못 했고, 공부도 제대로 못 했다는 거죠. 여건이 안됐으니까.

비실거리던 황형 경종이 죽고 갑자기 왕세제가 되니까 그때부터 왕이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한 거죠. 그때부터 자신은 열심히 했다는 거예요. 아들한테 “봐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내가 얼마나 훌륭한 임금이 됐냐. 그런데 너는 좋은 여건에서 왜 그러냐”라고 말하는 거죠.

사도는 어릴 때 바로 세자를 만들어주고, 일급 선생 붙여 공부시켜주고 훌륭한 임금이 되기를 바랐는데, 이 아이는 공부에 별 뜻을 보이지 않으면서 어긋났던 거죠.

이 과정이 승정원 일기에도 잘 나옵니다. 8살 무렵이던가 사도세자가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한 날, 영조가 물어보죠. 세자가 동몽선습을 읽었는데, 영조가 “어땠니?” 하고 물으니 “간신히 마쳤는데 힘들었어요”라고 답해요. 그때부터 실망하는 거죠.

또 사도가 눈이 어지럽다고 하소연하니까, “너 언제 어지럽니?” “책 읽을 때 어지럽지?” 이런 식으로 따져 묻습니다. 그러고 또 실망하고 야단 치고. 그게 사도가 열 살 무렵일 때부터 그래요. 한중록에서는 얼핏 지나가는데, 승정원일기에는 그런 대목들이 아주 많아요. 사도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죠.

-사도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아버지를 잘못 만난 겁니까?

잘못 만났죠. 그런 아버지의 후계자가 된 것이 비극인 것 같아요. 그런 아버지 밑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견디기 어렵고 찍혀 나갈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향 자체가 상당히 달랐어요. 옛날에 한중록 읽을 때는 사도세자를 두고 체격이 ‘석대하다’고 돼있어서, 체격이 건장한 것으로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건 좋은 해석이고, 승정원일기를 통해 보면 뚱보예요. ‘체심비풍’이라고 해서, ‘몸이 아주 뚱지다’ 이렇게 표현해요.

영조도 그런 점을 야단친 대목이 많아요. “너는 내가 스무 살 때 탄 가마를 열 살인데도 들어가지도 않아!”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사도가 먹는 것도 좋아합니다. 일종의 스트레스성 아동비만이라고나 할까요.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같은 증세도 어릴 때 보이고. 그래서 더 어긋났는지도 모르지만. 요즘과 어찌 그리 비슷한지 몰라요.

-사도가 기록상으로는 비만이었다고 하셨는데, 영화에서는 최고의 아이돌 배우가 연기를 했지요.

최근의 극 중에서는 유일하게 사도세자 모습에 가까웠던 게 얼마 전 KBS에서 방영한 ‘붉은 달’에 나온 배우였어요. 그 드라마 제작자는 되도록 사료에 맞게 연출해보고 싶었나 보죠. 영화는 아무래도 흥행을 고려해서 배우를 기용했겠죠.

-사도가 처음부터 이상이 있었다기보다 성향이 다른 아버지의 과잉 기대에 어긋나면서 관계가 뒤틀리고 발작 증세도 생기고, 급기야 반역에 해당하는 행동으로까지 치닫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영조도 어느 순간에 기대를 접었던 거죠. 발작이 일어나면서 사람도 죽이고 할 때 기대를 접었다고 봐야죠.

-그래도 굳이 뒤주에 가둬 죽인 것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냥 폐위를 시키던가 귀양을 보내 객사하게 할 수도 있지 않나요?

워낙 엽기적인 죽음이었으니까 다들 그 점을 궁금해하죠. 제가 복원을 했던 부분도 그 대목인데. 일단 세자를 만들어 놓은 후에 폐세자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영조가 신하들에게 폐세자반교를 쓰라고 했는데도 감히 쓰려는 사람이 없었잖아요. 오죽하면 자기가 직접 썼어요.

처음에는 뒤주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죽이려는 시도도 했어요. 사도에게 칼을 주고 자결을 명했지만 신하들이 막았잖아요. 사도가 옷을 찢어 목을 매려고도 했고, 돌계단에 머리를 찧어 죽으려고도 했지만 매번 신하들이 막았어요.

그때 정황을 보면, 영조가 처분을 하러 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동궁 관리들 상당수가 도망을 갔어요. 사도가 어찌되면 근처에 있는 자기들도 온전치 못하다는 생각을 다들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 순간에는 반역죄로 처벌받은 상황이지만 그 끝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조선의 역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사람들이 그자리에서 사도의 목숨을 살리지 않았으면 자기 혼자 죽는 게 아니라 그 집안이 완전히 망한다고 봐야 해요. 그러니 다들 목숨을 걸고 말리는 거죠. 그러니 영조는 죽이려 해도 죽이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에 누군가에 의해 뒤주 아이디어가 나왔고, 영조는 그 속에 사도가 스스로 들어가도록 했던 겁니다.

-사도 이야기의 토대가 된 한중록이 중요한 저작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영역본을 두고 정치철학 텍스트로 아주 높이 평한 외신 리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대단한가요?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영역이 여러번 됐습니다. 그 중 캘리포니아대학 출판부에서 낸 김자현(JaHyun Kim Haboush) 전 컬럼비아대 교수(2011년 작고)의 번역본(The Memoire of Lady Hyegyoung)이 가장 잘 됐다고 하더군요. 김 교수님이 콜롬비아대에서 동양고전 선독 같은 과목을 강의할 때, 일본의 겐지 모노가타리와 중국의 무슨 작품과 같이 읽혔는데 학생들 반응이 가장 좋은 게 한중록이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김 교수님의 번역서가 나온 뒤로 새로 발견됐거나 해석이 돼 나온 자료들이 많아서 한중록 영역도 새로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서양에서는 셰익스피어 같은 문학 고전도 정치철학서로 보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한중록을 ‘권력과 인간’으로 읽어내셨는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나요?

우선 권력 문제를 생각하자면, 인간이 권력자가 되면 권력이 곧 자기고 자기고 곧 권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일체로 만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군림을 하려드는 거죠. 그런 정서가 지금도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북한 체제를 희화화하지만 우리 정치권이나 재계에도 그런 모양새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의 속성은 밖에서는 별일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건 사고를 통해서 한 번씩 내부의 숨은 치부를 드러내지요. 저는 그걸 균열이라고 부르는데, 평소에 그렇게들 아름다운 모습으로 명절에 모이고 하다가도, 갑자기 자살 사건이나 갈등이 불거지면 숨은 실상이 드러나지요.

사도세자 사건은 조선 왕실의 균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고. 그 균열을 통해 권력 속의 인간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교훈을 통해 지금 권력들에 대해서도 반성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지요.

교육적인 부분으로는, 자기 기준으로 끌려고 하는 엄한 아버지와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들의 불행한 관계를 보여주지요. 그리고 그동안에는 잘 조명되지 않는 부분이 또 하나 있어요. 혜경궁과 정조의 모자 관계입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통해 부자 관계가 멀어질 경우에 겪게 되는 실패를 봤어요. 그래서 조손 관계를 잘 맺게 하기 위해 정조를 사도세자 사망 직후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보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번엔 어머니인 자신과 정조의 사이가 멀어지고 말아요.

한중록을 보면 자기 친정이 박살난 이유의 일부를 거기에서 들고 있어요. 요즘 부모들이 자기희생해가면서 자식들을 조기 유학도 보내고 하는데, 정작 나중에 돌아오는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 외에도 많습니다. 가령, 혜경궁은 당시 궁의 최고 권력자로 있었어요. 궁궐에서 70년 있었으니까. 임금에 버금가는 권력자였어요. 모든 1급 정보를 다 가진 위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본 심경이 다 나옵니다. 잘난체하고 깨끗한 척하고 신의 있는 척하지만, 우리한테 들어와서는 어떻게 했다는 식으로, 인간의 표면과 이면에 대한 기록들이 아주 풍부해요.

사도세자 이야기가 워낙 강해서 다른 부분들이 가려져 있는데 제대로 조명되고 해석해서 얻을 것들이 참 많아요.

-이번 영화에서 대왕대비 인원왕후와 영조의 대결도 인상적이더군요. 영조가 퇴위하겠다고 시위했을 때 대왕대비가 관두라고 쏘아붙이는 장면이 압권이었죠.

한중록에 나오지요. 그런 장면들이 사실 빛나는 장면들인데, 그전에는 사도에만 집중하니까 무덤덤하게 넘어갔던 부분이에요. 아까 한중록 쓸 때 혜경궁이 최상위 권력자라고 했는데, 임금과 부딪힐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이 대왕대비잖아요.

그런 경우가 왕왕 있었어요. 정조도 정순왕후랑 부딪혔고, 그전에 연산군 사극에도 그런 게 나왔죠. 제일 막강한 권력자끼리 부딪히는 건데, 한중록만 보면 그 이유가 분명치가 않아요.
요즘은 실록이나 다른 사료들도 같이 보니까 관계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지요. 영화에서는 그런 여러가지 해석들을 종합해서 입체적으로 구성하게 된 거죠.

-권력과 인간을 말씀하셨는데, 권력과 죽음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는 것이 많지 않나 싶어요. 사도세자는 물론 영조도 그런 트라우마가 있었지요. 권력으로 인해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지경 말입니다.

영조가 왕자였던 연잉군 시절 초상을 보면 비쩍 말라서 불안하고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에요. 그때 실록을 보면 연잉군의 부채를 받은 신하들이 탄핵당하곤 합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걸 영조 정도 머리가 되면 아는 거죠. 그러다 살아남은 사람이니까.

거기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정권을 뺏길 뻔했잖아요. 반란 세력이 거의 서울 근교까지 왔지요. 혜경궁도 지적했지만, 영조도 젊었을 때부터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그게 트라우마로 남았을 걸로 볼 수 있지요.

사도도 마찬가지로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지요. 죽음을 예감하는 얘기를 계속 하죠. 무덤을 파놓고 거기다 병장기 숨겨놓고 하는 기행도 벌이고. 그렇게 보면 권력이라는 게 무서운 현장이고 치명적인 영역인 거죠. 보기에는 그럴듯 해보여도.

-또 하나 의문은 조선 시대 인간의 이해도에 관한 것입니다. 당시 성리학이 마음을 탐구하는 심학이었고 수준도 꽤 깊었는데, 왜 공부보다 그림이나 활쏘기를 좋아하는 사도 같은 인물의 성정을 포용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다른 임금들도 대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요. 숙종도 좋아했고, 영조는 잘 그렸어요. 정조도 전해오는 그림을 보면 잘 그리지는 않았어도 좋아했어요. 임금들 소일거리가 그림이었죠. 활 쏘고 칼 쓰는 것도 좋은 취미였던 거죠.

그런 걸 해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사도의 경우 공부를 너무 등한시한다는 게 문제였던 거지요. 조선시대 기록, 야담 같은 것을 보면, 어릴 때 장난꾸러기이고 개구장이였지만 영특해서 발탁된 사람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건 문제 될 게 없어요.

영조는 자기 자식은 그런 것 말고도 기본적으로 공부를 중시해야 한다고 본 거예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기보다 자기가 볼 때 기본에 해당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고 본 거죠.

조선 시대 왕자 교육에 대해서도 자칫 과장돼온 측면이 있어요. 몇 가지를 추려서 과거엔 아주 교육을 잘 받았고 좋은 시스템이 있었는데 지금은 무너졌다, 지금 우리가 배울 게 많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저는 견해가 좀 다릅니다.

왕세자 교육은 반사회적인 교육이었습니다. 자기 옷도 자기가 못 입고, 다른 애랑 놀아본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좋은 교육입니까. 다른 인간의 이해에 대한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교육입니다. 이전에 어린 왕자에게 또래아이인 ‘배동’을 붙여줘서 사회성을 길러줬다고 하는데, 배동은 친구가 아니라 그냥 어린 시종이었어요. 배동을 통해 사회성을 길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어요.

-성군이 나온 게 오히려 이상한 건가요? 왕조가 500년이나 나름대로 유지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문제가 많은 교육이었다면 보완이나 개선이 따르지 않았을까요?

조선 왕조의 500년 지속에 대해서도 해석이 다양하지요. 오래 이어졌으니 훌륭하지 않겠느냐는 가설에 근거해서 글 쓰는 분도 있지요. 저는 시각이 좀 다릅니다. 이건 사실 판단의 문제를 넘어서는 이야기이긴 한데, 저는 왕조가 오래 계속되면서 오히려 국민을 연약하게 만든 것 같아요.

가령 지금 북한에서도 응당 일어나야 할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주민을 너무나 가난하고 배고프고 힘들게 만들어 놓은 결과라고 생각해요. 조선 시대에도 일반 백성은 워낙 가난하고 피폐해서 혁명의 기운이 없어 왕조가 유지된 것 아닌가 싶은 거지요. 좀 먹고 힘이 있어야 혁명도 하는 것 아닌가, 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백성의 입장에서는 불행한 왕조였다는 뜻인가요?

혁명은 부르조아가 일으키는 것이지 농민이, 빈농이 일으키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합니다. 조선은 거의 빈농 사회여서 어렵지 않았나 싶어요. 지배층이 잘해서 혁명이 안 일어난 게 아니라 피지배층이 너무 허약해서가 아닐까 싶은 거지요. 이 문제는 학문을 약간 넘어서는 부분인 것 같아요.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한중록 이전에는 맨 처음 박사학위 논문을 쓰신 게 ‘왕월회맹연(玩月會盟宴)’ 연구였지요? 어떤 책인가요?

조선을 대표하는 최장편 소설입니다. 18세기 중반 작품으로 추정되는 한글 소설입니다. 모두 180권인데 서울대 출판부에서 500면 분량으로 12책을 냈어요. 박경리 토지보다는 길다고 봐야지요.

저자는 전주 이씨 여성 작가로 추정합니다. 전부 3대에 걸친 대하소설인데, 집안에서 일어난 이야기, 집밖으로 가서 자손들이 공을 세운 이야기 이런 것들입니다.

그전까지는 조선에 장편소설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근대 문학 초기 작가들만 해도 조선은 장편을 쓸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회가 아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후에 많이 보고가 됐죠.

-18세기에도 소설이 대중적으로 읽혔나요?

필사본이 읽혔죠. 그 당시 유한 계층 여성들은 긴긴 밤에 소일거리가 없으니까, 당시 기록을 보면 한 번에 속독을 했대요. 잘 읽는 사람은 열 줄을 한 번에 그냥 훑어서 읽고 넘겼다고. 그러니 하루에도 열 권 스무 권도 읽고. 책을 빌려주는 곳이 서울에 많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 시대에 유통이 된 소설입니다.

-그 뒤 저서로 ‘나는 기생이다’ ‘조선의 음담패설’을 내셨지요. 주로 주변부 문학을 탐구한 이유가 있나요?

한글 문화가 주변 문화입니다. 저는 궁정이나 중앙 관료, 선비보다도 민중, 여성 이런 쪽에 관심을 가지고 시작을 했지요. 한중록도 궁중 문헌이긴 하지만, 궁중 내 여성 기록이라서 제 시야에 들어왔던 거고.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구운몽’을 완역하시면서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봐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요. 어떻게 봐야 하죠?

구운몽은 위안의 소설인 것 같아요. 크게 말하면, 어른들의 동화라고 보면 됩니다. 어른들이 고단한 현실에 지쳤을 때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 읽었던 것 같아요. 나쁘게 말하면 당의정 문학인데, 쓴 현실에 달달한 설탕을 바른 작품이라고 볼 수 있어요. 아마 20세기 리얼리즘 시대에는 비판을 받을 만한 작품이었고, 그걸 회피하기 위해서 우리 국문학계는 그걸 사상 소설로 포장했어요. ‘유불도(儒佛道) 삼교 융합’이라고. 사실은 그런 소설은 아닌 것 같아요.

소설의 본령은 그런 게 아니고, 기본적으로 위로받는 작품입니다. 예컨데 영조도 구운몽을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어요. 그만큼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예요. 승정원 일기 보면 말년에 신하들에게 이 책 누가 지었냐, 잘 지었다고 해요.

이승만 대통령도 옥중잡기 보면, 감옥에서 구운몽을 두 번 읽었다고 나와요. 현실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위로를 받은 거지요.

-장기 베스트셀러였네요.

조선의 유일한 베스트셀러죠. 임금부터 기생까지 다 읽은 국민 문학인 셈이죠. 그런 것들을 다른 여러 이유로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도올 김용옥 같은 분은 영국에 셰익스피어 나온 다음에 우리는 구운몽이나 짓고 있었다고 비판했다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훈계를 가르치려면 교훈서를 보지 왜 문학책을 보겠어요. 문학은 삶의 아름다움도 담고 때로는 잊게도 하고 위트도 담고 유머도 담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이해 못 하고 한 말이지요. 문학이 논어 대학 중용 같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저는 남들한테 훈계하는 그런 것은 재미없다고 보는 사람이거든요. 인간이 안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읽으면 재미가 없어요.

인간이 들어있는 게 텍스트로 더 소중하다고 봅니다. 버리기는 쉽습니다. 우리가 겨우 이뤄낸 성과들을 그렇게 버리면, 한중록 버리고 구운몽 버리고 하면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지요. 부모가 마음에 좀 안 드는 부분이 있다고 다 버리면 되겠습니까.

-‘조선의 음담패설’은 어떤 책입니까?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조선 후기 풍속을 담은 ‘기이재상담(紀伊齋常談)’이라는 책을 번역한 것인데, 이 책은 한국에 남아 있지도 않았어요.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이런 류의 구전 문학이 남아 전해진 경우가 드뭅니다. 음담패설과 관련된 것은 거의 대부분 일본에서 역수입된 거에요. 우리는 다 버려버렸어요. 일본 사람들은 한국어 공부한다고 그걸 가지고 썼어요.

-우리는 그런 책을 낮춰 본 건가요?

낮춰 본 거죠. 조선에는 남아있는 게 거의 없어요. 이리 버리고 저리 버리고 해서. 기이재상담이라는 책도 제가 찾은 게 아니고, 제가 아는 친한 일본 교수가 후쿠오카에서 찾아냈어요. 보고서 깜짝 놀랐죠.

복사본을 받아서 번역서를 냈고, 출간하면서 한국에는 없는 책이니 기증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지금 규장각에 기증을 했어요.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게 유일본입니다.

이 안에 보면 조선의 풍속 현실이 얼마나 잘 담겨있는지 몰라요.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님이 열심히 조선시대 호적 분석을 해서 혼속 정리를 해놓은 게 있는데, 이 책 보면 다 나와요. 여성도 본남진(본남편), 소대남진(일시적으로 관계를 맺는 남성)이라고 해서 남자를 여럿 거느리고, 남성도 화처를 여럿 거느리는 현실이 그려져 있어요.

이런 자료 없으면 그런 사실을 몰랐죠. 그런 걸 모르면 이상의 ‘날개’도 이해를 못해요. 그런데도 ‘음란한 얘기’가 좀 있다 싶으면 다 버려요. 지금도 비슷해요. 제가 그 책을 낸 다음에 인문대 학장님한테 드리러 갔더니, 마침 어느 고위 보직 교수님이 와있어요. 소개를 했더니 책을 보고 픽 웃더군요. 그런 사람들이 버릴 것을 가지고 저는 작업들을 많이 했어요. 우리의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기생이다’는 어떤 책이지요?

그 책도 마찬가지로 주변부 연구에 해당합니다. 기생 자료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기생이 자기 입으로 자기 일생을 말한 유일한 자료예요. 그전에는 황진이의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다가, 님 오신 밤에 서리서리 펴리라’를 보고 님에 대한 사랑으로 해석했죠. 기생은 사랑 같은 것 없습니다. 기생 이야기 읽어보면, 남자 손님의 비위를 맞춰준 거죠.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기생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살아갔는지 알면 그걸 사랑으로 못 읽어요. 그런 것들을,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게 해주는 그런 소중한 텍스트들을 우리는 안타깝게도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겨요. 얼마 남지 않은 자료들조차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까 안타깝지요.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바람에 제가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무슨 연구를 하고 계시죠?

두 가지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소설들이, 정보가 어떻게 유통이 되어왔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소설의 유통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전세계적으로 정보 유통의 효시가 된 것이 소설 유통이에요. 근대 초기에 소설이 정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소설책이 요즘 소셜 미디어 같은 역할을 했다는 건가요?

그렇죠. 엄청나게 많이 유통이 됐어요. 제 말로 하면, 조선시대에 이미 정보 유통의 고속도로가 하나 놓였다고 하지요. 조선 시대 문맹률이 굉장히 낮아지는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주요한 것이 소설 유통이에요.

우리는 거기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없어서, 소설 유통과 정보 유통에 대한 책을 하나 써서 초고를 완성했습니다. 서울대 출판부에서 ‘조선시대 소설의 생산과 유통’이라는 제목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는 11월 대산재단에서 발표할 건데 ‘한국문화의 성격과 위상’이라는 글입니다. 한국 문화가 가진 주변적 성격에 대해 제가 오래 탐색해온 결과물입니다. 한국 문화는 어떤 특질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것을 한국 문화라는 좁은 테두리가 아니라, 세계 문명사적 차원에서 좀 넓게 조망을 하려고 합니다. 그 속에서 한국의 위상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고요 정리 단계에 있어요.

-같은 서울대 국문과에 계셨던 조동일 선생의 오랜 연구 주제와 비슷하게 들리는군요.

사실 국문학자라면 대부분 제가 가진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요. 우리 과 선생님들 이야기해보면 다들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죠. 꼭 조동일 선생님이 아니어도 공유하는 문제의식인데 표현해내기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게 정리돼 나온 책들은 많지 않아서. 학회에도 발표를 한 적이 있는데, 그걸 논리화하는 작업은 별개의 문제니까.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세계 문학 속의 한국 문학의 위상은 많은 학자들 화두인데, 조동일 선생이 일찌기 구체적인 발언을 하셨지요. 그 작업이 게승이 되고 누적이 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조동일학’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영화와 관련해서도 영화사가 천만 관객 돌파하면 일정 기금을 학교에 출연하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가 기금에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저는 선학 이병기 선생의 호를 따서 ‘가람 연구기금’이라고 붙이고 싶어요. 요즘 참 안타까운 현실이, 캠퍼스에 돈 낸 사람들 흉상밖에 없어요. 학문의 전당인데 학문을 가져왔다든가 일으켰다던지 그런 사람의 기념물은 없어요. 건물 이름도 대기업에서 붙인 것이고.

-대학 발전기금 마련이라는 당면 현실 때문이겠지요.

그래도 이건 본질을 외면한 것 같아요. 예컨대 규장각 장서만 해도 옛날 어려운 시절에 선배 학자들이 자비 아껴서 산 책 수천 권을 기증한 게 많아요. 그 과정이 가람 일기에 잘 나옵니다. 지금은 그 책들 상당 수가 국보급이죠. 그런데도 후배 학자들이 그 공덕을 기리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서울대 70년사에 아직 가람 선생 책을 가지고 기념 학회 한 번 열어준 적이 없어요. 한번은 모 관장 계실 때, 외국 대학의 어떤 교수 한 분 추모학회를 연다고 해서 제가 우리 선배 학자들 추모해본 적 있느냐고 고까운 소리도 한 적이 있어요.

단순히 민족주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분들도 소중한 작업들을 했는데 제대로 기려본 적이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

조동일 선생님 같은 경우에도 한평생 열심히 하셨어요. 후반에 너무 앞서 가셔서 대중적으로 다소 괴리된 부분이 있지만, 저는 그런 것도 학문적으로 따져서 극복을 해야지 외면하거나 비껴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조동일 선생님 글이 학계의 관심사였던 시절이 있었어요. 조 선생님 글이 나오면 거기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했던 시절이 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걸 넘어 혼자서 치고 나가면서 아무도 못 쫓아가게 된 거죠. 그래도 학문의 이념을 세운 부분이 있으니까, 검증을 하고 따지고 하는 작업을 후학이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게 안타깝죠.

저는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조동일 선생님이 계시고, 후학들도 그걸 이어서 극복을 해나가야지 피해가서는 안된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미니북] 영조는 왜 사도를 뒤주에 들게 했나?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한국고전문학을 전공했다. 한글 소설을 중심으로 주로 조선 시대의 주변부 문화를 탐구해왔다. 저서로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소수록 읽기’,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 그림으로 읽는 구운몽’ 및 ‘조선의 음담패설-기이재상담 읽기’ 등이 있다. ‘한중록’과 ‘구운몽’을 번역해 책으로 내기도 했다. 논문으로는 ‘조선시대 한문과 한글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일고(一考)’ ‘조선 후기 한글 출판 성행의 매체사적 의미’ ‘무정의 근대성과 정육(情育)’ 외 다수가 있다. 한국 문화의 성격과 위상을 밝히는 연구를 필생의 과업으로 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