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10.12 01:54 수정 2015.10.12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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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92> YS를 대통령으로 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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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 12일 민자당의 김종필 대표(오른쪽)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영삼(YS) 대표 겸 대통령 후보와 귓속말을 나누고 있다. YS가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 노태우 대통령(9월 18일)에 이어 박태준 최고위원(10월 9일)이 탈당하면서 민정계 의원들이 연쇄 탈당할 조짐을 보일 때였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눈에 선하다. YS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칩거를 그만하시고 당사에 나와 주십시오”라며 나를 종용했다. 그러곤 이내 당내 대선 후보 경선 문제를 꺼내며 “나를 지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나는 “지금 총선 패배의 책임을 느끼고 반성하고 있는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겠습니까. 앞으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며 확답을 주지 않았다.
사실 시기의 문제였을 뿐 나는 90년 3당 합당 때부터 마음속으로 차기(次期)는 당내에서 둘째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YS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게 순리(順理)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그때가 아니었다. 노태우 대통령도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YS가 야당 체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국정 관리에도 신뢰를 보여주지 못하자 노 대통령의 YS를 향한 마음은 수시로 흔들렸다. YS는 3당 합당의 주체인 노 대통령과 나로부터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약속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했다. 그래서 YS는 91년 초부터 민자당의 차기 대권 후계구도가 조기에 가시화돼야 한다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91년 4월에는 김대중 평민당 총재와 대구에서 기습회동을 해 공안정국 청산과 내각제 개헌 반대를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집권당 대표가 야당 대표를 끌어들여 대통령을 향한 정치투쟁을 벌인 셈이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 노재봉씨가 국무총리로 임명돼 정가·언론에선 노재봉 후계자론이 나돌고 있던 게 YS·DJ 대구 회동의 배경이었다. YS는 또 최재구 상임고문과 노련한 안기부 국장 출신인 김영광 의원을 통해 나에게 끊임없이 지지를 호소했다. 최 고문은 내 밑에서 신민주공화당 부총재를 지냈지만 경남고 동문인 YS와도 막역한 사이였다.
다시 92년 3월로 돌아오면 YS의 대선 출마 선언은 민자당에서 때 이른 대권 정국을 촉발시켰다. 민정계 관리자인 박태준 최고위원을 비롯해 이종찬·이한동 의원 등이 연이어 경선에 출마할 뜻을 밝혔다. YS는 마음이 급해졌다. 며칠 뒤 자신의 측근인 최형우 정무장관을 청구동으로 보냈다. 그때도 사전 연락이 없었다. 그는 YS가 왔던 그때처럼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무작정 나를 기다렸다. 나는 최 장관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아 2층 방에서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한참 뒤 최 장관이 2층으로 불쑥 올라왔다. 민주계의 스타일이 그랬다. 그는 YS에 대한 지지를 부탁하며 “한 번만 더 김영삼 대표를 만나 달라”고 요청했다.
4월 8일 오후 6시 나는 노 대통령의 요청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노 대통령과 단둘이 앉았다. 그는 “얼마 전 박태준 최고위원이 찾아와 경선에 출마하겠다고 하기에 ‘정 뜻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겠다는 사람에게 뭐라고 합니까”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박 최고위원이 출마하면 미국 민주당의 페라로 여사처럼 곤경에 빠질 것”이라고 했다. 박태준의 출마를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84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월터 먼데일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한 제럴딘 페라로 여사는 예비선거 과정에서 재산 논란으로 지명전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노 대통령은 그런 뒤 “선배님께선 출마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내게 넌지시 물었다. 나는 “세상은 순리대로 되는 것 아닙니까. 나는 대권에 뜻이 없습니다”고 답하고는 되물었다. “김영삼 대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김 대표야 대통령 하기 위해 합당한 사람이니…. 그가 출마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다소 애매모호한 답이었다. 내가 다시 “3당 합당 때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다음은 YS라는 공감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대통령께서 특별히 다른 생각이 없으시다면 나는 당초 생각대로 하겠습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굳이 저의 의중을 밝힐 필요도 없겠군요.” 확답은 아니었지만 노 대통령의 의중이 YS에게 있음을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노 대통령과 독대를 마친 나는 곧바로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로 가 YS를 만났다. 며칠 전 청구동을 찾아온 최형우 장관과 약속한 극비 만남이었다. 그때 기자들은 청구동 집에 몰려가 내가 청와대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YS는 나를 보자마자 “노 대통령이 뭐라고 하던가요.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라며 급하게 물었다.
나는 노 대통령과 나눈 얘기를 설명해 줬다. YS는 다시 나에게 지지를 부탁했다. 나는 “3당 합당 정신에 따라 김 대표를 적극 밀어드리겠습니다. 대신 대통령이 되면 박정희 대통령을 더는 미워하지 말아 주십시오. 박 대통령에게 받은 고통은 내가 다 씻어 주겠습니다”고 말했다. YS는 날듯이 기뻐하며 고마워했다. 그는 “이제 경선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정치생명도 같이합시다. 내가 해드릴 게 없겠습니까”라고 덧붙였다. 나는 “대통령이 되시면 박정희기념관을 지어 주십시오. 그리고 총리를 당(민자당) 출신 가운데서 지명해 주십시오. 내각제적 국정 운영을 해달라는 말씀입니다”라고 요청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하며 “어떻게 약속하면 좋겠습니까” 하기에 “정치적 약속은 문서가 중요한 게 아니고 지키겠다는 굳은 신의가 필요합니다. 인격 대 인격으로 이야기합시다”고 답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니 기자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나는 하얏트 회동 내용을 비밀로 남겨둔 채 “당이 아니라 국가를 생각하고 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택할 것”이라고만 말했다.
민정계 박태준 최고위원은 노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오해했다. 내가 “노 대통령의 뜻은 YS에게 있다”고 일러 주자 “잘못 알고 계시다”며 반박했다. 그 때문인지 박 최고위원은 나에게 지지 요청을 하지 않았다. 그는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민자당 전당대회(92년 5월 19일)를 한 달도 안 남겨둔 시점에서 노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출마를 포기했다. 이종찬 의원도 나를 찾아와 자신을 밀어달라고 호소했다. 나는 그에게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며 우회적으로 입장 표시를 했다. 후보들이 나를 찾아와 지지를 요청한 것은 나의 정치적 상징성을 바탕으로 대세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종찬 의원이 박철언 의원을 필두로 한 반(反)YS 진영의 단일 후보로 경선에 나섰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김윤환 사무총장과 노 대통령의 동서인 금진호 의원을 앞세운 민정계 핵심 인물들이 YS를 지지하고 나섰다. 나는 이들을 중심으로 당내 계파를 뛰어넘어 구성된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 추대위원회’의 명예위원장을 맡았다. 이종찬 의원은 전당대회를 이틀 남겨두고 사퇴했다.
12월 대선까지 어려움은 그치지 않았다. 대통령의 사돈 기업인 선경이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선정되자 YS가 이를 비난하면서 대통령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얼마 뒤 노 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했다. 이어 박태준 최고위원이 당을 떠났고, 박철언 등 민정계 의원 10여 명의 탈당이 도미노처럼 일어났다. 나의 공화계로, 민자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김용환 의원도 탈당 대열에 합류했다.
나는 연쇄 탈당에 동요하지 말고 YS를 지지해 줄 것을 당 안팎에 호소했다. 추운 날씨에도 대선 전날까지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YS 지원 유세를 했다. 12월 18일 14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김영삼 후보가 997만 표를 얻어 김대중(804만 표)·정주영(388만 표) 후보를 제치고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YS가 서울과 호남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김대중 후보를 앞선 덕분이었다. 하지만 계파 간 갈등을 어렵게 봉합하고 이룬 대선 승리는 이후 또 다른 갈등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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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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