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시간여행] 돌아보는 이산가족 상봉의 순간들

Shawn Chase 2015. 9. 8. 17:28

 

입력 : 2015.09.08 14:16

사무치는 그리움 

이산가족 상봉과 이별, 그 순간들


 

 


 

이산가족의 역사는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비롯되었다. 3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많은 사상자와 고아들, 생이별한 가족들의 숫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후 정전이 되어 남북으로 뿔뿔히 흩어진 이산가족들은 고향에 두고 온 부모와 자식, 피난통에 헤어진 가족들을 마음으로만 그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하고 있는 KBS는 건물안팎으로 초만원이다.1983년 7월 6일 공개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외에도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자가 건물을 둘러쌌고 그곳에서 넘친 무수한 이산가족들이 광장을 헤맸다. 또 벽보들은 건물벽을 채우고도 남아, 광장의 벽보판을 하얗게 덮었다. 벽보들에 적힌 슬픈 사연들을 한차례 둘러보려면 하루 24시간도 부족했다.

1983년 한국방송 KBS는 '일천만 이산가족 상봉 캠페인'을 진행했다. 자신들의 헤어진 가족을 찾는 수백만명의 시청자들의 주목을 끌었지만, 안타깝게도 북조선은 이 캠페인에 참여하지 않아 대한민국에서만 진행됬다.

 

원래 95분으로 예정되었던 방송은 열화와 같은 시청자들의 성원에 453시간 45분으로 연장되었고, 109,000명의 등록자 중 10,000명의 가족들이 다시 만날 수있었다.

 

 

가족찾는 벽보가 KBS 현관앞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1983년 KBS의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은 4개월 이상 방영되며 1천만 이산가족과 전국민들을 울렸다.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공연 행사가 이루어졌다. 고향방문단을 이끌고 북으로 가는 대한적십자사 단원들(왼쪽) 판문각을 넘어 남으로 향하는 북측 고향방문단(오른쪽)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으로 역사적인 첫 상봉이 이루어졌다. 제8차 적십자 본회담(서울)에서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에 합의한 것이다. 당시 남측 35명과 북측 30명만이 가족을 만났다.

 

 

1985년 40년만에 처음만난 동생 홍연구씨를 다시 못볼 땅으로 돌려보내는 형님 홍연옥씨가 차창으로 동생의 손을 더듬고 있다.

 

1985년 북의 오빠 장우환씨는 여동생 순자씨를 끌어앉고 넋이 나간 듯 울음을 터뜨렸다.

 

1985년 지학순 주교가 누이동생 지용화씨와의 극적인 만남을 갖고있다.

 

2000년 5월 서울 남산 적십자 남북교류사무실을 찾은 실향민들이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신청서를 쓰고 있다.

2000년, 6ㆍ15 남북정상회담 결과가 발표된 '6ㆍ15 남북공동선언'에서 이산가족문제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로 합의했고, 이후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어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생사ㆍ주소 확인, 서신교환 등 시범적 사업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2000년 8월 역사적인 제1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이 성사되었다.

 

 

2000년 8월 16일 평남 남포에서 월남한 한 노인이 워커힐호텔 입구에서 `자신의부모형제를 죽기 전에 만나 사죄해야 한다`며 북측 방문단에게 호소하는 시위를 벌여 눈길을 끌었다.

 

2000년 8월 17일 마지막 개별상봉을 위해 워커힐 호텔로 떠나는 남측 이산가족들이 떠나는 버스속에서 취재진에 손을 흔들고있다.

 

2000년 8.15상봉 마지막날 이산가족들이 이별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2003년 9월 금강산 해금강 호텔에서 열린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99살의 최고령 김분이씨가 북측아들 강임석씨와 만나고 있다.

 

2003년 9월 2박3일간의 상봉을 마친 북측이산가족들이 버스를 타고 출발하자 남측가족들이 버스에 매달려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2005년 8월 금강산 삼일포에서 열린 '제11차 이산가족 상봉' 둘째 날 만남에서 한 상봉가족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28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 1차 행사는 남측 148명(동반가족 포함)이 북측의 가족을 만났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16차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고, 4차의 이산가족 화상상봉이 있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후 북한의 개방을 요구하는 강경한 대북정책으로 북한이 반발하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고 상봉이 없었다.

 

2009년 추석을 앞두고 제17차 남북 이산가족 1차 상봉이 열린 금강산면회소에서 형 리쾌석씨와 동생 이정호씨가 환한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실종된 형을 찾기 위해 12년간 군 생활을 한 동생 이정호씨와 국군포로가 된 형 이쾌석씨가 꿈에 그리던 형재상봉을 했다. 이 때 남북이산가족 야외상봉은 남북의 협의로 취소 됐으며 금강산면회소에서 상봉을 열었다.


제18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2차 방문 마지막 날인 2010년 11월 5일 금강산호텔에서 작별 상봉을 마친 가족들이 버스 창문을 열고 손을 잡으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2009년부터 2010년 17,18차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 되었다.

 

 

2013년 일천만 이산가족위원회의 주최로 서울시 프레스센터 앞에서 세종로 정부청사 앞까지 행진하는 '이산가족 상봉 연기 대북 규탄대회'가 열렸다.

2013년 이산 가족 상봉을 하려고 하였으나 금강산의 문제 때문에 무기한 연기 되었고, 이산가족 상봉 재개 촉구하는 대북 규탄대회가 잇따랐다.

 

 

2014년 2월 설 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 1차 마지막날,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금강산호텔에서 작별상봉을 마친 남측가족들이 버스에 탑승한 채 북측 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2014년 1월 북한의 중대발표 '남북한의 비방중지'로 화해 모드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것을 조건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 하였고,  2014년까지 19차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1983년 7월 9일 '이산가족찾기'에서 우선 눈길을 끌어야했다. 그래야 가족을 빨리 찾을 수 있기때문이다. 눈길을 끌기위한 각종 아이디어가 만발한 가운데 성명미상의 어머니와 이성옥이란 이름의 여동생을 찾고 있는 이성호씨는 마네킹까지 동원했다.

입력 : 2015.09.08 14:16

사무치는 그리움 

이산가족 상봉과 이별, 그 순간들

 

이산가족의 역사는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비롯되었다. 3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많은 사상자와 고아들, 생이별한 가족들의 숫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후 정전이 되어 남북으로 뿔뿔히 흩어진 이산가족들은 고향에 두고 온 부모와 자식, 피난통에 헤어진 가족들을 마음으로만 그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하고 있는 KBS는 건물안팎으로 초만원이다.1983년 7월 6일 공개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외에도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자가 건물을 둘러쌌고 그곳에서 넘친 무수한 이산가족들이 광장을 헤맸다. 또 벽보들은 건물벽을 채우고도 남아, 광장의 벽보판을 하얗게 덮었다. 벽보들에 적힌 슬픈 사연들을 한차례 둘러보려면 하루 24시간도 부족했다.

1983년 한국방송 KBS는 '일천만 이산가족 상봉 캠페인'을 진행했다. 자신들의 헤어진 가족을 찾는 수백만명의 시청자들의 주목을 끌었지만, 안타깝게도 북조선은 이 캠페인에 참여하지 않아 대한민국에서만 진행됬다.

 

원래 95분으로 예정되었던 방송은 열화와 같은 시청자들의 성원에 453시간 45분으로 연장되었고, 109,000명의 등록자 중 10,000명의 가족들이 다시 만날 수있었다.

 

 

가족찾는 벽보가 KBS 현관앞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1983년 KBS의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은 4개월 이상 방영되며 1천만 이산가족과 전국민들을 울렸다.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공연 행사가 이루어졌다. 고향방문단을 이끌고 북으로 가는 대한적십자사 단원들(왼쪽) 판문각을 넘어 남으로 향하는 북측 고향방문단(오른쪽)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으로 역사적인 첫 상봉이 이루어졌다. 제8차 적십자 본회담(서울)에서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에 합의한 것이다. 당시 남측 35명과 북측 30명만이 가족을 만났다.

 

 

1985년 40년만에 처음만난 동생 홍연구씨를 다시 못볼 땅으로 돌려보내는 형님 홍연옥씨가 차창으로 동생의 손을 더듬고 있다.

 

1985년 북의 오빠 장우환씨는 여동생 순자씨를 끌어앉고 넋이 나간 듯 울음을 터뜨렸다.

 

1985년 지학순 주교가 누이동생 지용화씨와의 극적인 만남을 갖고있다.

 

2000년 5월 서울 남산 적십자 남북교류사무실을 찾은 실향민들이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신청서를 쓰고 있다.

2000년, 6ㆍ15 남북정상회담 결과가 발표된 '6ㆍ15 남북공동선언'에서 이산가족문제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로 합의했고, 이후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되어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생사ㆍ주소 확인, 서신교환 등 시범적 사업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2000년 8월 역사적인 제1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이 성사되었다.

 

 

2000년 8월 16일 평남 남포에서 월남한 한 노인이 워커힐호텔 입구에서 `자신의부모형제를 죽기 전에 만나 사죄해야 한다`며 북측 방문단에게 호소하는 시위를 벌여 눈길을 끌었다.

 

2000년 8월 17일 마지막 개별상봉을 위해 워커힐 호텔로 떠나는 남측 이산가족들이 떠나는 버스속에서 취재진에 손을 흔들고있다.

 

2000년 8.15상봉 마지막날 이산가족들이 이별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2003년 9월 금강산 해금강 호텔에서 열린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99살의 최고령 김분이씨가 북측아들 강임석씨와 만나고 있다.

 

2003년 9월 2박3일간의 상봉을 마친 북측이산가족들이 버스를 타고 출발하자 남측가족들이 버스에 매달려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2005년 8월 금강산 삼일포에서 열린 '제11차 이산가족 상봉' 둘째 날 만남에서 한 상봉가족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28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 1차 행사는 남측 148명(동반가족 포함)이 북측의 가족을 만났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16차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고, 4차의 이산가족 화상상봉이 있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후 북한의 개방을 요구하는 강경한 대북정책으로 북한이 반발하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었고 상봉이 없었다.

 

2009년 추석을 앞두고 제17차 남북 이산가족 1차 상봉이 열린 금강산면회소에서 형 리쾌석씨와 동생 이정호씨가 환한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실종된 형을 찾기 위해 12년간 군 생활을 한 동생 이정호씨와 국군포로가 된 형 이쾌석씨가 꿈에 그리던 형재상봉을 했다. 이 때 남북이산가족 야외상봉은 남북의 협의로 취소 됐으며 금강산면회소에서 상봉을 열었다.


제18차 이산가족 상봉행사 2차 방문 마지막 날인 2010년 11월 5일 금강산호텔에서 작별 상봉을 마친 가족들이 버스 창문을 열고 손을 잡으며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2009년부터 2010년 17,18차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 되었다.

 

 

2013년 일천만 이산가족위원회의 주최로 서울시 프레스센터 앞에서 세종로 정부청사 앞까지 행진하는 '이산가족 상봉 연기 대북 규탄대회'가 열렸다.

2013년 이산 가족 상봉을 하려고 하였으나 금강산의 문제 때문에 무기한 연기 되었고, 이산가족 상봉 재개 촉구하는 대북 규탄대회가 잇따랐다.

 

 

2014년 2월 설 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 1차 마지막날,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금강산호텔에서 작별상봉을 마친 남측가족들이 버스에 탑승한 채 북측 가족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2014년 1월 북한의 중대발표 '남북한의 비방중지'로 화해 모드에 돌입했다. 그리고 그것을 조건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 하였고,  2014년까지 19차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