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여행

[Why] 젊음과 죽음 사이, 나이 듦

Shawn Chase 2017. 8. 27. 13:42


입력 : 2017.08.26 03:02

[그 작품 그 도시]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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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에서 주인공 마리아의 마음은 평화로운 스위스 남동쪽 실스 마리아 풍경과 달리 수천 번 요동친다. 20년 전 젊고 매력적인 여비서 역할로 세계적 스타가 됐지만 같은 원작의 연극에 출연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엔 늙고 초라하고 무기력한 중년의 상사 역할이다. 마리아가 연극과 실생활 사이의 혼돈과 젊음에 대한 욕망으로 갈등하는 모습을 비추며 감독은 말한다. “성숙하게 나이 들어가는 건 누구에게든 미숙한 것”이라고. /플리커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의 주인공 마리아 엔더스는 중년 상사 헬레나를 유혹해 자살로 몰고 가는 젊고 매력적인 비서 시그리드 역으로 세계적 스타가 됐다. 20년 후, 그녀는 자신을 최고 스타로 만들어준 빌렘 감독의 '말로야 스네이크' 연극 리메이크 출연을 제안받는다. 문제는 그녀의 역할이 유혹자 시그리드가 아닌 자살한 헬레나라는 것. 망설이는 그녀를 설득하는 건 비서 발렌틴이다. 목적을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 잔인한 시그리드보다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적 헬레나가 더 훌륭한 캐릭터라는 것이다.

시그리드의 사랑을 갈구하다가 결국 목숨까지 끊는 헬레나. 마리아가 생각하기에 늙고 초라하고 무기력한 헬레나를 연기한다는 건 자신의 늙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젊고 능력 있는 감독은 그녀를 설득하며 이렇게 말한다. 시그리드의 20년 후가 바로 헬레나라는 것. 배우로서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이다. 출연을 결정한 후, 문제는 점점 더 꼬여간다. 새로운 시그리드로 발탁된 배우가 할리우드의 악동으로 소문난 조앤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애들을 이해할 수 없는 마리아로선 비서 발렌틴의 조언도 점점 귀에 거슬린다. 이 영화의 시작이 과거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준 감독 빌렘의 죽음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사인은 심장마비.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선 자살로 의심되는 그의 죽음 앞에서 마리아는 회한에 빠진다. 그녀가 부고를 접한 건 발렌틴과 스위스로 가던 기차 안. 감독을 대신해 상을 받으러 가는 길이었다. 원작 감독의 죽음으로 '말로야 스네이크'의 리메이크 소식은 더 큰 화제에 오른다.

결국 마리아는 빌렘 감독이 머물던 실스 마리아의 별장에서 대본 연습을 결심한다. 실스 마리아는 스위스 남동쪽 알프스 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로, 영화는 그곳의 구름을 느리고 빠른 교차 편집으로 하염없이 보여준다. 연극 제목인 '말로야 스네이크' 역시 실스 마리아의 말로야 계곡에서 볼 수 있는 구름 모양이 뱀을 닮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었다. 구름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영화는 이 모습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마치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이 기묘한 구름 안에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마리아와 비서 발렌틴은 실스 마리아의 집에 남게 된다. 마치 젊은 시그리드와 늙은 발렌틴이 함께 머무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진다. 설상가상 대본 연습을 도와주게 된 발렌틴이 시그리드의 대사를 무미건조하게 읽을 때, 그녀의 뒤에는 시그리드의 영혼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본에 몰입할수록 마리아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진다. 자신이 가진 사회적 명성과 돈이 젊음 자체를 되돌리진 못 한다는 걸 알고 있는 탓이다. 다 가진 사람이 끝내 욕망하게 되는 건 젊음 자체인 걸까.

별수 없이 필립 로스와 존 쿠시의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을 떠올렸다. '상습 외도범'이란 말이 가능하다면, 그들의 아내로선 붙여볼 만한 죄명이다. 소설 제목 역시 각각 '전락'과 '추락'으로 의도하는 바가 명확하다. 계속해서 올라갔던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이들의 추락이 말로이 계곡만큼이나 깊은 건, 이들이 올라갔던 높이 때문이다. 그들의 파국에는 물론 여자가 있다. 정확히 말해 '젊고 아름다운 여자' 말이다. 소설 '전락'의 주인공은 한때 자신을 흠모하던 여자에게서 버림받는다. 그것이 예상보다 짧든 길든 한참 후가 되든 중요하지 않다. 그는 매달려야 할지 울어야 할지 보내야 할지 몰라 결국 입을 다물게 된다.

"그가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어떤 역을 연기하는 역할뿐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연기하는 제정신인 사람, 상심한 사람을 연기하는 안정적인 사람, 자제력을 잃은 사람을 연기하는 자제력 있는 사람…. 그리고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살에 대한 게 전부였지만 그것을 흉내 내지는 않았다. 죽고 싶어 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살고 싶은 남자였으니까."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를 본 후, 기이할 정도로 필립 로스의 소설 '전락'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이들은 모두 직업이 배우다. 남자 주인공 사이먼 액슬러는 190센티가 넘는 거구의 정력가로 미국 연극계의 전설적 스타였다. 문제는 65세 전까지 단 한 번도 무대에서 실패하지 않은 배우였던 그가 더 이상 자신이 연기할 수 없다고 느낀 순간이다. 그 순간은 우연히 찾아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수십 년간 오직 연기만 했는데, 한순간 연기의 기술을 잃어버리는 게 대체 가능하기는 한 건가. 필립 로스의 말을 빌리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진실에 더 가까운 말일지 모른다. 종잡을 수 없음이 지닌 무한한 힘, 반전 가능성, 예측 불가한 반전과 그것이 지닌 위력. 이것이 나이 든 소설가가 말하는 진짜 삶이니까.

내게 영화 속 마리아는 사이먼의 여성 버전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사이먼이 마리아보다 조금 더 오래 성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남자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젊음 앞에서 승리할 수 있는 노인은 없다. 55세가 되면 유전자는 신체 항상성 유지를 포기한다. 종족 번식의 임무가 끝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생식의 관점에서 적나라한 표현법을 사용한다면 55세 이후의 몸은 폐기물에 가깝다. 어쩌면 이때부터 인생의 진짜 경쟁이 시작된다. 성공을 약속했던 과거의 스펙이나 조건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야 우리는 겨우 삶의 절정과 성공을 가늠해볼 수 있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

사랑에 대한 오래된 오해가 하나 있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하는 건 아니다.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 버리는 경험과 버림받는 경험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나이듦은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역할을 강제로 떠맡는 것과 같다. 마리아는 자신이 얼마만큼 발렌틴에게 의지하고 있는지 '안다'. 경험이 준 지혜일 것이다. 그러므로 떠나는 건 발렌틴이다. 마리아를 버리는 것 역시 그녀다. 돌연해 보이는 이들의 결별이 내게 예정된 절차처럼 느껴진 건, 우리의 진짜 삶과 달리 내가 이 영화를 완결된 '책'처럼 느껴서일 거다. 마리아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그 순간까지도 자기 역할에 대해 고뇌한다. 과연 이 연기를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 심과 회한을 떨치지 못한다. 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삶은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실스 마리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는 더 있다. 니체가 주요 저서를 집필한 장소가 바로 이곳, 실스 마리아였다. 그 역시 뱀 같은 구름 속을 매일 산책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삶에 대해 질문하면서.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 -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작품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5/20170825019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