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여행

[해외기행/아프리카(2)] 피비린내와 대자연의 아름다움 공존

Shawn Chase 2016. 10. 1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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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6.23 14:23 | 수정 : 2006.06.23 14:23 [440호] 2006.06

르완다 키갈리 & 탄자니아 킬리만자로~다르에스살람 여행
킬리만자로에 올라 킬리만자로를 마시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저만치 골목 막다른 곳에, 누런 시멘트 부대 종이를 흰 실로 얼기설기 문살에 얽어 맨 철호네 집 방문이 보였다. 철호는 때에 절어서 마치 가죽끈처럼 된 헝겊이 달린 문걸쇠를 잡아당겼다. 손가락이라도 드나들 만치 엉성한 문이면서 찌걱찌걱 집혀서 잘 열리지를 않았다.’

한국전쟁 후 소시민들의 처참한 삶을 그린 이범선의 단편소설 ‘오발탄’(1956년 작) 중 주인공 철호와 그의 다섯 식구가 사는 해방촌의 풍경을 묘사한 대목이다. 한국전쟁 후 우리네 모습은 정말 이리도 참담했을까? 내가 태어나기도 20여 년 전의 일이라 가늠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르완다의 현재 모습은 ‘오발탄’에서 그려낸 전쟁 후 해방촌 모습 그대로였다.

키부 호수(Kivu L.)를 비롯한 아름다운 호수와 해발 3,000~4,000m급의 수려한 산이 넘실거리는 르완다는 그 커다란 아름다움만큼이나 큰 골육상잔의 비극을 겪어야했다. 그래서일까? 르완다 사람들의 선한 눈망울 속엔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덩이가 하나씩 자리 잡고 있었다.

우간다의 국경도시 카발레(Kabale)에서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Kigali)까지는 고작 2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웠다. 키갈리의 모습은 동아프리카 다른 나라의 수도와는 사뭇 달랐다. 최대 번화가의 건물들은 대개 단층 내지 높아야 3층 안팎으로 야트막했다. 오후 2시 캄팔라(Kampala)의 싱그러움과 새벽 2시 나이로비(Nairobi)의 휘황찬란함은 키갈리 그 어디에도 없었다. 키갈리의 풍경은 마치 활력을 잃은 정물과도 같았다.

불과 10여 전에 벌어진 끔직한 사건이 이 도시의 정열을 무참히도 지워버린 것이리라.
키갈리에서 내가 머문 곳은 한국의 아동구호단체가 숙소 겸 사무실로 쓰고 있는 곳이었다. 케냐에서 맺은 인연으로 르완다에 도착했을 때 인사차 들른다는 것이 며칠 신세를 지게 됐다. 정적(靜的)이던 키갈리에서의 일정에 동적(動的)인 사건이 터진 것은 현지 교민의 차를 얻어 타고 키갈리 외곽 지역으로 나선 체류 셋째 날이었다.

육중한 몸집의 랜드로버를 끌고 황톳길의 흙먼지를 비상(飛上)시키며 달려나가는데 전방 삼거리에서 오토바이 하나가 느닷없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순간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차는 미끄러져 오토바이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오토바이 운전수는 내 눈 앞에서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m 가까이 내동댕이쳐졌다. 나 역시 급정차로 대시보드에 머리를 찧어 머리통이 욱신거렸지만 내 몸 하나 성한지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오토바이 운전수는 살아있을까? 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하는 생각에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80만 학살

비척거리며 차에서 내려 굳어 있는 오토바이 운전수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다행히도 그는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조촘거리며 일어나고 있었다. 일단 큰 부상은 아닌 듯싶어 폐부 깊숙이 빨아들인 숨을 훅- 하고 크게 내뱉었다. 뒤이어 사고처리를 하려는데 군중의 무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현지 주민들이 우리 일행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호의적일 리는 없었다.

‘당신네 이방인들의 횡포가 우리나라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뻔했다’는 묘한 피해의식과 드센 적개심을 그들의 눈빛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수군덕대는 소리는 점차 커졌고, 그들은 조금씩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민들을 진정시켜 보려고 입에 맞지도 않는 불어로 ‘죄송합니다’를 연발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는 일단 차 안으로 들어가 똬리를 틀고 앉았다. 창밖으론 그들의 그악스런 눈초리만이 사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하고 경찰이 도착하기까지 10여 분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이러다 주민들이 차라도 뒤엎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슬며시 들었다. 결국 그런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고 잘 마무리됐지만, 한국식으로 사고지점에서 잘잘못을 가려가며 언성을 높이기라도 했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 날의 사고 이후 파란만장한 나의 이력(?)을 아는 이들은 나에게 아프리카에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고 축하 아닌 축하를 건넸다. 테니스나 골프를 친 것도 아닌데 웬 그랜드슬램? 설명을 듣고 보니 그랜드슬램이란 다름 아닌 말라리라, 권총강도, 교통사고의 삼재(三災)를 경험한 것을 의미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달성했다고는 하니 고약한 승리감으로 귓불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 날 밤 잠에서 깨어 창밖을 내다보니 도시는 희붐한 어둠 속에 여전히 정물처럼 갇힌 채 저만치 아래 빈민가에서 새나오는 호롱불에 위태로이 의지해 있을 뿐이었다.

사고 이후 몸이 찌뿌드드한 것이 쉬 피로해졌고, 뒤척이다 잠이 들면 내의를 흠뻑 적실 정도로 식은땀을 흘렸다.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이라고만 하기엔 뭔가 부족했고, 그렇다고 키갈리의 음산한 기운 탓이라고 하기엔 너무 지나친 생각인 듯했다.

아프리카가 지닌 난제 중 하나는 종족간의 갈등이다. 요즘 연일 보도되고 있는 21세기 최악의 인종학살이라는 수단 다르푸르 사태 역시 종족간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족간 갈등은 12년 전 르완다 인종청소의 발단이기도 했다. 지난 94년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후투족(Hutus)과 소수지만 벨기에 식민통치 시절 지배층을 형성했던 투치족(Tutsis)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서로 죽고 죽이던 비극 속에서 르완다 사태가 악화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 해 4월6일에 일어났다. 후투족 출신 대통령이 비행기 폭파로 암살되면서 후투족은 이에 투치족이 개입한 것으로 간주하고 투치족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감행했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최악의 인종학살인 르완다 대학살의 시작이었다.

키갈리 도심에 자리 잡은 제노사이드 박물관에선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담은 영상자료를 볼 수 있다. 대통령을 잃은 후투족들은 그 울분을 투치족들에게 폭발시켰다. 투치족의 씨를 말리기 위해 어린 아이도 서슴지 않고 학살했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듯 자신과 다른 부족 사람들을 칼로 찌르고, 곡괭이로 내리찍고, 몽둥이로 후려치고, 도끼로 패고, 갈고리로 후벼팠다.

인터뷰 자료에 따르면 한 마을에서 벌써 몇 대째 해사한 낯빛을 주고받던 사이좋은 이웃들끼리도 광기에 휩싸여 서로를 불신하고 손에 총칼을 쥐었다고 한다. 늘 너털웃음을 짓던 단골 구멍가게의 털보 아저씨도 한순간에 폭도로 변해버렸고, 마주할 때마다 농을 걸던 인상 좋은 푸줏간 아저씨도 고기 썰던 칼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처참했던 대학살은 투치족 반군이 후투족을 격퇴하기까지 계속됐고, 그때까지 94년 4월부터 불과 석 달 동안 80만 명의 민중이 그저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죽어갔다. 황톳길의 좁은 거리엔 송장 썩는 비리척지근한 냄새가 진동했고, 빅토리아 호수는 수장(水葬)당한 주검들로 차고 넘쳤다. 박물관은 희생자들의 사진을 걸어 넣고 죽음을 애도하는 기념관, 사건 당시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영상 자료실, 희생자들의 유골을 모아놓은 곳 등으로 이루어져 당시 르완다의 끔찍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박물관을 다녀온 그 날 밤, 무언가에 쫓기는 꿈을 꾸다 깼는데 온몸에 식은땀이 몽글몽글 맺혀 초주검이 돼 있었다. 가뜩이나 뿌드드하던 몸은 입맛도 잃어버리고, 그 때부터 잠을 자면 계속해서 악몽을 꿔대는 통에 날이 갈수록 얼굴은 파리해져만 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토박한 황톳길의 투박한 공기 속에서 비치근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듯했다. 결국 무언가에 쫓기듯 키갈리를 떠나 국경마을 루수모(Lusumo)를 거쳐 탄자니아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찍이 헤밍웨이 할아버지와 용필이형은 노래했다.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고. 바로 그 킬리만자로(Kilimanjaro Mt.)가 있는 탄자니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나라가 아닐까 싶다.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다. 1912년 이후 만년설은 이미 82.2%나 사라졌으며, 지금과 같은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15년 후에는 그 유명한 킬리만자로의 눈자락을 더 이상은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잠깐 상식 하나! 어째서 그 뜨거운 아프리카에 만년설이 존재할까? 바로 100m씩 고도가 높아질 때마다 온도는 0.65℃씩 내려가기 때문이다. 킬리만자로는 5,895m로 탄자니아의 평균 해발고도(1,000m) 지역에 비해 32℃ 가량 낮다. 그리하여 킬리만자로에는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만년설이 있을 수 있고, 케냐의 나이로비와 같은 고지대는 전혀 아프리카답지 않은 한국의 가을 날씨처럼 선선한 기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됐건 우여곡절 끝에 탄자니아에 첫발을 내디뎠다. 기분 탓인지 르완다에 머물 때보다 몸이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음완자(Mwanza)를 지나 24시간을 버스로 쉬지 않고 내달리며 세렝게티(Serengeti National Park)를 가로질러 아루샤(Arusha)에 닿았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아루샤에서 다시 차를 갈아타고는 드디어 킬리만자로가 있는 모시(Moshi)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드디어 킬리만자로로 향했다. 배낭엔 입산금지품목을 가득 담고서.

킬리만자로와의 조우는 용필이형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노래 가사를 표절이라도 한 듯 어슷비슷하게 이루어졌다. 킬리만자로 등반은 코스와 등산객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개 4박5일 정도가 소요된다. 국립공원 입구가 이미 해발 1,970m이어서 4,000m만 고도를 올리면 정상이었지만, 워낙 고도가 높은 탓에 서두르면 고산병에 걸릴 수도 있어 하루에 고도를 많이 올릴 수는 없었다. 내가 택한 코스는 마랑구 루트(Marangu Route)로 비교적 무난한 코스였다.

국립공원 관리소에서 출발해 만다라 산장(Mandara Hut·2,700m), 호롬보 산장(Horhombo Hut·3,720m), 키보 산장(Kibo Hut·4,703m)에서 하룻밤씩 머무르며 킬리만자로와 호흡을 함께했다. 이제 정상까지는 약 7시간 거리의 산행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난 킬리만자로 정상 우후루(Uhuru Peak)를 밟아볼 수는 없었다. 대신 키보 산장에서 시름시름 앓으며 하루를 죽은 듯이 잠만 자다 내려오게 됐다.

고산병 때문이 아니냐고? 그게 아니라 이게 다 배낭에 품고 갔던 금지품목 탓이다. 배낭 속에 신주단지 모시듯 행여나 깨질까 수건으로 칭칭 치감아 둔 그 금지품목이란 무엇이었을까? 힌트는 다음과 같다. ‘산행 중에는 고산병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술, 담배는 금지되어 있다.’ 그렇다. 내가 모신 신주단지란 바로 보드카 한 병과 킬리만자로 맥주 두 병이었다. 고단한 산행을 마치고 별빛 스멀거리는 밤에 술 한 잔 꿀꺽하는 기분이란. 불어오는 바람에 찌르르한 오한이 뒷목 뼈를 타고 기어올랐고, 독한 알코올 기운에 목구멍은 홧홧하게 타올랐다. 용필이형 말마따나 ‘나는 사랑한다.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있는 내 청춘에 건배!’

결국 밤을 꼬박 지새우며 킬리만자로와 대작(對酌)하다 보니 새벽 일찍 일어나 우후루로 향해야 하는데 죽은 듯 잠만 잘 수밖에.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는 배앓이를 해가며, 어이없어하는 가이드를 달래가며 하산할 수밖에. 킬리만자로 정상등반 증명서 한 장을 술 한 잔, 아니 술 석 병의 운치와 바꾼 셈인데, 이 정도면 남는 장사가 아니었을까? 킬리만자로에서 킬리만자로를 마시고 킬리만자로를 내려오며 음유시인이라도 된 듯 노래하기 시작했다.

구름인가 눈인가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면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물론 쓰린 배를 움켜쥐고서 말이다.

다르에스살람서 쿵푸 시범을 보이다!

킬리만자로를 뒤로하고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에스살람(Dar-es-salaam)으로 향했다. 새벽녘에 출발한 버스는 한낮의 태양이 아스팔트를 녹일 때가 되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만원버스에서 땀을 한 바가지는 흘렸는지 시큼한 땀내는 김처럼 피어올랐고, 버스 문이 열리자마자 제일 먼저 그곳에서 도망쳤다. 그런데 이건 웬걸. 버스 안이 찜통이었다면 버스 밖은 불판이었다. 차라리 푹푹 찌는 버스간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다르에스살람은 인도양의 들끓는 열기와 소금기 가득 실린 끈적끈적한 바람을 연방 불어대며 늘어선 야자수와 내 머리를 따갑게 휘감았다.

다르에스살람에는 나이로비의 화려함도, 캄팔라의 섬세함도 없었다. 그렇다고 키갈리와 같은 앙상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독특한 향신료 마냥 맵싸하고 혼곤한 그 분위기는 필설로는 다 담지 못할 것이다. 다르에스살람은 아랍풍의 도시답게 도시 이름마저도 아랍어로 ‘평화로운 안식처’를 의미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에는 왜 그리도 사건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지. 그리 평화롭지만은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킬리만자로산(産) 속앓이가 가신 지는 오래지만 해장술이란 허울 아래 클럽을 찾았다. 현지 음악을 들으며 맥주 두어 병을 비우고 밖으로 나서는데 클럽 입구에서 현지인 3명과 맞닥뜨렸다.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 단어는 차이니즈밖에 없었고, 그들 말로 꽤나 억센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시비를 걸어오는 모양이었다. 처음엔 그냥 달아나려 했는데 말이 좀 길어지다 보니 구경꾼이 제법 모이게 됐고, 그러다 보니 자존심이 상해 도무지 내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하고 잔머리를 한껏 굴리다가 케냐 체류 시절 들은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아프리카인들은 성룡 영화를 무척 좋아해서 예전 비디오테이프까지 구해서 보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동양인들을 다들 쿵푸의 고수인 줄 알아. 자세만 조금 잡아도 덜덜 떨지’라는 얘기가 떠올랐다. 더 이상 다른 수는 없다는 생각에 배수진을 치고 용기를 내어 우선 콧방귀를 한 번 뀌었다. 분위기 전환용이다. 내처 성룡처럼, 이소룡처럼 엄지손가락으로 코를 한번 튕기고는 양어깨를 들썩거리며 학다리 자세를 잡았다. 기선 제압용이다.

상대는 겁먹은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꿍뿌! 꿍뿌!”를 외치고는 악수를 청해왔다. 코를 튕김과 동시에 ‘아됴오~’하는 소리도 낼까 말까 고심하다 말았는데 이렇게 반응이 좋은 걸 보니 그 소리도 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탄자니아에는 성룡 얼굴이 그려진 우표가 있을 정도로 성룡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런 그들 앞에서 동양에서 온 젊은이 하나가 성룡 흉내를 냈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반가울 수밖에.

성룡 사건 이후 위풍당당하게 다르에스살람에서 사나흘을 더 머물며 시내를 찬찬히 둘러보고, 드디어 인도양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잔지바르(Zanzibar)와 코모로 제도(Comoros)를 거쳐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로 향할 예정이다. 나의 쿵푸 영화 촬영에 기꺼이 협조해준 다르에스살람의 엑스트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잔지바르로 향하는 커다란 고철 덩어리에 몸을 실었다.

사실 탄자니아의 정식 국가명은 탄자니아연방공화국으로 탕가니카(Tanganyika)와 잔지바르 두 국가가 64년 합병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두 지역은 아직도 각각의 주권을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다. 일례로 잔지바르에 닿으면 세관 검사도 따로 하고, 여권에 입국 스탬프도 쿵 하고 따로 찍어줄 정도다. 잔지바르 섬은 오랫동안 아랍의 술탄이 통치하던 곳이어서 아직도 섬 인구의 95%가 무슬림일 정도로 이슬람권의 영향이 크게 남아 있다.

19세기 중반 오만의 지배를 받을 당시 잔지바르는 동부 아프리카 최고의 노예 무역항으로 유명했다. 근래에는 원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해변과 수상스포츠 등으로 유럽 관광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또한 잔지바르는 락그룹 퀸(Queen)의 프레디 머큐리가 출생한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하니 이래저래 여러 모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섬임에는 분명하다.

잔지바르에 닿자마자 반가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항구 한 켠에 자리 잡은 거대 상선의 측면에 새겨진 '소나무'라는 글자였다.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 우리나라의 무역선을 만나는구나 싶어 가슴이 뛰었는데, 가만 보니 태극기가 아니라 인공기가 불그죽죽히 펄럭이고 있었다. 탄자니아는 1980년대 후반까지 사회주의 체제를 택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북한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 탄자니아에서는 종종 북한 선박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시선을 반대로 돌리니 다음으로 눈에 띈 것은 거리 곳곳의 모스크였다. 마침 종교의식이 있는 시간대여서 기웃거리며 밖에서 구경하고 있는데, 현지인 한 명이 소리 없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살라말리쿰"(이슬람권의 인사말로 알라의 평화가 함께하길 바란다는 뜻)으로 운을 떼더니만 제법 유창한 영어로 말을 바꾸었다.

"무슬림이신가요? 원하신다면 예배에 참석하셔도 좋습니다."  

살라말리쿰! 잔지바르

아무래도 제멋대로 치렁치렁 기른 수염 탓에 무슬림으로 오해한 듯했다. 무슬림은 아니지만 이참에 좋은 경험을 해볼 수도 있겠다 싶어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은 채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모스크 안으로 들어섰다. 여남은 사람이 모인 작은 모스크는 천장이 높아서인지 생각보다 횅댕그렁한 분위기였다.

모스크 한쪽 귀퉁이에는 커튼으로 둘러쳐진 공간이 있었다. 화장실인가 싶어 발걸음을 옮겼더니 그곳은 여자들을 위한 기도 공간이라며 방금 전의 남자가 나를 막아섰다. 여태껏 여자들은 모스크에 들어갈 수 없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생리 중일 때를 제외하고는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여자들이 있으면 남자들이 기도를 드릴 때 딴 생각(?)을 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에서 여자들은 기도를 드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다르에스살람이 아랍풍의 도시였다면 잔지바르는 완연한 아랍의 도시였다. 윤기 나는 초콜릿색 피부의 아리따운 현지 아가씨들은 세헤라자데처럼 천 하루 동안 신비한 이야기들을 전해줄 것만 같았다. 해질 녘 잔지바르의 바닷가는 아라비안 나이트를 연상케 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어느덧 해는 떨어져 바다 속으로 무겁게 가라앉았고, 분홍빛 어스름이 해를 대신하여 수평선 위로 여트막하게 떠올랐다. 해변의 아이들은 맨발로 다 떨어진 낡은 공을 차고 있었다. 앙증맞은 아이의 발을 떠난 공은 이내 비상하여 일순간 석양을 한 몸에 받고 옅게 희번덕거렸다. 눈이 부셨다.

시선을 거둔 후에도 망막에 아로새겨진 작은 반점은 온 세상에 가무대대한 얼루기를 만들어냈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함께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이따금씩 귓속에 울려 퍼졌다. 바닷가에 찰싹 달라붙은 레스토랑에서는 외국 관광객들이 찢어질 듯한 재즈 연주와 함께 맥주 한 모금을 타들어가는 목구멍으로 흘러 보내고 있었고, 그 옆으론 수백 년의 아랍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올드스톤 타운의 3층 건물들이 시나몬(계피)색의 그림자를 거둬들이고 있었다.

한중망(閑中忙) 속 망중한(忙中閑)을 만끽하며 그 후로 며칠을 더 아프리카 최고의 미항 잔지바르에서 보냈다. 조금 더 머물까도 했지만, 인도양 너머의 옥빛 포말이 던지는 달곰한 추파를 견뎌내지 못하고 풀었던 짐을 다시 꾸리기 시작했다. 이제 인도양 저편의 코모로 제도로 가는 배편을 알아볼 참이다.<계속>

글·사진= 이연대 국민대 산림자원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