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어이, 코딱지들! 기다려줘서 고마워"

Shawn Chase 2015. 9. 13. 15:00
  • 김가영 여성조선 기자
  • 사진 강현욱

  •  

    입력 : 2015.09.13 14:12

    지금의 2030세대에게 ‘종이접기 선생님’ 김영만은 특별한 추억이다. 우리를 ‘코딱지’라는 난데없는 호칭으로 부른 유일한 사람이고, 만난 적은 없지만 수백 번도 더 만난 것 같은 친근한 존재이기도 하니까.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방송에 나타났다.

    20년 만에 돌아온 ‘종이접기 아저씨’

    어린이 프로그램이 활황기이던 시절, 꼬마들 중에 김영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이 프로그램에서도 알짜배기 섹션을 담당한 그는 일명 ‘종이접기 선생님’으로 통했다. 색종이 한 장으로 무궁무진한 세계를 창조했고,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박수를 쳤다. 그런 그가 수십 년이 흘러 주름살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성인이 된 꼬마들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먼지 쌓인 어린 시절 추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김영만은 꼭 그때처럼 눈 깜짝할 사이 손바닥 위에 종이 장난감을 만들어 보였다.

    <마리텔> 출연 이후 강의 요청이 많이 늘었다면서요. 방송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그 이유가 뭘까요? 고생을 안 하면 추억도 생각이 안 나요. 근데 고생을 많이 하면 옛날 생각이 많이 나잖아요. 보니까 딱 그거야. 2030세대들이 IMF도 겪었고 여러 가지로 마음이 피폐해져 있는 거야. 근데 옛날에 TV에서 본 그 종이접기 김영만이가 나이 지긋이 들어서 나오니까 아빠 같고 삼촌 같고 이모부 같은 게 어우러진 것 아닌가 싶어요.

    이제 한 달 됐죠? 네티즌들이 실시간으로 댓글을 달고 그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마리텔>의 콘셉트가 이제는 좀 익숙한가요? 내가 그동안 종이접기를 안 하다가 방송을 했다면 적응하기 힘들었을 텐데, 계속 강의 다니면서 종이접기 가르치고 아이들을 만나고 하는 일의 일환으로 <마리텔>에 합류한 거예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다만 평소에 교사나 원장선생님, 아이들에게 종이접기를 가르칠 때는 이 정도로 큰 반응이 없는데, 어릴 때 이후로 종이접기를 안 했던 2030세대들 입장에서는 그게 감동이지 않았나 (생각해요).

    제작진이 댓글을 거르기도 하나요? 안 걸러요. 근데 저는 악플이 없었어요. 일단 나이가 있으니까 (빠른 속도로 올라오는 글들이 전부 다) 보이지도 않고요. 근데 더 오래 하면 악플이 올라오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오래 안 하려고요. 잠깐 하고 빠져야지, 뭐 좋다고 예능 프로에 종이 들고 나와서 끝까지 해요. 본래의 제 생활로 돌아가야죠.

    요즘은 유행이 과장 조금 보태서 분초 단위로 바뀌어요. 금방 빠져들고 금방 싫증내죠. 김영만 어록 만들어주고 뭐 어쩌고저쩌고 하는 게 딱 한 달이야. 더 이상 지속되는 건 저도 원하지 않아요. (지금은) 긍정적인 면만 생각하려고 해요. 2030세대들한테 종이접기 아저씨가 큰 감동을 줬다는 거 하나, 나는 그들로부터 더 큰 감동을 받았다는 거 하나. 우리 나이에 이런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어요? 드물죠.

    특히 와 닿은 감동적인 댓글이 있을까요? 첫 녹화 때는 ‘고맙다’는 댓글이 많았어요. 그다음 ‘울컥울컥’이라는 댓글, ‘종이접기 하니까 재밌어요’라는 댓글…. 한번은 색종이로 뭘 만들다가 노란색 종이로 눈을 만들었거든. 그걸 ‘황달’이라고 해서 내가 웃겨서 기겁을 했죠. 그리고 내가 못 알아보는 인터넷 용어는 안 올리더라고요. 뭐랄까, 나이 든 어른 대접을 많이 해줬어요.

    모처럼 종이접기를 홍보할 수 있는 기회도 됐어요. 사실 요즘 아이들은 예전처럼 종이접기하며 노는 세대가 아니잖아요. 우리는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때 손을 떼고 어린이 프로그램으로 넘어가야죠. 어린이 프로에서 다시 옛날처럼 종이접기를 활성화시키자는 각오예요. 이빨 빠질 때까지.(웃음) 실제로 모 어린이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기로 얘기도 됐고요.

    녹화 중 눈물을 흘린 게 화제가 됐죠. 당시 녹화를 마치고 편집을 부탁했다고 들었어요. 딴건 다 지워도 그건 넣겠대.(웃음) 근데 그때 스튜디오에 있던 감독, 작가, 스태프들 모두 다 감동을 받았어요. 여자 작가들도 다 울었고요. 감독 입장에선 그 장면을 꼭 넣고 싶었겠죠.

    방송 보고 기분이 어땠나요? 창피하지~. 이 나이에, 60이 넘어가지고 방송에서 펑펑은 아니지만 (울었잖아요).

    가족들 반응은요? 우리 가족들은 내가 TV에 나오는 걸 예전부터 봐왔기 때문에 별 반응이 없어요. 우리 아빠 또 나오네, 그냥 그거죠. 근데 걱정을 많이 했죠. (어린이 프로그램이 아닌) 예능이라는 것, 악플 때문에 아버지가 속상하진 않을까 하는 것 때문에요. 그래서 내가 ‘오래는 안 한다. 한 번 해보기는 하자’ 해서 한 거예요.


    잘나가던 그래픽디자이너, 종이접기로 어린이 프로를 장악하다

    김영만이 종이접기와 인연을 맺은 건 우연이었다. 사업을 준비하던 중 일본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친구의 아이를 유치원에 바래다주다 종이접기 수업을 목격한 게 계기가 됐다. 그전까지 “넥타이 매고 폼 잡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던” 번듯한 회사의 직장인은 종이접기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했다. 그 도전이 지금에까지 왔다.

    원래 대우실업 그래픽디자이너였죠. 어떻게 종이접기를 하게 됐나요? 대학 졸업하고 그래픽디자이너로 입사했어요. 그리고 5년 만에 과장 진급을 한 거야. 평사원으로 들어와서 3년 만에 대리가 되고 2년 만에 초고속 승진을 한 거죠. 워낙 실력이 좋아서.(웃음) 근데 과장이 되니까 밑에 있는 직원들만 일하고 저는 실무에서 멀어지더라고요. 부장들에게 결재 받으러 다니는 일만 하는 거야. 그럼 손이 굳어버려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회사를 뛰쳐나왔어요. 간도 컸지, 그 좋은 회사에서.

    아무 대안도 없이요? 그 당시엔 새로운 걸 하겠다고 뛰쳐나오는 젊은이들이 많았어요. 지금은 그러기가 힘든데, 그땐 그게 가능했어요. 성공하는 경우도 많았고. 저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제일기획 같은 에이전시를 설립하려고 했어요. 저는 돈이 없었지만 투자자가 있었거든요. 그 친구가 여의도에 100평짜리 사무실을 마련했고 저는 자료를 수집한다고 일본에 갔어요. 근데 3일 만에 묵고 있는 호텔로 전화가 온 거야. 투자자였던 친구가 주식으로 돈을 다 날렸다고요. 청천벽력이었죠.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마침 일본에 아주 친한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네 집에서 한 달을 더 머물게 됐어요.

    그 한 달이 종이접기를 하는 계기가 됐나요? 그 친구네 애기가 근방의 유치원을 다녔어요.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면서 수업하는 걸 보니까 종이를 오려서 붙이고 만들며 종이접기를 하더라고요. 나중에 귀국을 했는데 직장도 없고 시간이 남으니까 미술학원이나 유치원에 가서 수업을 구경했어요. 근데 우리나라에는 일본처럼 종이접기 커리큘럼이 없더라고요. 색종이 질도 아주 안 좋았어요. 종이접기 시장이 거의 황무지였죠. 다시 직장을 구할까, 종이접기를 한번 제대로 해볼까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어요.

    집에서 반대는 없었나요? 우리 마누라가 난리 났죠. 밥벌이는 안 하고 엉뚱한 걸 한다고요. 1년은 봐주겠다며 그 후에는 먹고살 궁리를 찾으라고 하더라고요. 아버님께 가서 생활비를 부탁하고는 그 일(종이접기)에 매진하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을 만나야 하니까 사립초등학교 미술교사로 취직해 2~3년 근무했고, 미술학원도 열면서 완전히 이쪽에 올인했어요. 간간이 세미나도 다니면서 돈도 받았고요.

    그 일이 잘 풀렸군요? 그러다 방송국에 얘기가 들어갔나 봐요. 웬 남자가 초등학교 미술교사를 하는데 아이들에게 종이접기도 가르친다더라. 방송국에서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해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원래는 종이접기가 아니라 그리기를 해달라고 했어요. 근데 평면미술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입체미술인 종이접기로 여러 가지 만들기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좋겠다고 하기에 시작한 거죠.

    번듯한 직장인으로 근무하다가 아이들을 상대하는 직업으로 전환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굉장히 애를 많이 먹었죠. 그때가 이 일을 계속 하느냐 마느냐, 하는 과도기였어요. 넥타이 매고 어깨에 힘주면서 다니다가 (아이들 상대로 종이접기 선생님을 하니까) 손가락질도 많이 당했어요. ‘코딱지들 돈 뺏어 먹는다’는 소리도 듣고 그랬는데, 그래도 나를 찾는 사람이 참 많았어요. 그 당시는 종이접기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내 강의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참 많았죠. 어떻게 보면 떠밀려서 했어요. 자꾸 (강의를) 해달라고 그러니까. 어느 날 뒤돌아보니 3~4년이 지났더라고요. 그때부턴 딴 일 못 한 거죠.

    밖에서는 종이접기로 잘나가는 선생님이었는데, 집에서는 어떤 아버지였나요? 쌀장사 하는 사람이 쌀밥 못 먹는다고, 우리 애들은 마누라가 다 키웠어요. 저는 워낙 바빠서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도 별로 없었고요. 다행히 아이들이 스스로 잘 컸어요. 지금 딸은 인테리어디자인을 하고 아들은 평범한 직장인이에요.

    아이들과 수십 년을 함께했잖아요. 아이들을 대할 때는 이렇게 해야 된다, 하는 노하우가 있을까요? 제가 장담하건대, 모든 건 경험에서 얻어져요. 이론적인 접근은 아이들 교육에 잘 안 맞아요. 먼저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서 아이들을 배운 다음 아이들로부터 배운 것을 다시 돌려주는 거예요. 제가 왜 아이들을 코딱지라고 하겠어요? 아이들의 집중력을 키우기 위한 단어예요. “얘들아 여기 볼래?” 하면 반은 보고 반은 딴짓해요. “어이, 코딱지들!” 이러면 자기들은 코딱지가 아닌데 코딱지라 그러니까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봐요.

    근데 방송국에서 코딱지라는 호칭을 쓰는 것에 대해 반대는 없었어요?(웃음) 방송국에서는 오히려 “채팅창에 들어오는 2030세대들이 선생님 프로를 보고 자란 애들이니까 재밌는 얘기 막 하셔도 된다”고 그랬는데, 그래도 코딱지라는 말은 방송에서 하면 안 되겠다 싶더라고. 근데 딱 5분 만에 자연적으로 튀어나온 거 있죠? “어이, 코딱지들!”

    매너리즘? No! 종이접기는 내 일이자 취미생활

    어린이 프로그램이 소수만 남거나 폐지되고 공중파에서 김영만을 볼 기회도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장외에서 종이접기를 가르쳐왔다. 대학 강단, 미술관, 유치원 어디든 가리지 않았다. 색종이와 씨름한 수십 년 세월. 한 번쯤 지겹다고 느낀 순간은 없었을까?

    방송에서 보이지 않던 세월 동안 꾸준히 종이접기 강의를 해왔다고요. 수원여대와 마산대에서 강의를 하고 그 밖에도 여러 군데 강의를 다니고 있어요. 마산대 같은 경우는 (먼 데도 불구하고) 14년 했어. 대단하죠?(웃음) 한 달에 한 번, 한 주 몰아서 수업하는 거야.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강의하고 올라와요. 힘든데도 굳이 가는 이유는 지방에 있는 학생들도 혜택을 받았으면 해서예요. 애들도 착하고, 배우려는 학생들의 눈도 똘망똘망하고요.

    여태껏 만든 작품이 1만여 점이 넘는다고요. 세어보진 않아서 몰라요. 근데 1만 점은 훨씬 넘어요.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나오나요? 수십 년 하면 고갈될 법도 한데. 어린이 프로그램 10년 하니까 그다음부터는 녹화하러 갈 때 아이템 생각 안 하고 가도 스튜디오 들어가면 바로 (어떤 걸 만들지) 떠오더라고요. 머릿속에 잠재적으로 반 정도는 (아이디어가) 차 있어. 꺼내기만 하면 돼. 내가 잘나서도 아니고 천재라서도 아니에요. 뭘 만지든 습관적으로 접는 게 일상화가 돼 있어요. 예를 들어 (손에 쥔 플라스틱 컵을 가리키며) 이 통이 뭘 만들 때 어떻게 쓰면 좋겠다, 이런 게 다 보여. 40~50년씩 해봐. 그게 몸에 안 배나.(웃음)

    매너리즘은 없었나요? 그건 모르겠네요. 그런 걸 생각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어요. 그리고 나는 일과 취미가 같잖아. 그러니까 매너리즘이 생길 리가 없지.

    오랜 목표이던 미술관 설립의 꿈을 몇 년 전 실현했어요. 그게 천안의 ‘아트오뜨’죠? 한 5년 됐어요. 실내가 100% 종이로 꾸며진 작은 미술관이에요. 애들이 오면 큐레이터가 각 방마다 데리고 다니면서 놀이를 해요. 네 가지 방과 야외까지 다섯 개 공간이 마련되어 있거든요. 근데 너무 작아서 하루에 1백 명 이상은 못 받아요. 단체만 받으니까 개인은 안 되느냐고 많이 물어오는데, 현재는 운영할 수가 없어요. 거기가 천안시에서 40~50분 들어가야 하는 시골이에요. 하루에 한두 명 오는데 문을 열어놓기도 그렇고요. 내년에는 주말에 직원을 구해서 문을 열어볼까 싶기도 한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요.

    강의에 방송에 미술관 운영까지, 이렇게 많은 일을 소화하려면 건강관리는 필수겠어요. 먹는 거 제대로 챙겨먹는 것 정도예요. 삼시 세끼까지는 못 먹고 ‘아점’ 먹고 중간에 간식 먹고 저녁은 무조건 차려 먹어요. 운동은 요즘 거의 못 해요. 겨울에는 조깅 좀 하고요. 살 좀 쪘다 싶으면 헬스 다니면서 빼고요. 관리하지 않으면 일을 못 하니까요.

    종이접기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신 것 같아요. 그래도 못 이룬 목표가 있다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던 게 미술관이었는데 그것도 이뤘어요. 이제는 재능기부를 하려고 해요. 산간·도서 지방의 분교, 작은 어린이집, 유치원에 찾아가서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같이 종이접기도 하고 싶어요. 근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그쪽에서 거부하는 경우가 두어 번 있었어요. ‘저는 김영만이라는 사람인데 이런 일로 돕고 싶다’ 전화하면 이상하게 미적거리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전화해서 가면 나중에 꼭 물건을 판대요. 얼마나 교장선생님들이 당했으면 그러겠어요. 어쨌든 앞으로는 재능기부로 제 종이접기 재능을 많이 전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