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사기와 상술 능한 실크로드 상인들에 걸리면 다 털려

Shawn Chase 2015. 9. 8. 01:43

오은경의 잊혀진 유라시아 이야기(14)-①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기사보기

사기와 상술 능한 실크로드 상인들에 걸리면 다 털려


 

오은경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E-mail : euphra33@hanmail.net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터키 국립 하제테페 대학교에서 터키문학과 비교문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즈베키스탄 알리셰르나보이 국립학술원에서 우즈벡 구비문학과 민속학, 비교문학으로 외국인 최초로 인문학 국가 박사학위(Doctor of Science)를 받았다. 터키 국립 앙카라 대학교 외국인 전임교수와 한국학 중앙 연구원 초빙연구원(Post-doc), 우즈베키스탄 니자미 사범대학교 한국학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터키문학·이슬람여성·비교문학·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의 구비문학·정신분석학이다. 터키·유라시아 투르크 전문가로서 한민족의 근원과 투르크와의 친연성을 연구 중이다.
저서로 '터키 문학 속의 한국 전쟁', '20세기 페미니즘 비평: 터키와 한국 소설속의 여성', '베일 속의 여성 등이 있다.


 

입력 : 2015.09.07 15:36 | 수정 : 2015.09.07 15:37

 

 

유라시아 대륙 진출을 꿈꾸는 신(新) 실크로드 경제벨트는 21세기 많은 나라의 꿈이다. 새로운 비단길 확보를 향한 중국과 러시아의 치열한 각축 속에서 한국도 서유럽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 대륙횡단 철로를 한반도까지 연결하려는 가슴 벅찬 구상을 하고 있다. 중국은 고대부터 여러 차례 비단길을 무력으로 장악해보고자 했으나 성공한 적은 없었다. 비단을 비롯해 멋진 말, 온갖 귀금속, 진귀한 동서양의 물건들이 오가는 비단길의 소유권을 투르크 민족들이 수천 년 동안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이란 단순히 사람과 물건만 오가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대화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교류의 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동서양 문명의 교통로였던 실크로드는 동서양의 특산품뿐만 아니라 종교와 사상과 예술 같은 정신문화도 활발하게 교환되던 문물시장이었다. 고대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의 상권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사람들은 소그드 상인(Sogdiana merchants)이었다.
비잔틴을 정복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초상. /주간조선
비잔틴을 정복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초상. /주간조선

 

이들은 천부적인 상인으로서 물류교역뿐만 아니라 문명교류의 주역이기도 했다. 산스크리트어로 쓴 불경이 소그드 어를 통해 중국어로 번역되었고, 소그드 인들을 통해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기독교가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서기 8-9세기가 되면서 이들의 역할과 패권의 상당 부분이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 투르크인들에게 넘어간다. 투르크인들은 단순히 교역활동에만 종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문명교류라는 시대적 사명과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했던 "글로벌"화 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인종의 벽을 허물고 인도ㆍ아리안 족과 자연스럽게 융화하여 하이브리드 인종을 만들어 이미 오래전에 진정한 의미의 다문화사회를 일구어 냈다. 다양한 인종의 혼혈로 획득한 이들의 유전자는 아름다운 외모라는 선물까지 후대에 남겨주었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것은 조상 대대로 비단 길을 오가던 대상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왔던 이들 투르크인들에게는 골수까지 상인의 유전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투르크인들을 제대로 소화하려면 이들에게 숨겨진 그 같은 유전자를 꼭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온전한 의미에서 이들과 소통하고 "상처받지 않고" 교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즈베크인들에게는 "손님이 오면 돈이 온다"라는 속담이 있다. 손님이 오면 환대를 하지만 그 이면에는 손님은 돈이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동안 척박한 실크로드 사막에서 '투르크인들이 어떻게 부를 축적하며 삶을 유지해왔을까'에 대한 대답이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들이 오랜 시간 목숨을 건 여행 끝에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은 오아시스에 자리 잡은 “카라반사라이”였다. 이곳이야말로 필요한 음식과 장비를 보충하고 사람도 낙타도 당나귀도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달콤한 주막이자 리조트였다. 투르크인들은 심신이 피로한 대상들에게 온갖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신 최선을 다해 그들을 벗겨 먹었다.

요즘에도 주막집 주인 격인 투르크인 아파트 주인은 조금이라도 어수룩해 보이는 외국인 세입자가 들어오면 집에 문제가 생겼다는 둥 온갖 트집을 잡아 세입자의 주머니를 톡톡 털어간다. 그래서인지 중앙 아시아인들은 외국인이나 이방인을 언제나 반갑게 맞이한다. 
 
조상 대대 중개무역과 상업을 생업으로 살았던 투르크인의 문화는 터키를 가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최근에는 대형마트와 백화점이 주요 유통구조를 장악해버리기도 했지만 재래시장이나 일반 상점에서는 아직 흥정문화가 일반적이다. 흥정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가 아니다.

물건을 매개로 서로 친분을 쌓는 기회이기도 하다. 조금 비싼 물건이라서 흥정이 오래될 것 같으면 주인이나 점원은 흔쾌히 차를 대접한다. 진한 터키 커피를 카페에 주문까지 해서 배달시켜주기도 한다. 차를 마시면서 오랫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물건을 서로 흥정하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투르크인들의 유별난 자존심만큼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물건을 흥정할 때 이 원칙을 깨면 다된 비즈니스도 망치고 만다. 처음에 이야기를 나눌 때 터키 말을 알거나, 그 지방 소식이나 물건값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면 주인은 바가지를 씌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지역 물정이나 시세를 모르는 이방인이라고 생각되면 된통 바가지를 뒤집어씌운다. 이윤을 남기는 것이 장사꾼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은 절대로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사기와 상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 자체가 이들에게는 상인의 도리이다.

물건을 최대한 싸게 사고 싶으면, 현지의 실정을 잘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물건부터 최대한 칭찬해줘야 한다. 주인의 자존심을 한껏 치켜세워주고 나서 자신의 부족한 주머니 사정을 설명하면서 측은지심을 자아내면 인정 많은 터키인은 자기가 손해 보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싼 가격에 물건을 넘겨준다. 그러면 나중에 그 가게를 찾아가도 오랜 친구라도 맞이하듯 반갑게 맞아준다.
투르크어 사전에 삽입된 세계지도. /주간조선
투르크어 사전에 삽입된 세계지도. /주간조선

 

 

투르크인들이 조상 대대 물려받은 상인의 유전자는 이들을 협상의 달인으로 길러냈다. 모든 정치, 경제 협상 테이블에서 이를 무시하고 적당히 준비했다가는 낭패를 면하기 어렵다. 몇 년 전 터키 정부가 일본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기 위해 원자로 건설 입찰에 한국을 들러리로 끌어들여 결국 그들이 바라던 목적을 달성한 협상력은 투르크인들의 전통적 상술이라 할만하다. 투르크인 사회에서 가장 빨리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이너 서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아니다.


그들이 이방인을 자기 사람으로 받아주는 것은 그야말로 사막 여행처럼 지난한 여정이다. 한마디로 나를 버려야 한다. 이런 경우를 빗대어 간도 쓸개도 다 내줘야 한다는 말이 생겼는지 모른다. 자기 것을 모두 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검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낯선 이방인을 최대한 벗겨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벗겨 먹는다. 그 과정에서 공정함이나 합리성을 강요한다는 것은 당장 관계를 끝내자는 말이나 다름없다. 무리하게 이들에게 사과나 잘못을 시인하게 하는 행위는 금물이다. 자존심이 강한 유목민 근성과 여기에다 절대 책임지기 싫어하는 관료주의 기질까지 가세해 이들에게 사과를 받아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가진 것을 다 털려도 등을 돌리지 않고 그들과 함께 남아 울고 웃을 때 그들은 비로소 자기 사람으로 받아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는 것이다. 공정한 거래도 이때부터 가능해진다. 공짜란 절대로 없다. 그러나 털릴 것이 두려워 이들과의 교류를 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그랴. 게다가 그들은 수천 년 동안 동서양 교역의 촉매제 역할을 해오지 않았던가.

세계를 상대로 자유무역을 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투르크인들과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눠야 한다. 중국과 일본에게는 자본에서 밀린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투르크인들에게 있어 백 년을 함께 살아온 식구이다. 우리가 기댈 것은 무엇인가. 유라시아 실크로드의 주역이었던 투르크인들에게 길을 내달라고 조르기 이전에 진정한 의미의 친밀한 관계 설정부터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제 그들이 누구인지 올바로 알고 손을 내밀며 포용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