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경영

100년 만에 코카콜라 꺾은 당찬 '엄마 CEO'

Shawn Chase 2017. 1. 12. 12:28

'넌 뭐든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온 인도 소녀가 세계적인 기업의 리더로 우뚝 섰다. 
매년 각종 매체의 유명인 순위에 오르내리고, 업계 만년 2위의 기업을 1위로 올려세운 인드라 누이의 성공신화는 유명한 이야기가 됐다.

  • 구성·편집=뉴스큐레이션팀




입력 : 2017.01.09 08:04 | 수정 : 2017.01.10 06:46

"진솔하고 적극적인 CEO의 행동이 
회사의 비전과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직원들을 이끌었다"
 
- 펩시코의 임원 코칭을 맡았던 마티 샐드먼 박사

"1994년 펩시코에 입사해 2006년 CEO가 된 뒤, 
위기에 직면한 펩시코를 구했다"
 
-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세계적인 기업 펩시코의 중심에는 주목받는 리더, 인드라 누이가 있다. 위기의 펩시코를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가족적 리더십과 섬세한 배려로 직원들을 챙기며 기업을 이끈다. 특유의 결단력으로 사업의 다각화를 모색해 코카콜라를 꺾고, 업계 만년 2위였던 펩시를 100년 만에 1위로 올려세우기도 했다.

펩시코 인드라 누이 회장 1년 새 수입 45% 늘어
런던 FT 선정 여걸기업인 1위, 펩시코 CEO 인드라 누이

인도 남부 첸나이(Chennai·옛 마드라스)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인드라 누이는 마드라스 크리스천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인도경영대(IIM)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취득했다. 인드라 누이의 어린 시절, 어머니는 매일 자식들에게 '앞으로 자라서 뭐가 되고 싶은지'를 물었고, 매번 가장 좋은 꿈을 말한 사람에게 상을 주었다고 한다. 

"넌 무엇이든 될 수 있단다" 어머니의 가르침
인드라 누이는 2015년 9월, 여성리더십패널에 참석해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어린 시절을 소개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인도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1978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예일대 경영대학원에서 다시 경영학석사(MBA)를 딴 인드라 누이는 보스턴컨설팅그룹, 모토로라 등에서 전략기획 분야를 담당하며 꿈을 실현해 나갔다. 1994년 펩시코에 합류할 당시, 그는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도 러브콜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펩시코 CEO 웨인 칼로웨이(Wayne Calloway)는 인드라 누이를 만나 이렇게 설득했다. "잭 웰치는 내가 아는 최고의 CEO이고, GE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회사일 겁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펩시코를 당신을 위한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겠습니다." 훗날 인드라 누이는 "그 말을 듣고 주저 없이 펩시를 선택했다"고 회고했다.


인도 여자로 태어나 자란 경험은 오히려 그에게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그는 "여자로, 외국인으로 태어났다면 그 누구보다도 더 영리해져야 한다"고 말해왔다.


인드라 누이는 2006년 10월, 여성 최초로 펩시코 CEO가 된 데 이어, 다시 7개월만인 2007년 5월 회장직까지 겸하게 됐다. 인드라 누이는 만년 2등이던 펩시코를 업계 1등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인물로 꼽힌다. 그가 부사장, 최고재무관리자(CFO), CEO, 회장으로 '유리천장'을 차례로 깨뜨리는 동안, 회사도 경쟁자를 한 단계씩 뛰어넘었다.

2004년 펩시코는 전체 매출에서 73억 달러 차이로 코카콜라를 앞질렀다. 2005년 12월에는 시가총액(984억 달러·당시 기준)에서도 코카콜라(979억 달러)를 제쳤다. 이듬해 2월 발표된 펩시코 2005년 4분기 순이익은 전년 동기대비 13% 증가하며, 28% 감소한 코카콜라를 완전히 따돌렸다.

그래픽=이은경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이 
변하고 있으므로 
펩시코 제품도 뒤처지면 안 된다

인드라 누이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며 사업 다각화
회사 설립 이래 100여 년 만에 펩시코가 코카콜라를 추월한 것은 세계적인 웰빙 바람에 따른 시장의 변화에 재빠르게 적응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항상 인드라 누이가 있었다. 펩시코에서 전략기획과 구조조정 업무를 도맡아온 인드라 누이는 1990년대 후반부터 탄산음료 시장의 한계를 예측하고, 건강음료와 식품 등 분야로 사업 다각화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KFC, 피자헛, 타코벨의 분할 매각에 앞장섰고, 대신 주스를 생산하는 음료업체 트로피카나(Tropicana) 인수를 주도했다.

펩시코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2001년 퀘이커오츠(Quaker Oats) 인수였다. 인드라 누이를 스타로 만든 이 인수전에는 '월가의 전설'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퀘이커오츠는 시리얼과 이온음료 '게토레이' 생산업체로, 당시 25억 달러 스포츠음료 시장에서 83%의 점유율을 보이며 코카콜라의 '파워에이드'에 크게 앞서고 있었다. 인드라 누이는 향후 건강음료 시장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선도기업을 보유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인수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워런 버핏(왼쪽), 인드라 누이 /사진=블룸버그

펩시콜라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결정이었다

로저 엔리코 당시 펩시코 CEO
코카콜라도 퀘이커오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코카콜라 측은 157억 달러를 제시해 인수가 거의 성사되는 분위기였지만, 막바지에 당시 이사회 멤버였던 워런 버핏이 정면 반대하고 나섰다. 인수가격이 지나치게 높고, 독점금지법에 걸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소식이 알려진 당일 퀘이커오츠 주가는 8% 떨어졌다.

코카콜라 이사회가 주춤하는 사이, 당시 펩시코 CEO 로저 엔리코(Roger Enrico)는 인드라 누이가 써준 가격(134억 달러)을 그대로 제시했고, '게토레이'는 펩시코의 것이 되었다. 전문가들은 퀘이커오츠 인수를 오늘날 펩시코 성공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고 있다. 코카콜라를 가장 아끼는 회사 중 하나로 꼽으며 1989년부터 이사회에 참가해 온 버핏은 이때의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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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경호원과 함께인 건 
싫어요. 나는 그저 한 엄마이자 
아내인 사람일 뿐인데요

인드라 누이

인드라 누이는 글로벌 리더인 자신을 '엄마이자 아내'라고 먼저 소개한다. 회사 생활을 잘하려면 무엇보다 가족과 개인 생활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 포브스(Forbes)는 2012년에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어머니 20인'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과 지우마 호세프 당시 브라질 대통령에 이어 3위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일과 가정을 둘 다 훌륭하게 꾸리는 '슈퍼맘'이라는 게 이유였다.

인드라 누이 /블룸버그

'일과 가정의 조화', 자발적 문화 강조
그는 직원들에게도 일보다는 가족을 먼저 생각하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펩시의 직원이기 전에 엄마이며 아빠임을 먼저 깨달으라"고 강조한다. 임원들의 부인에게는 남편들의 긴 근무시간에도 내조를 소홀히 하지 않는 데 대해 감사의 편지를 직접 써서 보내는 배려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높은 잠재력을 가진 인재를 선발해 10~15년 키우려면, 먼저 직원들이 안정적으로 커리어와 개인생활을 병행할 수 있도록 그 배우자와 아이, 부모를 돌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 최초로 펩시코 CEO에 선임되던 날 어머니가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직원들에게 소개했다. "집에 들어올 때는 네가 밖에서 썼던 왕관을 벗어 놓고 들어와야 한다. 집에서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내이자 엄마라는 자리란다."

자발적인 문화도 강조한다. 구식 기업문화에서 벗어나 직원이 먼저 '이 일을 하고 싶다'고 나서는 분위기를 만들어,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하는 직장이 목표다. 회의 때 책상에 걸터앉아 대화를 나누는 등 격의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한다. CFO로 일할 당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사내 강연에서 인도 전통의상 사리(sari)를 입고 나와 직원들에게 깜짝 노래공연을 펼친 적도 있다.

누이 펩시콜라 CEO "존경받는 기업 만들고 싶다"
인드라 누이 /블룸버그

※ 펩시코(PepsiCo)는 어떤 회사?
189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약사 출신인 캘러브 D. 브래덤(Caleb D. Bradham)이 '펩시콜라' 라는 이름으로 처음 펩시의 제조방법을 개발했다. 펩시콜라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자 1902년 펩시콜라컴퍼니를 설립하고 1903년 제조방법을 특허 등록했다. 1960년대 다이어트 펩시와 마운틴듀를 추가로 출시했다.

1961년 감자 칩과 옥수수 칩 과자를 개별적으로 생산하던 H.W.레이앤드컴퍼니와 프리토컴퍼니가 합병하여 프리토-레이가 되었다. 1965년 펩시-콜라는 프리토-레이를 인수하여 펩시코가 되었다. 1972년 펩시코는 다국적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러시아에서 제품 생산 및 판매 허가권을 얻어냈다. 1975년 소비자가 펩시콜라와 코카콜라를 시음하고 어느 쪽이 좋은가를 선택하는 '펩시 챌린지' 홍보행사를 방송광고로 그대로 내보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80년대 후반, 펩시콜라는 러시아에서 펩시키(Pepski)란 애칭으로 불리며 매년 수십억 병이 소비됐다.

1998년 트로피카나(Tropicana) 사를 인수하고, 2001년 퀘이커오츠(Quaker Oats) 사와 합병하여 식음료 사업을 확장했으며, 게토레이 브랜드를 추가했다. 2009년 순 매출 기준으로 펩시코는 전 세계 2위이자 북미 1위의 식음료 업체로 성장했다.

/롯데칠성 제공

역사적으로 음료 시장에서 코카콜라는 펩시코의 최대 경쟁업체였지만, 2005년 12월 펩시코는 112년 만에 시가총액으로 코카콜라를 앞질렀다. 1990년대와 2000년대 꾸준한 기업 인수와 합병을 통해 탄산음료의 시장 의존도를 낮췄다. 그 결과 음료수는 2009년 기준 총매출의 50% 이하를 차지했고 게토레이와 트로피카나 같은 비탄산음료 브랜드의 판매액이 60%를 넘어섰다.

2010년 3월, 인드라 누이 대표는 청소년의 건강을 위해 2012년까지 전 세계의 학교에서 고칼로리 청량음료를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에서는 2006년부터 학교 안에서 청량음료 판매가 중단됐다. 한국 펩시콜라는 1993년 설립되었으며, 원액을 수입하여 롯데칠성에 독점공급하고 있다. 펩시콜라, 게토레이, G2, 미린다, 트로피카나 브랜드의 제품을 판매하며 롯데제과를 통해 라이선스 제과인 치토스를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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