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정치

[동서남북] 탄핵의 기억

Shawn Chase 2016. 11. 29. 00:36

이동훈 정치부 차장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1/27/2016112701924.html


입력 : 2016.11.28 03:14


이동훈 정치부 차장
이동훈 정치부 차장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던 날, 필자는 국회 본회의장 기자실에 있었다. 그곳에선 본회의장을 근접해 지켜볼 수 있다. '11시 7분 박관용 국회의장 입장, 11시 56분 가결 선언, 49분간의 몸싸움과 절규의 아비규환.' 그때 필자의 취재수첩 기록은 그랬다.

의원 몸싸움이 다반사였을 때였지만 그날만큼은 본회의장 시곗바늘 움직임까지도 선명하다. 몇몇 기자들은 눈시울을 붉혔고, 몇몇은 "언제 또 이런 장면을 보겠느냐"고 농담처럼 말했다.

국회의 탄핵 가결 뒤 많은 일이 있었다. 역풍이 불어 탄핵을 주도한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졌고, 노무현의 열린우리당은 이겼다. 어떤 이는 탄핵 격랑에 휘말려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고, 어떤 이는 우뚝 섰다. 노무현 탄핵 공간에서 '보수의 구세주'로 등장한 이가 박근혜 대통령이다.

국회가 12월 2일이나 9일 박 대통령 탄핵을 추진할 예정이다. 여야 입장, 의원들 표심을 따져봤을 때 가결 전망이 우세하다. 12년 전 그랬듯 국회가 탄핵을 처리하고 나면 예상 못 했던 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2004년 3월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박관용 의장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국회의 탄핵 가결은 대선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대선은 내년 12월 20일로 예정돼 있지만,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에 따라 당겨질 가능성이 있다. 몇몇 주자들은 이미 촛불 집회가 열리는 거리에서 선거운동을 시작한 듯하다.

어떤 이는 대선을 할 때가 아니라 개헌(改憲)을 할 때라고 주장한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이제는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개헌을 매개로 한 정계 개편 논의도 본격화될 수 있다. 하지만 대선 여론조사 1위 문재인 전 대표가 반대하고 있어 개헌은 쉽지 않다. 이런 사정 때문에 탄핵 이후 '문재인 대 반(反)문재인', '호헌(護憲) 대 개헌'으로 정국 재편을 예상하는 이도 있다.

보수는 위축되고 주도권이 비박으로 넘어갈 공산이 크다. 친박은 사람에 대한 추종으로 만들어진 계파여서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친노와도 다르다. 친박은 박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다.

국회에서 탄핵 가결이 이뤄진다 해도 민심의 격랑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조기 대선판에다 개헌 논란, 특검의 대통령 수사,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등이 중첩돼 혼란이 계속되고, 살벌한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가 국회 탄핵 소추를 인용해 대통령이 실제 탄핵당한다면 그 지점부터는 대한민국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이 이 공간을 파고드는 것은 막아야 한다. 대통령 실정(失政)은 실정대로 따지더라도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국회의 탄핵 가결은 거리에 정치를 내맡기지 않고 헌법 틀 안에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다. 탄핵 프로세스의 작동은 대한민국이 광장의 선동과 열기에 나라 시스템이 멈춰 서는 수준은 넘어섰으 며, 여전히 민주공화국임을 보여주는 징표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을 탄핵 심판대에 세우는 일은 나라의 불행이지만 그 와중에도 법치가 정상 작동하고 있다는 점은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12년 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하면서 박관용 의장은 "대한민국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전진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대통령 탄핵 절차를 다시 밟기 시작한 지금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