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남녀심리

[Why] 결혼=불간섭×분담², 과학자 부부의 '로맨스 공식'

Shawn Chase 2016. 11. 13. 10:10

전현석 기자





입력 : 2016.11.12 03:00

[전현석 기자의 觸(촉)]
일터·가정에서 함께한 40년… 인하대 황진명·김유항 명예교수 부부


34세 여교수가 남편과 돌쟁이 아들을 두고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에 2년간 연수를 떠났다. 같은 대학의 교수인 남편은 아내를 적극 응원했다. 35년 전인 1981년 인하대 황진명(69)·김유항(71) 명예교수 얘기다.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연구하러 나간다면 똑같이 응원하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다른 교수들 모두 이해를 못 하더라고요. 2년 안에 이혼할 거라고. 이혼 안 하면 신문에 날 일이라면서."(황진명)

"당시 우리나라에 첨단 실험 장비를 갖춘 대학이 거의 없었어요. 미국 대학에서 같이 연구하자는 요청이 왔다는데 과학자한테 그보다 좋은 기회가 어딨어요. 아내에게 '아이는 부모님들과 상의해 알아서 키울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빨리 가라'고 했어요."(김유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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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결혼 40주년을 맞는 황진명(왼쪽)·김유항 인하대 명예교수 부부. 함께 외출해도 걸음 빠른 김 교수가 황 교수보다 항상 50보쯤 앞서 걷는다고 한다. 손 잡고 함께 걸어달라고 부탁했더니 둘 다 쑥스러운 듯 어색하게 웃었다. / 성형주 기자


―시댁에서 반대 안 했습니까.

황진명 "전혀요."

―그러면 전폭적으로 지원했나요.

황진명 "네. 그런데 왜 전폭적인 지원이라고 하죠? 남자가 연수 갈 때는 전폭적인 지원이라는 말 안 쓰잖아요."

―아무래도 부부가 떨어져 지내면 식구들 보기에 애처로울 것 같으니까요.

황진명 "애처롭긴. 부부가 서로 신뢰를 못하니까 혼자 보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웃음)"

김유항 교수는 지난달 아시아과학한림원연합회(AASSA) 3대 회장에 선출됐다. AASSA는 한국·일본·중국·호주 등 30개국 34개 한림원·과학원이 가입한 아시아 최대 과학기술 단체다. 김 교수는 인하대에서 2010년 퇴직할 때까지 38년간 일했다. 그 공로로 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황진명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공대 교수다. 인하대에서 36년간 학생을 가르치고 2012년 은퇴했다. 녹조근정훈장, 제15회 과학기술 우수논문상 등을 받았다. 지난 8일 부부가 사는 서울 방배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둘은 서로를 '황 교수' '김 교수'라고 불렀다. 학교를 비롯한 공식 석상에선 이같이 부르고 둘이 있을 때만 '여보' '당신' 한다고 했다. 부부 과학자의 로맨스가 궁금해졌다. "두 분 어떻게 만났습니까?"

新여성과 모범생, 미국에서 만나다

김유항
"서울대 화공과 졸업하고 ROTC 장교로 군 복무 마친 후에 1968년 미국 네바다주립대 화학과로 유학 갔어요. 1년 뒤 황 교수가 유학 오더군요."

―그 당시 여자가 미국 유학 가는 일이 흔치 않았을 텐데요.

황진명 "고등학교 때 우리나라 여성 해방운동의 선각자라고 할 만한 화가 나혜석의 불꽃 같은 삶을 알게 됐어요. 어머니께서 일제 시대 경성음악전문학교(현재 서울대 음대) 나오셔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를 잘하셨고 꽃꽂이 자격증도 갖고 계셨는데, 아버지가 반대해서 결혼 후 그런 재능을 하나도 못 살리신 게 저는 항상 불만이었어요. 저 스스로 현모양처가 될 소양이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그나마 여성 차별을 덜 받는 대학교수가 되기로 목표를 정했어요. 이화여대 화학과 졸업하고 장학금을 주는 미국 대학을 찾았는데, 네바다주립대였죠. 100달러 들고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를 탔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잖아요."

―서로 어디에 끌렸나요.

김유항 "황 교수는 악착같이 연구하고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했어요.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아, 이런 사람이면 나와 평생을 같이할 만한 반려자가 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보니까 황 교수가 실험하느라 점심을 못 먹어요. 어느 날 제 샌드위치 싸는 김에 하나를 더 싸다가 줬어요. 그렇게 시작이 된 거죠."

황진명 "샌드위치를 3년 넘게 거의 매일 싸 주더라고요. 밤 12시 넘어 실험 끝날 때가 많았는데, 김 교수가 매일 집까지 함께 걸어 데려다 줬어요. 또 내가 한국에서 여성운동을 하면 피켓을 들어주겠다면서 여성 문제에 공감을 하더군요."

―연애는 어떻게 했나요.

김유항 "연애할 시간이 어딨어요. 당시 대학원생은 교수 노예였어요. 밤낮으로 공부하고 실험해야 겨우 쫓아갈 수 있고 성과를 낼 수 있었어요. 서로 연구실도 달랐고. 돌이켜보면 점심시간에 같이 샌드위치 먹고, 20분 걸려 집에 데려다 주는 게 일종의 연애였어요."

황진명 "저는 선배나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유학 시절 뽀뽀 한 번 안 했어요. 그런데 김 교수가 석·박사 학위 마치고 1972년9월 저보다 먼저 귀국했어요. 그제야 빈자리가 느껴졌어요."

―결혼 약속은 안 했나요.

황진명 "그런 건 없었어요. 대신 김 교수가 떠나기 전에 그러더군요. 귀국해서 매주 저희 부모님을 찾아뵙겠다고요. 3년6개월 후 제가 귀국할 때까지 약속을 지켰어요. 부모님께선 무뚝뚝한 딸보다 예비 사윗감을 더 좋아하게 됐지요." 김 교수는 귀국 직후 곧바로 인하대 화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황진명 "당시 김 교수 나이가 만 27세였어요. 미국 유학을 마친 결혼 적령기 교수한테 선이 얼마나 많이 들어왔겠어요? 김 교수가 말은 안 했는데 서울대 전체 수석 입학에 공대 수석 졸업했더라고요. 누가 봐도 정말 탐나는 총각이었죠. 그에 비해 과학자인 저는 결혼하면 남편 고생문이 훤한 처녀였지요. 그런데 김 교수는 누가 신붓감을 소개해준다고 해도 저만 기다리겠다고 했대요. 별명이 '김춘향'이었어요.(웃음)"

김유항 "3년 동안 편지를 썼어요. 그때는 전화 걸기가 쉽지 않았으니까요. 평균 일주일에 두 통씩 주고받았어요. 편지 쓰면 보름 후쯤 답장이 오던 시절이었어요. 한 300통 될 거예요. 이제 좀 버리라고 해도 안 버려요. 황 교수가 편지를 꺼내 보이면서 옛날에 이런 약속 하지 않았느냐고 따질 때는 좀 곤란하지요."

황진명 "장미꽃 심을 수 있는 정원이 딸린 집을 사준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평생 아파트를 못 벗어나요."

김유항 "여름이면 아파트 담장에 장미꽃이 만발한데,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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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명 교수는 1981년 남편인 김유항 교수와 돌쟁이 아들을 두고 혼자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1982년12월 겨울방학 때 미국에서 다시 뭉친 황 교수 가족 / 황진면 교수 제공


한국·미국 오간 연애편지 300통

황 교수는 석·박사 학위를 받고 1976년 2월 귀국해 인하대 무기재료공학과 교수가 됐다. 두 사람은 그 이듬해인 1977년 1월 결혼했다. “양가 부모한테 돈 10원 안 받고 결혼식을 치렀다”고 한다. 폐물로는 백금 반지를 교환했다.

황 교수는 “남편이 결혼 직전까지 나한테 숨긴 게 있다”고 했다. “시어머님께서 시댁 가풍을 알아야 한다면서 며느리와 6개월간 무조건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남편이 5남매 중 차남이니까 모시고 살 줄 몰랐거든요. 시어머님께서는 전통적인 현모양처셨어요. 겨울에 김 교수 신발을 부뚜막 위에 올려서 데워 놓는 분이셨죠. 저는 골치 아픈 신여성이었고.”

―고부 갈등이 좀 있었겠네요.

황진명 “없었어요. 시어머님께서 이러셨어요. ‘우리 유항이는 아들 중에 가장 효자고 부처님 가운데토막같이 마음이 넓다. 태어나서 결혼할 때까지 속 한 번 썩인 적 없다’고. 저한테는 그 말씀이 ‘이제부터 아들이 잘못하면 모두 며느리 탓이다’ 이렇게 들리는 거예요.(웃음)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김 교수 평생 1순위가 시부모님이더라고요. 무슨 해결책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남편이 변할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그냥 꾹 참고 지내기로 했어요.”

―6개월 동안 잘 지내셨나요.

황진명 “1년6개월 동안 모셨어요. 제가 말을 잘 들으니까 어머님께서 저를 계속 데리고 살고 싶어 하셨어요. 그때 시댁이 서울 동쪽 끝인 장위동에 있었는데 인천 인하대 가는 통근버스를 타려면 일단 미아리까지 가야 했어요. 버스 놓치면 기차를 타야 하니까 아침상 차리고 버스 타려고 죽기 살기로 뛰어갔어요. 이렇게 계속 하는 건 너무 힘들겠다 싶어서 말씀드리고 출근하기 편한 동네로 출가했죠. 섭섭해하셨지만요.”

―그래서 시어머님께서 며느리 혼자 미국 연수 가는 걸 허락하셨군요.

김유항 “거기에 대해선 어머니께서 일절 말씀을 안 하셨어요. 출가했으니 아들 내외한테 생기는 문제는 둘이서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저 둘은 부부인데 왜 저러나

―첫 여성 공대 교수였으니 힘든 일도 많았겠군요.

황진명 “처음에 수난을 많이 당했죠. 당시 학생들이 공대에 여교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하니까 저를 조교로 알고 말을 안 들어요. 지도교수 상담을 하러 오라고 하면 친구들이 놀린다고 안 와요.”

―남편이 안 도와줬나요.

황진명 “제일이니까 제가 해결해야죠.”

―그래도 같은 대학에 있으니까 서로 도움이 많이 됐겠네요.

황진명 “저는 김 교수한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어떤 면에선 해를 끼쳤다고나 할까.”

―어떤 면에서요.

김유항 “제가 어쩌다 보니 학교에서 교무처장, 기획처장, 자연과학대 학장, 부총장을 지냈어요. 전체 학교 입장을 대변할 때가 많았는데 황 교수가 교수회의 같은 공개 석상에서 학교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스스럼없이 얘기를 했어요. 총장한테 찾아가서 제 입장하고 다른 주장을 하고. 학교 교수들이 ‘저 둘은 부부인데 왜 저러나’ 놀라고, 어떻게 보면은….” 황진명 교수가 끼어들었다. “악처(惡妻)!(웃음)”

김유항 “저는 개의치 않았어요. 섭섭하지도 않고요. 교수로서 소신 있는 말과 행동을 했으니까요. 부부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각자 일하는 영역을 존중하고 불필요한 간섭을 하지 않는 거라고 봐요. 그게 황 교수와 제가 같은 대학에서 오래 교수 생활을 한 비결인 것 같아요.”

황진명 “둘이 항상 통근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남편이 부총장일 때는 학교에서 관용차가 우리 아파트까지 왔어요. 저는 그 차를 한 번도 안 타고 혼자 통근버스를 탔어요. 부총장한테 나온 차를 평교수가 같이 탈 이유가 없잖아요. 아파트 주민들은 정말 이상하게 생각했나 봐요. 다른 교수들도 ‘유별나게 왜 그러냐’고 하고. 그분들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만일 제가 그 차를 타고 출퇴근했으면 뒤에서 뭐라고 했겠지요.”

―가사는 어떻게 했나요.

황진명 “아들 육아 문제에서 가사 노동까지 김 교수가 자발적으로 참여했어요. 와이프 혼자 쩔쩔매는데 거실에서 TV 리모컨이나 운전하고 있지 못하는, 상당히 양심적인 성품의 소유자죠.(웃음)”

김유항 “아침에 똑같이 통근버스로 출근하고 특별한 일 없으면 같이 퇴근하잖아요. 그러면 황 교수가 식사 준비하는데 어떻게 혼자 놀 수 있겠어요. 저는 애 보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평생 분업이 된 거죠. 그래도 절반을 했다고 볼 수는 없고, 6대4나 7대3 정도로 황 교수가 더 했죠.”

―다른 부부에게는 부러움 또는 지탄의 대상이었겠군요.

황진명 “남자들은 관심 없었고, 제 친구들은 잘 알았죠. 제가 미인도 아니고 집안이 빵빵한 것도 아닌데 남편이 한국 남자 특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사는 게 이해되지 않았나 봐요. 제가 친구들한테 하는 말이 있어요. ‘자신의 성격이 자신의 운명을 만든다’고요.”

아내의 남편 자랑이 이어졌다. “김 교수 단점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많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반면 감성이 정말 부족해요. 내년이면 결혼 40주년인데 짝꿍은 그동안 생일, 결혼기념일을 챙겨주거나 기억한 일이 없어요.”

김유항 “과장해서 얘기하지 마세요.”

황진명 “뭘 과장해서 얘기해요? 선물이나 꽃도 내가 말해야 주지 자발적으로 준 적이 없어요. 제가 따지면 이래요. ‘왜 꼭 여자가 받아야 하느냐’고요. 그래서 내가 김 교수한테 장미꽃을 보낸 적도 있어요. 또 학교 보직 맡을 때는 무슨 국가 안위가 걸린 1급 기밀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일절 얘기를 안 해요. 가장 치명적인 건 부부 동반으로 외출하면 꼭 나보다 50보 앞서서 휘적휘적 걸어요. 저하고 같이 나간 걸 까 먹고 혼자 버스 타고 가 버린 적도 많아요.”

김유항 “제가 다른 운동은 안 하고 등산하고 걷기 운동을 하니까 걸음걸이가 좀 빨라요. 한참 앞서 갔다가 다시 황 교수 쪽으로 와서 걷고 그러길 반복하죠.”

황진명 “1989년 처음 차를 샀는데 장 보러 갈 때나 여행 갈 때 빼고는 항상 대중교통 타고 다녔어요. 틈나는 대로 책을 봐야 한다면서. 밤낮 에너지 절약을 얘기하는데, 환경 보호로 노벨평화상 탈 것도 아니면서 와이프는 되게 불편하게 만들죠.”

―대학에서 30년 넘게 같이 있었는데 떨어져 지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요.

김유항 “글쎄요. 같은 대학이라도 교수는 독립적으로 활동하니까 불편하지 않았어요.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월급봉투를 숨길 수가 없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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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김 교수 환갑 때 인하대 캠퍼스에서 과학자 부부가 사진을 찍었다. / 황진명 교수 제공


내세에서도 만나자는 약속

두 교수는 인하대에 1억5000만원, 유학 갔던 미국 네바다주립대에 2만달러, 각종 학술 단체에 약 1억원 등 수 억원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결혼한 아들(서강대 경영대 교수)부부도 축의금을 서강대와 쪽방촌 돕는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고 한다. 기부 얘기를 꺼내자 김 교수는 “이렇게만 써 주세요. 누구든지 사회에 자기 몫의 기여를 해야 한다고요”라며 더 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황 교수와 김 교수는 2012년 ‘인류 문명사와 함께 한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통섭(blog.naver.com/kbs4547)’ 블로그를 개설했다. ‘과학 대중화를 위해 사회에 재능 기부를 하겠다’는 취지로 시작했다고 한다. 블로그에는 과학자들 업적뿐만 아니라 생애와 시대적 상황 등이 함께 정리돼 있다. 황 교수가 주로 쓰지만 김 교수도 틈틈이 아이디어를 내고 번역을 돕는다. 이를 엮어 ‘과학과 인문학의 탱고’ ‘과학의 일곱 기둥’이란 책도 공저(共著)로 출간했다. 황 교수는 “김 교수가 돌부처처럼 앉아서 교정 일을 했다”고 했다. 부부는 앞으로도 함께 할 일이 많아 보였다.

황진명 “내년에 손녀가 태어나니까 아들 부부 육아에 적극 참여해서 도와주고 싶고요. 또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함께 할 파트너로는 김 교수만 한 사람이 없을 것 같아요. 와이프 생일 기억 못 하고 항상 50보 앞에서 걷지만, 내 권리나 자유를 동등하게 인정하고 가정에 충실한 남편이 고맙고요. 그래서 ‘내세에도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어요.”

김유항 “죽어 서도 만나자고 자꾸 강요하길래 그러겠다고 했죠.(웃음)”

인터뷰가 끝난 뒤 김 교수는 휘적휘적 앞서서 걸어갔다. 황 교수는 종종걸음으로 남편을 뒤따라갔다. 황 교수가 좋아한다는 칼릴 지브란의 시 ‘결혼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함께 있음에도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천공(天空)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가을 바람이 노(老)부부 사이로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