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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조선] 내가 바로 원조 서미경, 재벌 내연녀의 뒷이야기

Shawn Chase 2016. 11. 5. 20:54
  • 박지현 여성조선 기자
  • 사진 조선일보DB, 셔터스톡



  • 입력 : 2016.11.05 10:04


    서미경이 롯데그룹 지분의 최대 보유자로 드러났다. 근현대 역사상 ‘내연녀’ 신분으로는 가장 성공한 사례다. 그렇다고 부러워하기에는 이르다. 은둔생활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재벌가에는 일찍이 이처럼 숨어 산 여성들이 있었다.


    근 몇 년간 재계뉴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이름, 서미경. 뉴스는 끊이지 않는데 좀체 얼굴은 볼 수가 없다.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 그런데 최근 그에 관련된 소식이 또 들려왔다. 서미경과 그의 딸 신유미가 롯데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일본 롯데홀딩스 지분 6.8%를 보유했다는 것. 이 모녀의 지분은 그동안 밝혀지지 않고 있다가 최근 검찰 조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서 씨 모녀의 지분이 신 총괄회장의 두 아들인 신동주(1.6%), 신동빈(1.4%) 회장보다 더 많을 줄은. 현금으로 환산하면 약 7천억원의 가치다. 업계에 따르면 신 총괄회장은 1997년 처음으로 서 씨 모녀에게 일본 롯데홀딩스 지분 3.6%를 넘겨줬다. 당시 지분은 주당 50엔(약 500원)의 액면가로 양도했다고 알려졌다.

    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지분을 가질 수 있었을까.

    혹시 신 총괄회장의 ‘애정’일까. 이 또한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다. 신 총괄회장을 오랫동안 보좌한 J씨는 “일본의 지인에게 맡겨놓고 있던 지분을 되찾아 서 씨 모녀에게 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총괄회장은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하는 서 씨 모녀에 대해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신 총괄회장은 환갑 나이에 얻은 막내딸 유미 씨를 각별히 아끼고 챙겼다고 전해진다. 2003년, 서 씨와 유미 씨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든 ‘경유물산’이란 회사에 지분 3.2%를 넘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J씨는 또 “옆에서 지켜봐 온 결과 신 총괄회장이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는 서미경 씨다. 서미경 씨 얘기를 할 때면 눈빛이 달라진다. 반짝거릴 정도다”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또 “서미경 씨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겠느냐.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은둔생활 못 한다”고 말했다.

    활동 당시 서미경의 모습./유튜브 캡쳐


    # 드라마 같은 만남, 그리고 출산

    15살. 서미경은 ‘미스롯데’ 선발대회에 나가면서 인생 역전 드라마를 찍는다. 미스롯데 1호가 된 것이다. 서미경은 롯데 전속모델로 활약하면서 ‘껌이라면 역시 롯데껌’의 카피를 가장 먼저 히트시킨 주인공이 됐다. 안양예고에 진학했고 드라마, MC, 영화, 광고까지 두루 섭렵했다. 차세대 유망주로 입지를 다져나가던 1981년, 방년 22세. 돌연 은퇴선언을 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유학 가서 공부를 하겠다”였는데, 세간에서는 서 씨의 행방에 지속적으로 물음표를 달았다. 실제로 1981년 당시 한 일간지에는 “서승희(서미경의 예명)가 4월에 유학을 떠난다. 강력한 기대주인 상황에서 별안간 유학 가는 것은 ‘강력한 스폰서’가 있다는 의미”라는 기조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그가 신격호의 연인이 됐다는 얘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신격호 회장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더라는 목격담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호사가들의 가십거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1988년. 은퇴 7년이 되던 해, 풍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신 회장과의 사이에서 출생한 신유미(1983년생)가 호적에 오르면서다. 신 회장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 막내딸을 본 셈이다.


    # 재벌가 내연녀들의 기구한 인생 스토리

    재계 소식통에 따르면 1960년대와 70년대에 사업을 번창시킨 창업 1, 2세대들에게 ‘내연녀’는 공공연했다고 한다. 본처 말고 다른 곳에서 자식을 낳아 입적시키는 사례도 심심치 않게 들려올 정도였다. 당시 재벌가에서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고. 이들은 모두 재벌가로부터 거액을 받았지만 숨어 지내는 등 굴곡진 삶을 살아야만 했다.


    H그룹 J회장 40살 연하 영화배우와 두 딸 낳아

    재벌가 연애 스캔들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연예인이다. 70~80년대에는 특히 연예인과 기업주의 ‘조용한 스캔들’이 많았다. 흔히 ‘부촌’이라 일컬어지는 성북동, 한남동, 강남 등에 비밀 접대장소를 만들어놓고 암암리에 만남을 가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벌과 연예인 사이에는 불문율이 있었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 내연녀로만 남겨둔다는 얘기다.

    국내 굴지의 H그룹. 고(故) J회장의 혼외 부인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J회장의 숨겨진 여인으로 살아온 K씨는 스무 살이던 1973년, 40살이나 연상이었던 J회장을 처음 만났다. 당시 J회장에겐 부인이 있었지만 이러한 사실을 숨긴 채 K씨를 만났고, 두 딸을 낳았다. 이후 수십 년간 K씨와 두 딸은 미국 등지를 오가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J회장이 별세하자 2001년 두 딸은 친자확인소송을 냈고, 승소했다. 이후 H그룹을 상대로 유산소송을 내 각각 50억원씩 배분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2006년 추가로 소송을 제기해 각각 20억원씩 더 상속받았다.

    K씨는 영화배우 출신이다.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라고 하는데2006년 소송 당시에는 이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K씨의 이름이 아닌 두 딸의 이름으로 소송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D그룹 C회장 내연녀 C회장 마지막까지 병수발

    때는 1985년. D그룹 창업주인 C회장이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그때 수발을 든 사람은 정식 부인이 아니었다. C회장과 사실혼 관계에 있던 은처(隱妻) A씨였다. 둘 사이에는 아들도 있었다. C회장은 이 아들을 호적에 올리지는 않았다. C회장이 타계한 후 A씨는 부산에 정착해 살아갔다고 전해진다. 타계 직전 병실에 있던 C회장은 “부동산과 일정 금액을 줄 테니 서울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D그룹의 모태는 토건회사다. 1945년에 창립했다. 이후 D통운을 인수하면서 그룹으로 몸덩이가 커졌다. C회장은 1970년, 경영권을 아들에게 넘겼다. 그룹의 정점은 중동지역 개발 붐을 타고 해외 건설사업에 주력하던 1980년~90년대에 찍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추락해 IMF 외환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1998년에 해체됐다. 당시 채권단은 ‘그룹은 해체하지만 건설사는 남긴다’고 발표했다. 건설 부문만 남아 있던 회사는 결국 2000년에 부도가 났고 법원에서 파산이 확정됐다.


    D제약사 회장의 황혼이혼 배후에 있던 건 둘째 부인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자양강장제를 판매하고 있는 D제약사. 지난 2005년, K회장의 본부인인 P씨가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이혼소송의 원인은 남편의 외도. 당시 P씨는 여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법적으로는 P씨가 부인이었지만 당시 K회장이 함께 살고 있던 사람은 C씨로, K회장은 기업 공식행사에까지 항상 C씨를 데리고 다녔다. 사실상 기업의 실세는 C씨였던 것이다. K회장과 C씨 사이에는 아들도 있었다. 본처 사이에서도 아들이 있었고, 이 두 아들은 모두 같은 제약사에 임원으로 재직했다.

    소송의 발단은 K회장이 본처와의 소생인 아들 A씨를 경영에서 물러나게 하고, 외처(外妻)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B씨를 경영 일선에 배치시키면서다. 결국 외처인 C씨의 손을 잡은 셈.

    본처인 P씨는 이를 묵과하지 않았다. 아들이 빼앗긴 경영권을 찾아오기 위해 황혼이혼을 결심했다. P씨는 소송으로 K회장의 회사 주식을 위자료로 받으려 했다. 그렇게 아들의 D제약 지분율을 높여주려 한 것이다.

    결국 둘은 약 1년간의 소송 끝에 이혼하게 됐다. 법원은 당시 “K회장은 P씨에게 향후 4년에 걸쳐 약 53억원의 현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일각에서는 P씨의 아들이 53억원의 현금으로 D제약 주식을 매입할 것이라고 내다보기도 했다.


    ‘서자’ 많기로 소문난 창업주 이름 기억 못 할 정도

    외처가 너무 많아서 자식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재벌총수 이야기도 전설처럼 내려온다. 창업주들이 은처나 외처를 두는 것은 공공연하게 이뤄진 일이지만 이들 사이에서의 불문율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에 대해 내연녀들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워낙에 충분한 금전적 보상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A회장은 독특한 케이스다. A그룹의 A회장은 여자가 많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타 재벌총수와는 다르게 혼인신고를 한 부인만 4명에 이른다. 이 중 3명의 부인과 자식을 낳았다. 때문에 처자식이 너무 많아 누가 어느 부인의 소생인지 잘 외우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이 그룹은 외환위기 때 해체됐지만, 아직도 이 회장의 자녀들은 요소요소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C그룹 명예회장 L씨의 대형 스캔들

    지난 2010년. 재계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 있었다. 재벌기업 창업주의 장남을 상대로 혼외 자녀 양육비를 청구하는 소송이 제기되면서다. 당시 A씨는 국내 모 유력그룹 창업주의 장남 L씨를 상대로 “그의 혼외 아들 B씨의 양육비 4억8천만원을 지급하라”며 과거양육비상환 청구소송을 냈다.

    A씨는 소장에서 “스무 살에 만난 L씨와 동거하다 아들을 출산했지만 창업주인 그의 부친이 대노해 어쩔 수 없이 사실혼 관계를 정리하고 혼자서 아들을 키웠다”고 주장했다. A씨는 “부모 중 한쪽이 자녀를 키우면 상대방에게 양육비를 청구할 수 있고 과거양육비 상환도 요구할 수 있다는 게 대법원 판례”라면서 “아들 출생 후 만 20세가 된 시점까지의 양육비를 월 200만원 정도로 계산해 지급해달라”고 요구했다.

    앞서 A씨는 2004년 “L씨의 친생자임을 확인해달라”며 인지청구소송을 냈고, 2006년 친아들임을 확인하는 판결이 확정됐다.

    A씨는 당시 일흔에 가까운 나이었음에도 미모가 보통이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A씨의 측근은 “돈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며 “소송가액을 보면 돈이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측근은 “자신의 아들이 ‘가려진 사람’으로 오랜 세월을 지내야 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가슴 아파하고 있다”면서 “이번에 소송을 낸 이유도 자신의 아들이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들다운 대접을 받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